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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요 2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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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 말씀은 '그 후에'라는 말씀으로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부활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앞에 있는 20장 19절에서 23절에 나오는 것처럼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고, 26절에서 29절 말씀에 나타난 것처럼 여드레를 지나서 도마도 함께 있을 때에 또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후에’라고 하는 시점은 주님이 이렇게 제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신 후를 의미합니다. 주님이 부활하시고 40일 동안 계셨으니까, 그때로부터 그렇게 오래되지 않은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때에 제자들의 이름이 나오는데 베드로와 도마, 나다나엘, 세베대의 아들들, 또 다른 제자 두 사람이 있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제자들의 이름들 중에서 시몬 베드로의 이름이 가장 먼저 언급이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한 사건이 있었지만, 그는 통회자복 하면서 그 권위가 이전의 상태로 회복되었음을 암시해 줍니다. 이렇게 베드로를 비롯한 일부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내려와서 베드로의 집이나 어떤 곳에서 함께 지냈던 것 같습니다. 함께 모여 있던 중에 다른 제자들에게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고 하니까 다른 제자들도 따라 나섰습니다. 이에 대해서 혹자는 제자들이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의 사명을 버리고 그 전의 일터로 되돌아간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때의 제자들은 어떤 상태였습니까? 이미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때의 제자들이 물고기를 잡으러 간 것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못해서 절망 중에서 생업으로 되돌아간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갈릴리 부활하신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고 하셨던 그 약속을 기억하고 주님을 기다리는 중에 물고기를 잡으러 나간 것으로 보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또, 혹자는 주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에는 여인들의 공궤로 인해서 자신들이 쓸 것을 충당하고도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할 여유가 있었지만, 이젠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고기잡이에 나섰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어떤 견해가 맞는지를 따지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이 내용이 왜 여기에서 언급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 부분은 고기잡이에 나선 이유보다도 제자들이 사람 낚는 어부로서의 그들의 사명을 한층 더 일깨워 주는 것이고, 그같은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의 근원이 무엇에 있는지를 교훈해 주는 데에 있습니다.

  그렇게 제자들은 밤에 물고기를 잡기 위해서 디베랴 바다로 나갔습니다. 밤에 고기잡이를 나갔던 것은 어부출신 제자들의 경험으로 볼 때에 배 그림자가 보이는 낮보다는 밤 시간이 물고기를 잡기에 더 좋은 시간이라는 판단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한 때 물고기를 잡아서 먹고 살았다는 이력이 무색할 정도로 밤늦도록 고기를 잡으려고 수고했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그날따라 물고기가 별로 없었다거나, 고기잡는 기술이 부족했다거나 운이 없었다는 차원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뭔가 깨달음을 주고 가르치기 위한 주님의 섭리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고기잡이는 밤이 새도록 성과 없이 진행됐고 이미 날이 새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날이 새어갈 때에’라고 하는 4절의 말씀은 새벽이 되도록 고기잡이를 했지만 전혀 고기를 잡지 못한 실망과 허탈함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새벽이 찾아오고 있는 그때에 주님은 바닷가에 서계셨습니다. 제자들은 아직 어두움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이른 새벽이어서, 또 새벽의 짙은 안개 때문이었는지도 모르지만, 바닷가에 서신 분이 주님이신 줄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주님과 제자들이 만난 장소입니다. 주님과 제자들이 만난 장소가 어디입니까? 디베랴 바닷가였습니다. 디베랴 바다는 제자들의 삶의 현장이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있는 그 삶의 현장에 찾아가셔서 그들을 만나주셨습니다. 주님은 그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 속에 찾아와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뭔가 이쁜 짓을 하고, 우리가 충성되고 헌신하는 모습이 아름다워서 그 때문에 우리를 찾아와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주님의 일을 능력 있게 잘 감당하는 훌륭한 신앙인을 골라내서 그런 사람들에게만 찾아가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가치 있게 여기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하나의 이유만으로 우리를 찾아와 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이 찾아가셨던 제자들의 삶의 현장도 이를테면 실패의 현장이었습니다. 한 마리의 물고기도 얻지 못하고, 육체적으로 피곤하고 짜증나고 유쾌하지 못한 현장이었습니다. 그곳이 어떠한 곳이든지, 그 삶의 현장에서 어떤 모습 가운데 있든지 주님은 그곳에 찾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자신들의 삶의 현장으로 찾아오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3년이나 함께 동거했으니까 대략적인 그림자만 봐도, 목소리만 듣고서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왜 알아차리지 못했습니까? 기본적으로는 시간적이고 환경적인 문제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직 날이 환하게 밝지는 않았고, 물안개로 인해서 잘 알아보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기본적인 문제 외에 제자들에게는 영적인 문제가 없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십자가 고난을 당하시기 전에도, 또 부활 직후에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주님은 갈릴리에 제자들보다 먼저 가 있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갈릴리가 어떤 곳이고 어떤 의미가 있어서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셨겠습니까? 갈릴리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을 부르신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그물과 배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좇았던, 주님과의 첫 사랑이 간직된 곳이었습니다. 갈릴리는 주님이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면서 수많은 이적들을 행한 곳이었고, 가장 의미 있고 소중한 곳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주님을 저버리고 도망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적인 관점으로 본다면, 그들은 다 배반자들이었고, 어떻게 보면, 주님이 제자들을 양육하는 데에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그들은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결코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을 나무라거나 새롭게 제자들을 뽑아야 되겠다고 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삶의 현장에 찾아가셨습니다. 제자들이 영적으로 깨어 있고, 주님이 하신 말씀을 잘 간직하고 기억하고 있었다면, 그들은 갈릴리에서 먼저 가셔서 기다리고 계실 주님을 생각하면서 갈릴리에서부터 주님을 기다려야 했을 것입니다. 

