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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오 선생님 (요 20:11-18)

첨부 1


오 선생님 (요 20:11-18)


(경상도 할마이 셋이 이야기를 나누는데..)
한 할매가
“어이 예수가 죽었단다.”
(다른 할매가)
“와 죽었다 카드노??”
“못에 찔려 죽었다 안카나.”
“어이구 머리 풀어 헤치고 다닐 때 알아봤다.”
(이때 암말 않던 할매가)
“어이 예수가 누고?”
“몰라 우리 며느아가 아부지 아부지 캐쌌는거 보이 사돈 어른인갑지 뭐!”
(ㅎㅎㅎ그 후에 또 다른 할매가 물어보는데)
“그래 문상은 갔드나?”
“아니 안갔다.”
“왜 안갔노?”
“갈라 캤더니 사흘만에 다시 살아났다카드라”

작은 마을에 젊은 수도사가 부임해 왔습니다. 그는 매일 아침 예배를 집례하고 기도하며 마을 길을 청소했습니다.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가 기도하며 도와주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좋아하고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처녀가 아이를 갖게 됐습니다. 사람들은 그 처녀를 에워싸고 돌로 칠 기세로 물었습니다. “너를 이 지경으로 만든 놈을 말하면 용서해주겠다.” 다급한 처녀는 둘러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 그 젊은 수도사를 가리켰습니다. 모든 사람이 놀랐습니다. 
실망과 분노에 찬 사람들은 그 수도사를 돌로 쳐 죽이고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피투성이가 된 시신을 추스르던 몇 사람들이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그 수도사는 남자가 아닌 여자였습니다. 얼마든지 자신을 변호할 수 있었으나 그 수도사는 침묵으로 죽음을 선택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로 찌든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사랑을 아시나요?

먼저 생각할 것은 죽음입니다.
옛날 서양 궁궐에는 왕 말상대 역할을 하는 광대들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왕이 자신이 쓰던 지팡이를 광대에게 주면서, 일주일 후에 모든 신하들을 불러 모을 테니, 모인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지혜롭지 못한 사람 즉 어리석은 사람을 찾아서 그 지팡이를 주라고 명을 내렸습니다. 그러면 그 지팡이를 받게 되는 사람에게 죽음의 벌을 내리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한 주간 동안 광대는 어떤 신하가 가장 어리석은 신하일지를 찾고 또 찾았습니다. 한 주간이 지난 후, 모든 신하들이 왕 앞에 다 모였습니다. 드디어 광대는 지팡이를 들고서 왕 앞에 섰습니다. 광대가 그 지팡이를 한 명의 사람에게 주어야 하는 순간이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오직 지팡이에만 눈이 가 있습니다. 혹시 나에게 그 지팡이가 주어지는 것이 아닐까 하며 초조해 하고 있었습니다. 
광대는 먼저 왕 앞에 큰 절을 올리고서는 그 지팡이를 들어 왕에게 주었습니다. 왕은 광대에게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이 지팡이를 여기 모인 사람들 중 가장 어리석은 사람에게 주라고 했더니 왜 다시 나에게 주느냐?” 
그랬더니 광대가 왕에게 하는 말이 
“왕이시여, 제가 이 왕궁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둘러보았습니다. 그리고 가장 지혜롭지 못한 사람을 찾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 결과 저는 가장 지혜롭지 못한 사람은 왕이시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왕이 호통을 칩니다. 
“무엄하다! 왕인 내가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말이냐? 무슨 근거로 그런 판단을 내렸느냐? 만약 네 판단의 근거가 터무니없다면, 네 놈이 죽음의 벌을 받을 줄 알거라.” 
광대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왕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왕이시여, 이곳에 모인 모든 신하들은 자신들이 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 주간 동안 죽을 준비를 하고 여기에 모였지만, 오직 왕께서는 자신이 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이 자리에 참석하셨기에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사람이 죽음을 준비하지 않고 산다는 것이 가장 지혜롭지 못하고, 어리석은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가장 미련하고 어리석은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하면 자신이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사는 사람입니다. 죽음을 준비하지 않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들 가운데 죽음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이 과연 몇 사람이나 될까요? 오히려 죽음을 준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래도록 살 생각에만 집중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오죽하면 인생은 70부터라는 말이 다 나왔겠습니까? 예전에는 60만 넘어도 대단하게 생각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만 이제는 80을 넘어 백수를 이야기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백년 만년 살 것처럼 해도 여전히 그 시간들이 지나면 우리는 세상을 떠나야만 합니다. 즉 우리네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처럼 120년을 넘기지 못하는 신세들이요 아니 그 나이가 되기 전에 먼저 우리 몸이 견디지를 못합니다. 그래 노인들의 건강은 내일을 모른다고 하지 않습니까? 어제까지만 해도 건강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자리를 보전하고 눕는 경우도 얼마든지 보기 때문입니다. 결국 아무리 외면하려고 해도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길이 있다면 그건 바로 죽음입니다. 

