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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7) : 의심 많은 도마 (요 20:2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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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만난 사람들(7) : 의심 많은 도마 (요 20:24-29)

오늘은 예수님께서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는 부활주일입니다. 인류의 최대의 적인 죄와 사망을 깨뜨리고 죄로부터 참 자유를 주신 날입니다. 결핍의 갈증으로 시달리는 인류에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시기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죄악으로 죽어가는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끝없는 갈등과 번민으로 괴로워하는 이들에게 참된 평안을 주시기 위해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가난과 각종 질병으로 고통받는 인간에게 참된 부요와 치유를 주시기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울음을 웃음으로 바꾸기 위해, 고통을 평안으로 바꾸기 위해, 전쟁을 평화로 바꾸기 위해, 불안을 안식으로 바꾸기 위해,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기 위해 무덤을 깨뜨리고 부활하셨습니다. 죽음에 마침표를 찍고 우리에게 영원한 소망을 주시기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이 부활의 영광과 축복이 우리 성도님의 가정에 임하시길 기원합니다. 같이 따라서 하겠습니다.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도 부활합니다.” 

옆에 계신 성도님에게 인사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성도님도 부활하십니다.” 

모든 근심과 염려, 절망과 회의, 죄와 사망으로부터 부활하는 부활절이 되시길 바랍니다. 무덤처럼 꽉 막힌 담이 허물어지고 기쁨과 소망이 넘치는 부활절이 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 부활하셨는데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그 당시에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의 제자가 된 도마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겠다고 노골적으로 드러내 놓고 말했습니다. 

1. 왜 부활을 믿지 못합니까?

오늘 도마는 왜 부활을 믿지 못하겠다고 합니까? 25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찾아 왔는데 그 때 도마는 그곳에 없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목격한 제자들이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소식을 전하자 그는 자신이 직접 보지 못하고 만지지 못했기 때문에 믿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각종 기적을 실제적으로 체험받은 사람들입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것을 본 사람들입니다. 나이성 홀로된 여인의 아들을 살리시고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것을 본 사람들입니다. 38년된 병자를 치유하는 것을 본 사람들입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것을 본 사람들입니다. 바다 위를 걸어가시고 폭풍을 잠잠케 하시는 초인적인 능력을 보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부활하셨다고 하니까 자신들이 직접 목격하기 전에는 믿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고, 인간의 한계입니다. 역사 속에 일어난 사건은 우리가 보지 못해서 믿지 못할까요? 진조 할아버지 계셨음을 믿습니까? 보았습니까? 보지 않았지만 믿습니다. 이순신 장군 임진왜란 때 일본군을 물리친 장군이라는 것 믿습니까? 수많은 역사적 사실을 믿습니다. 보았습니까? 보지 않은 것이 훨씬 많습니다. 그런데 왜 믿습니까? 기록된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기록한 사람이 진실을 기록했다고 전제하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전달해 주는 사람이 거짓이 아니라 사실을 전달해 주고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성경에 예수님의 부활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 이외에도 일부의 역사가들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믿지 않습니까? 성경 기록자의 진실성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달자의 진실성을 의심하기 때문에 믿지 않습니다. 신화적 기록이고, 역사적 신빙성이 없는 꾸며낸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꾸며낸 신화적 이야기라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역사를 평가할 때 현대인을 지배하는 사고 구조를 근거로 한 것입니다. 세 가지입니다. 

첫째가 비평의 원리입니다. 
둘째가 유추의 원리입니다. 
셋째가 상관의 원리입니다. 

역사를 나눌 때 크게 기록된 역사와 사실적 역사로 나눕니다. 기록된 역사는 기록하는 사람에 의해 쓰여지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일 수도 있고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기록된 역사가 사실이려면 객관성이 필요합니다. 많은 증거와 증인이 필요합니다. 고증이 필요한 것입니다. 개연성이 있어야 합니다. 지나간 역사는 과학적 실험을 통해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의 경험과 불일치가 되면 그것을 믿지 않습니다. 과거 발생한 사건은 오늘과 상호 관계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경험은 결코 현재의 경험과 완전히 다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날 일어 날 수 없는 것은 과거에도 일어 날 수 없다고 단정하는 것입니다. 

지금 부활이 없는데 어떻게 과거에 부활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원인 없는 결과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부활은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기적을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부활이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제자들의 신앙 고백적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과학 문명이 발달되지 못한 그 당시 사람들의 신앙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자들에 의하여 신화적으로 꾸며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신격화하기 위하여 꾸며낸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실제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역사적 인물이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으니까 부활을 합리적으로 설명을 합니다. 

기절설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일시 기절했을 뿐이며 장사를 한 후 정신이 되돌아와서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빈 무덤설을 말합니다. 무덤을 잘 못 찾았다고 말합니다. 어두운 새벽길에 잘못 찾아서 빈 무덤을 보고 주님이 부활한 것으로 오해했다는 것입니다.

도난설을 말합니다.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 옮겨 놓고는 부활했다고 거짓을 퍼트렸다는 것입니다.

환상설을 말합니다. 부활이 없었는데 돌아가신 후 죄송한 뉘우침에 부활을 말씀하신 것을 굳게 믿고 심히 피곤하여 머리속에 그리다가 마침내 환상을 보고서 이것을 실제인양 퍼트렸다는 것입니다.