  갈릴리에서 그들이 고기를 잡고 있다면, 바닷가에 지나가는 사람 한 사람만 봐도 저 분이 주님이 아니신지 다시 보고 또 보면서, 모습이 비슷하거나, 목소리만 비슷해도 주님이 아니신가 하면서 주님을 찾고 만나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갈릴리, 그들의 삶의 현장 가운데 찾아오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제자들을 비판할 것이 아니라, 이 모습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늘 우리와 함께 원하시고 우리의 삶의 현장에 날마다 찾아와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가정, 우리의 일터 가운데 주님은 먼저 가셔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면서 언제든지 우리를 만나주시기 원하시고 찾아와 만나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영적으로 무뎌서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모습 가운데 있지는 않습니까? 부활하신 주님!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무덤을 빈 무덤으로 만드신 전능하신 능력의 주님이 우리 삶 가운데 늘 함께 하고 계시는데도 이것을 알지도 못하고, 우리 삶의 문제들에 파묻혀서 거기에만 골몰하면서 주님을 발견하지 못하고,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마치 인생을 혼자 살아가는 것처럼 힘들어 하고 있지는 않았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이 실패의 현장이든지, 걱정과 염려, 낙심과 절망의 현장이든지, 힘들고 어려운 현장에서도 주님은 우리를 찾아와 주시고 함께 해주십니다. 원하기는, 부활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심을 의식하고 그 믿음으로 인해서 힘을 얻고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새벽이 되도록 물고기를 잡지 못했고, 바닷가에 서신 분이 주님이신지도 제자들이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주님이 제자들을 향해서 얘들아라고 하면서 부르셨다면 그 말씀을 듣고 말씀하시는 분이 주님이신 줄 알았을 법도 한데 그렇지 못했던 것은, 이 호칭은 ‘여보게들!’ 정도의 의미로 사용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현대어성경에서도 이것을 ‘이 사람들아’라고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고기잡이를 하던 제자들을 부르신 후에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말을 원어적으로 분석해 보면, 부정적인 답을 기대하는 물음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곧 “고기가 없지 않느냐? 그렇지?”라는 뉘앙스의 말입니다. 이 말씀은 고기잡이에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베테랑들이었던 제자들을 부끄럽게 하기에 충분한 질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질문은 곧 제자들이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시려는 질문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이 질문에 ‘없나이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무 것도 얻지 못한 현실, 그것이 사실이었고 사실대로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밤새도록 수고했어도 고기를 잡지 못했지만, 다시 한 번 그물을 던져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몸도 피곤하고, 고기잡이 전문가에게 비전문가가 이렇게 하면 될 거라는 얘기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습니다. 별로 내키지 않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순종했습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고기가 잡혔는데, 적당히 잡힌 정도가 아니라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잡혔습니다.

  이때 제자들은 해변에 서서 말씀하신 분의 존재가 누구인지를 인식했을 것입니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명백한 이적을 경험한 제자들은 그분이 바로 주님이심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7절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주님이시라고 말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는 바로 요한복음의 저자인 요한입니다. 요한 뿐만 아니라, 배를 타고 있던 모든 제자들은 그 이적을 통해서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오셔서 역사하셨음을 분명히 알고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삶 가운데 찾아오시는 주님은 우리의 모든 형편들을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고기를 많이 잡았는지, 한 마리도 잡지 못했는지 잘 아시고 물으십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주님의 그 물으심은 도와주시기 위함입니다.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그 실패의 상황을 아시고 그들을 도와주시기 위해서 물으셨을 때에, 주님의 도우심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없나이다”라는 솔직한 대답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없음을 깨닫는 것! 나는 주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아무 것도 아님을 알고 고백할 때에 주님은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고 의지할 때에 주님은 친히 우리를 도우시고 역사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의지하게 될 때에 부활의 그 능력이 우리 삶 가운데 임하게 됩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물고기를 잡지 못하던 제자들에게 주님이 물고기를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는 정도의 말씀이 아닙니다. 그물을 던지는 방향을 몰라서 그물 던지는 방향을 알려줬더니 물고기를 잡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말씀은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줍니다. 우리가 부활의 주님과 함께 하지 못하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님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물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한 실패의 현장이었지만, 부활하신 주님이 함께 하시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에! 좌절과 낙담으로 끝날 뻔했던 현실이 새로운 희망으로 가득 찬 이적의 현장으로 바뀔 수 있었고, 귀중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부활의 주님과 함께 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우리가 어떤 삶의 형편 가운데 있든지, 부활의 그 능력 아래 우리 삶의 현장이 부활의 소망으로 새롭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이처럼 우리 삶 가운데 도우시고 역사하시는 분이심을 믿고 그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실패의 현장을 기적의 현장으로 바꾸어 놓으셨던 부활의 주님 앞에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나아갈 때에 주님은 그 능력으로 우리들 가운데 함께 해주시고 놀라운 일들을 행하여 주실 것입니다.