그건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더욱 주님은 처음부터 죽기로 작정하고 세상에 오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처음부터 제자들에게 자기가 당해야 될 고난과 죽음을 말씀하셨지만 제자들 중 그 누구도 이를 관심 있게 들었던 사람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주님이 고난을 말할 때마다 그들은 예수님이 보좌에 앉으시면 누가 그 좌우편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를 놓고 서로 으르렁대며 다툴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세상에 높아지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선거를 치를 때도 이 선거에서 이기면 나도 그 덕에 한 몫을 차지하리라고 하는 야심찬 꿈들을 다 꾸는 법인데 하물며 그 고생을 하면서 3년 반 동안이나 예수님을 따라 다녔던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더욱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를 때에는 그 나름대로 바라는 것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그들의 바람이 잘 나타나는 것이 바로 누가 더 큰 자냐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여전히 주님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자 하는 그런 마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한 대속 제물로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보좌에 앉아 계시던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즉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철저히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그 하나님의 뜻이란 죄 가운데 태어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매여 살다가 죽어 심판을 받고 불못에 던져질 수밖에 없는 인생들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구원의 길을 찾지만 그러나 스스로는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누군가는 그 손을 잡아 주어야 합니다. 누군가는 그 길을 열어 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대홍수 때 방주의 문을 하나님이 닫아버리시니 방주의 문이 닫힌 다음에는 그 누구도 방주로 들어갈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한데 그 방주조차도 누가 만들도록 했습니까? 하나님이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만들도록 하셨습니다. 단지 노아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했을 뿐입니다. 

그건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인생들을 위하여 구원의 길을 열어놓고자 인간 예수님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죄의 삯은 사망인데 그냥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은 생명으로만 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어야만 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양이나 염소 송아지를 가지고 대속의 제사를 드리기도 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일 뿐입니다. 근본적으로 죄 가운데 태어난 인생의 본성이 그 제물로서 바뀌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단번에 성소에 들어갈 수 있도록 그 길을 열어 놓으시기로 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육체를 통한 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닌 우리들의 원죄를 소멸하기 위한 하나님의 화목제물로서의 죽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맞아야 할 형벌을 주님이 대신 당하시고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지셨습니다. 온 몸이 피투성이입니다. 거기다가 온갖 희롱을 다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벌거벗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도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며 용서를 구하십니다. 그 주님이 열어놓으신 용서의 길이 있기에 그 용서를 붙잡는 사람 믿음으로 그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구원의 문에 들어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 주님의 용서를 붙잡은 두 사람이 십자가의 현장에도 있었습니다. 하나는 같이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는 강도입니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셨습니다. 또 한 사람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군사들의 지휘관인 백부장입니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십자가 곁에서 쭉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마지막 숨지기까지의 하시는 말씀과 시간이 흘러가면서 때가 제 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는 가운데 마지막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는 모습까지를 다 목격한 다음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그렇습니다. 같이 십자가에 달렸던 강도도 예수를 못 박았던 백부장도 구원을 얻을 수 있었다면 하물며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우리들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감사한 것입니다. 그 십자가는 단순한 장식품이 아닌 형틀입니다. 사형수가 사형당하는 형틀입니다. 그 형틀을 자기가 직접 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죽음을 예수님은 처음부터 목적하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사실 죽기 위해 이 세상에 오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처음부터 모든 인생은 죽음을 마지막 목적으로 삼고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탄생의 기쁨도 잠시요 결국은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하지만 죽임이 종착역이냐 하면 그것이 아닙니다. 죽음은 단지 환승역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죽음을 통해 한 사람은 영원한 멸망으로 가는 열차를 갈아타는 것이요 또 한 사람은 영원한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천국 열차를 올라타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음에 이르기 전에 이미 각자는 그 열차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열차표를 가지고 있습니까? 천국행 열차표입니까? 아니면 지옥행 열차표입니까? 그 열차표는 다름 아닌 믿음입니다. 예수를 나의 구세주로 믿는 믿음이야말로 하늘나라로 가는 천국행 열차표인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죽음은 두 가지 죽음이 있습니다. 멸망의 죽음과 영광의 죽음이 그렇습니다. 죽는 모습이 어떤 모습이냐가 아니라 어떻게 죽었느냐가 아니라 죽음에 임하는 모습 다시 말해서 죽음에 이르기 전에 그가 어떤 준비를 했느냐에 따라 그 죽음이 영광의 죽음이 될 수도 있고 멸망의 죽음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 역시 멸망당할 자들에게는 조롱거리가 되었지만 그러나 구원받을 모든 자들에게는 감사와 찬양받으실 죽음이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 죽임이 바로 나의 죽음이어야 되었던 것을 하나님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심으로 말미암아 그 육체로 열어놓으신 성소의 길로 우리는 당당하게 들어갈 수 있데 된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구원받은 그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을 품어 오늘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은 부활의 감격입니다. 
이별의 아픔 상실의 고통만큼 큰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가장 사랑하는 이를 잃었다고 할 때 그 아픔을 무엇으로 대신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건 평생의 아픔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땅에 묻지만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고 했습니다. 자식을 앞세운 부모의 마음은 그러나 그 무엇으로도 위로를 받지 못합니다. 한 평생 그 눈에서 눈물이 마를 날이 없습니다. 저 역시 동생을 먼저 하나님 앞에 보냈습니다. 그것도 큰 사고였습니다. 1974년 2월22일 이순신 장군의 위패를 모신 통영 충렬사를 참배하고 모함으로 돌아가던 중 YTL수송정이 갑작스런 돌풍으로 침몰했습니다. 

이 사고로 배에 타고 있던 해군과 해경 장병 316명 가운데 159명(해군병 159기 103명, 해경 11기 50명, 실무장병 6명)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순직 훈련병 가운데 하나가 제 바로 밑의 동생입니다. 그때의 아픔도 컸지만 그 누구도 부모님의 아픔을 대신할 수는 없었습니다. 더욱 그날이 제 생일날이기도 합니다. 제가 교회 안에서 구원받은 날로 생일을 기리는 것도 바로 그런 까닭입니다. 

한데 저도 비슷한 경험을 또 했습니다. 다시 찾기는 했지만 만 두 살밖에 되지 않았던 제 딸을 잃어버렸던 적이 있습니다. 저 경상도 군위에서 전도사로 단독 목회를 하던 시절입니다. 잠시 온 가족이 짬을 내서 서울에 들렀습니다. 본가와 처가에서 하루씩 머물고 막 목회지로 돌아가려고 준비하다 보니 치매 증세로 어려움을 겪던 장모님과 딸이 없어진 겁니다. 아무리 동네방네 다니면서 찾아보았지만 찾을 수가 없습니다. 급히 전단지를 만들어서 돌리고 실종신고를 하고 하는데 별별 생각이 다 듭니다. 

교회에 연락을 취했습니다. 장로님께서는 자기가 예배를 대신해서 인도할 터이니 서울에 남아서 아이를 찾아보라고 하시는데 아무래도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이 돕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생각과 더불어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했는데 먼저 하나님 앞에 내 할 도리를 다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할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내를 서울에 두고 혼자서 교회로 돌아갑니다. 