  많은 물고기를 잡은 제자들은 이제 육지로 올라왔습니다. 육지로 올라와보니 숯불이 피워져 있고 그 위에 생선이 놓여져 있고 떡도 있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물고기를 잡을 동안에 제자들과 같이 아침 식사를 하시기 위해서 준비를 해놓으셨습니다. 생선과 떡. 생선이라는 단어를 물고기로 바꾸고, 떡이라는 단어를 보리떡으로 바꾸면 무엇이 떠오릅니까?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장정 5천 명이 먹고도 남았던 오병이어의 이적이 생각납니다. 어느 성경학자의 주장처럼, 어쩌면 이 순간에 또 한 번의 이적이 일어났는지도 모릅니다. 9절 말씀의 원문을 통해서 보면, 생선은 작은 물고기를 뜻하는 단어가 사용되었고, 떡도 단수가 사용돼서 떡 한 개입니다. 그렇다면, 그 정도의 양으로는 주님과 제자들이 같이 조반을 먹기에는 양이 부족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병이어의 기적 때와 같이 떡 한 개와 생선 한 마리로 또 한 번의 이적이 베풀어졌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러한 이적이 일어났을 수도 있겠지만, 요한복음을 기록하고 있는 저자 요한의 관심은 주님의 이적에 대해서는 별로 있지 않은 것 같고, 무엇보다도 주님과 제자들이 함께 친교의 식탁의 교제를 나눈 것에만 집중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식탁의 교제를 나누면서 주님과 제자들은 여러 가지 대화들을 나누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조반 후에 베드로에게 이런 질문을 하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그 질문에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주님은 다시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세 번에 걸쳐서 다시 물으셨습니다.

  세 번에 걸친 이 질문은 주님을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의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일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어쨌든, 그 세 번의 질문은 한 가지 중대한 과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와 같은 질문과 함께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잘못을 질책한다거나, 베드로에게 다른 어떤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라, 베드로의 사명을 다시 새롭게 해주셨습니다. 사실 요한복음은 요한복음 20장에서 끝맺음을 하고 있습니다. 20장으로 마쳐도 전혀 무리가 없어 보이고, 21장의 말씀은 부록으로 추가된 말씀처럼 여겨집니다. 여기에서 요한은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을 다시 한 번 만나주셨고, 베드로에게 그 사랑을 확인하시면서 사명을 새롭게 해주셨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이 21장의 기록이 없었다면, 베드로가 그 명예를 회복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릅니다. 주님을 부인하고 배반한 사람으로 기억을 하면서 초대교회에서 베드로가 설 자리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요한은 부활하신 주님이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는 사명을 주셨다는 것을 빠트리지 않고 기록을 했고, 베드로는 흔들림 없이 초대교회의 능력 있는 지도자로 설 수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신 것처럼,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들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사명을 감당해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의 사명에 대해서 흐릿해 질 때가 있습니다. 내가 왜 새벽기도 마치고 집에 가자마자 밥을 해서 남편 출근시키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야 하는지, 내가 왜 추운 아침부터 회사로 출근해야 하는지, 내가 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지, 우리의 사명을 잊어버리고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삶의 현장에 오셔서, 우리와 교제를 나누시면서 새로운 삶의 방향을 제시해주십니다. “네 양을 먹이라.” “네 삶의 현장에서 빛된 삶을 살아라.” “네 삶의 자리에서 나를 증거하며 살아라.” “너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보게 하라.” “부활의 영광과 능력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라.” 이러한 사명들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엠마오도 내려갔던 두 제자들도 그들의 사명을 망각하고 절망 속에서 엠마오를 향해서 내려갔었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에 그들은 그들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부활의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처럼,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교제하면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기억하고, 사명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이 어디이든지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와 함께 해주십니다. 부활의 주님이 우리 삶 가운데 함께 하고 계시는데도 주님이 함께 하시는지 깨닫지 못하고,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는 모습이 아니라, 내 삶 가운데 부활의 능력으로 언제나 임재하시는 주님을 의식하고, 우리들 곁에서 늘 도우시고 역사하시는 주님과 늘 동행하면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와 사랑의 교제를 나누시면서 우리들의 사명을 새롭게 해주십니다.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를 기억하고,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우리에게 주신 사명들을 힘써서 잘 감당해 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부활주일인 오늘, 주님의 부활이 오늘 하루 기념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늘 동행하면서 살아가는 우리들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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