그때 아버지가 돼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는 비난도 들었지만 저는 그게 바른 길이라 믿었습니다. 그래 혼자 목회지로 내려가는 마음이 가벼울 리가 있겠습니까? 어찌 그 마음인들 아프지 않았겠으며 힘들지 않았겠습니까? 그래 온 교회에 알리고 기도를 부탁을 합니다. 그런 가운데 주일 예배를 하나님께 올려드리고 성도들과 함께 주님의 자비를 구하며 철야를 하고 다시 서울로 향합니다. 서울에 남은 아내는 아내대로 또 아이를 찾기 위해 얼마나 몸부림을 쳤겠습니까?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일은 제가 서울에 고속터미널에 막 도착해서 처갓집으로 전화를 했더니 아이를 찾았다는 것입니다. 아직 집으로 온 것은 아니고 우리 아이와 똑같은 차림의 아이를 사당역 근처에 있는 파출소에서 보호하고 있다는 연락을 받고 확인하러 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연락이 오기를 우리 아이가 맞다는 것입니다. 아니 어떻게 개봉동에서 잃어버린 아이가 사당동까지 가게 됐는지는 아직도 모릅니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자비를 베풀어주셔서 아이를 다시 찾도록 만들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때 아이를 잃고 기도할 때의 절박감이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내가 부주의해서 아이를 잃었다고 하는 자책감 때문에도 아주 힘이 듭니다. 다시 찾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도 있습니다. 그래 더욱 믿음으로 주님 앞에 엎드리며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고 고백하며 밤을 지새우는 그 마음이 오죽하겠습니까? 
이제는 잘 자라서 한 가정을 꾸렸지만 그 아이야말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구하고 찾는 자에게 주시며 찾아내게 해 주시는 분임을 더욱 확신하게 만들어준 계기가 되었습니다. 

지금 마리아의 마음은 그러나 그 마음과는 또 다른 마음일 것입니다. 이미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모습을 생생하게 지켜본 마리아입니다. 자기 인생을 다시 쓸 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분입니다. 전에 일곱 귀신들렸던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그 형편이 오죽했겠습니까? 그랬던 그가 새로운 삶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고침도 받았습니다. 그래 곁에서 예수님을 섬기면서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자기에게 새로운 삶을 허락하여 주신 분이기에 평생을 옆에서 모셔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는 모습도 지켜보았습니다. 십자가에서 숨지시기까지의 그 고통스러운 광경도 다 지켜보았을 뿐더러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말씀도 다 들었습니다. 그 모습이 눈에 아련합니다. 그 말씀이 귓전에 맴돕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돌아가셨습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장사하는 모습도 다 지켜보았습니다. 그래서 안식 후 첫날 자기들의 풍습을 따라 예수의 시체에 향유를 발라 드리기 위해서 찾아온 길입니다. 그런데 무덤이 열려있습니다. 거기다가 예수님의 시체도 거기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 마리아가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아있는 것이 아닙니까? 

천사들이 이릅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말을 하는데 뒤가 이상합니다. 그래 뒤로 돌이켜 보았더니 예수께서 서 계십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그분이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생생하게 목격하였던 입장에서는 더욱 예수님과 똑같은 모습의 사람이 자기 앞에 있다 하더라도 참 닮은 사람도 다 있다 하는 마음이지 그분이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이라고는 생각도 못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만 알고 이릅니다.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니 그때서야 마리아가 정신이 번쩍 듭니다. 그래 왈칵 눈물이 앞을 가리며 “랍오니” 즉 “선생님” 하면서 안겨들려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고 하십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죽으셨습니다. 자기가 아파하며 지켜보았습니다. 무덤에 잠사하는 모습도 지켜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무덤에 장사됨을 생생하게 지켜본 목격자로서 분명히 죽었던 그분이 분명이 무덤에 장사지낸바 된 그 분이 다시 살아나셔서 자기 눈앞에 있다고 하는 사실이 정말 믿어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거기다가 직접 자기와 지금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 않습니까? 그 기쁨과 그 감격을 무엇으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죽음은 그냥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헤어짐으로 끝나고 슬픔과 한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여전히 슬픔과 한으로 남는 죽음도 많이 있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호상이라고 해도 그것도 그냥 나이만 많아서 세상을 떠나는 것을 다 호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아무리 자식이 많다고 해도 아무리 남겨놓은 재산이 많다고 해도 아무리 오래 살았다고 해도 아무리 누구나 다 호상이라고 말한다고 해도 그게 그래서 호상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짜 호상이라면 그건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이별이 될 때 그것을 호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 지옥으로 가는 이별이라면 그게 어떻게 호상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가 아름다운 죽음 행복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길이 이제부터 열려지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다시 사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만나실 때도 처음 주시는 말씀이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이십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였습니다. 

마리아의 전하는 말을 들었어도 진가민가 했었는데 이제는 모든 것이 확실해졌습니다. 한데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했지만 도마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였던 것입니다. 

그 후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이 복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습니다. 우리 눈으로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전해진 많은 증거들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음과 지금 하늘에 오르시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다시 오심을 우리는 분명히 믿습니다. 이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날마다 이기고 또 이기게 하는 줄로 또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의 승리의 원천입니다. 주님이 죽음마저 이기셨기에 우리도 범사에 승리하는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 주님께서 오늘 우리들에게 보내주신 성령께서 우리의 모든 능력이 되시고 우리의 지혜가 되시고 우리의 보증이 되신다는 사실을 또한 우리가 기억하시고 “선생님”하며 기쁨으로 주님께 안겨들던 마리의 감동과 감격을 가지고 오늘을 살며 너무 신이 나서 달려가 제자들에게 가서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던 모습 그대로 우리도 예수님을 전하며 기쁨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무리 마음이 인색한 사람이라도 한 아기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축하의 전화 한 통이라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부터 새 생명의 출생은 모든 인류 가족 경사의 대명사였습니다. 이런 축복 속에 태어나는 그 생명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의 그늘에 덮여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참혹한 일일까요? 하지만 이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죽음을 향하여 행진하기 시작합니다. 이 때문에 역사 이래로 사람들의 소원은 죽음을 이겨보는 것, 즉 불사(不死)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불사에 관한 신화를 만들거나, 있지도 않은 불로초를 찾아 떠나는 정도였습니다. 현재까지도 인류 최대의 숙제는 죽음입니다.

그런데, 이 영원한 저주가 풀리는 아침이 열렸습니다. 바로 인류의 죄를 걸머지시고 무덤에 들어가셨던 예수께서 부활하신 아침입니다. 이 부활은 예수 자신만의 것이 아닌 우리 모두의 소망, 즉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것입니다. 이제 두 번째, 열 번째, 백 번째 그 이상의 열매들이 뒤따르는 것입니다
혹시 이런 장면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 달려오는 왕의 전령, “사형 중지!” 이 소리만큼 감격스러운 것이 있을까요? “예수께서 다시 사셨다!” 이 소리는 그것 이상으로 놀라운 소식입니다. 죽음을 심어 영생을 거두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할렐루야!

1967년 6월 30일 열일곱 살의 운동선수 조니 에릭슨은 체사피크 만에서 다이빙을 하다 사고를 당했습니다. 그로 인해 목 아래부터 전신이 마비된 그녀는 쓰라림, 좌절, 원망, 분노, 심지어 자살하고 싶은 침체까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감정에 휩싸였습니다. 
하지만 재활 훈련 및 치료 기간을 통해, 그리고 부모님, 자매들과 친구들의 열렬한 후원을 통해 점차 깊은 블랙홀에서 빠져 나왔습니다. 그녀는 입으로 그림을 그리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후원하는 모임도 만들었습니다.

그녀의 변화의 중심에는 성경을 재발견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기처럼 움직이지 못하고 무력하며 마비된 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에 대한 환상을 보면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녀에게 가장 큰 도움을 준 것은 부활이었습니다. 

“나는 이제 미래에 대한 소망이 있다. 성경은 우리의 몸이 하늘에서 영화롭게 된다고 말한다. 그때는 내가 여기에서 죽은 후 내 발로 춤을 출 때다. 손가락은 오그라들어 구부러지고, 근육은 쇠약해지고, 무릎은 비틀리고, 어깨 아래로는 아무런 감각이 없는 내가, 언젠가는 가볍고 밝으며 강력하고 눈부신 의로 옷 입은 새로운 몸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것이 나처럼 척추를 다친 사람에게, 뇌 손상을 입은 환자 혹은 조울증 환자에게 어떤 소망을 주는지 상상할 수 있는가? 다른 어떤 종교나 철학도 새로운 몸과 정신을 약속하지 않는다. 오직 그리스도의 부활의 복음 안에서만, 상처 입은 사람이 이처럼 놀라운 소망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놀라운 소망이 부활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전해진 것을 믿으십시오. 우리는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에 새롭게 빚어진 몸과 영혼을 가지고 주님 나라에서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날까지 이 부활의 감격을 가지고 오늘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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