신비설을 말합니다. 바벨론 신화. 동방신화에 나오는 부활설을 예수에 적용했다는 것입니다.


2. 우리 주님은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어떻게 대합니까?

우리 같으면 외면해 버릴 것입니다. 믿어 주지 않으면 얼마나 화가 납니까? 자존심 상하면 얼마나 견딜 수 없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여드레가 지난 후입니다. 2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 주님은 도마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줄을 다 알고 계시면서도 찾아 가십니다. 찾아 오셔서 무엇을 하십니까?

1) 먼저 평강을 주십니다. 

2) 부활의 증거를 보여 주시며 믿으라고 합니다.

27절,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요 20:27)" 

우리 주님의 소원은 우리가 부활을 믿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믿음이라는 말처럼 많이 나오는 말이 드물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만 "믿음"이라는 말이 모두 98회 나옵니다. 우리 주님께서 사람을 만나실 때 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을 바라십니다. 다른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만 하면 예수님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부활절 막연한 부활신앙이 확고한 부활신앙으로 변하시길 바랍니다. 냉소적인 부활신앙이 경험적인 부활신앙으로 변화되시길 바랍니다. 무기력한 부활신앙이 영향력을 부는 부활신앙으로 변화되시길 바랍니다. 믿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실 때 부활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25-26)” 믿습니까?

회당장 야이로의 12살난 딸을 살려 주실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하였습니다. 나사로를 살릴 때 예수님이 원하는 것은 믿음이었습니다.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라고 말하자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 (롬 14:23)"라고 했습니다. 과학 문명이 발달됨에 따라 가장 없어지는 것은 바로 이 믿음입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18:8).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확실하게 믿어야 하겠습니다. 사람들이 믿지 않는 것은 증거가 없어서 믿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기적을 믿지 않는 것은 근본적으로 믿지 않으려는 태도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기 때문에 부활도 기적도, 성경도 믿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모시기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왕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삶의 기준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연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했다는 것이 사기이고, 환상이고, 착각이고, 꾸며낸 이야기이고, 신화일까요? 기절하였다가 다시 일어났겠습니까? 확실한 증거들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3) 우리가 믿을 수밖에 없는 증거들은 많이 있습니다. 

(1) 기절하였다가 다시 일어 낫겠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성경의 진리이면서 역사적 사실입니다. 빌라도도 빌라도 보고서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대하여 상세하게 기록하였습니다. 군인들이 돌에 인봉하고 무덤을 지켰습니다.(마 27:62-66)

(2) 여인들이 무덤을 잘 못 찾아가서 빈무덤을 보고 착각했겠습니까? 
①예수님의 묘지는 공동묘지가 아니라 개인 묘지이기에 찾기에 쉬웠습니다. 
②(눅23:55)여인들이 무덤의 위치를 미리 확인하여 두었습니다. 
③(막16:2)해 돋을 때에 무덤으로 다시 베드로가 갔습니다. 
이 외에 요한과 다른 여인들도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 장소에 대하여 여러 사람이 판단 착오를 일으킬 수는 없습니다.

(3) 제자들이 시체들 도둑질하여 옮겨놓고 거짓으로 부활했다는 소문을 퍼뜨렸겠습니까?
① 그럴만한 이유가 없습니다. 잡히시던 현장에서 도망하고 주님을 부인하던 제자들입니다. 또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 부활을 전했을 때, 믿지 않으려고 확인까지 하려던 제자들입니다.
② 그들은 완전히 생활이 변하였습니다. 설혹 그렇다 하더라도 제자들 11명 전원이 순교하였는데 한결같이 거짓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버렸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부활을 확실히 믿은 신앙만이 순교의 자리까지 제자들을 인도하였습니다.
③ 가능성이 없습니다. 가야바가 시체 도난을 막도록 특별히 경계하게 하지 않았습니까?
④ 로마 황제의 인봉(마27:66)이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허락 없이 떼어내면 사형입니다. 

(4) 예수님을 너무 그리다가 그만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고 헛소리 한 것입니까?
① 유령이 아니라 실제로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눅24:13-35)
② 도마에게는 상처를 만져보게 하셨습니다.(요20:28)
③ 떡과 고기를 잡수시기도 하셨습니다.(눅24:39-49)
④ 여러 사람이 일시에 환상을 보고 실제적 사건으로 오인했다고 생각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후, 40일간 무려 11번 나타나셨고 갈릴리 지정된 산 위에서는 500여 형제에게 일시에 나타나셨습니다. 미국 심리학회 회장을 지낸 게리 콜린스 박사는 “환상이라는 것은 개인적인 것이다. 그 본질상 한 번에 한 사람만이 볼 수 있는 것이다. 집단적으로 목격하는 것은 절대로 환상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5) 예수님을 신화화하기 위한 기록이겠습니까?
부활에 대한 기록들을 보면 이를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어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왜곡하여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하였다고 할 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맨 처음 만난 사람이 베드로나 요한 같은 제자들이 아니고 죄인 취급을 받았던 막달라 마리아라는 사실을 기록하지 않고 빼 버렸을지도 모릅니다. 당시 여인들은 증인이 될 수 없었습니다. 사도들이 두려움과 의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도 사실대로 기록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기록을 정확합니다. 의심할 만한 사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사람이 기록하였지만 성령의 감동을 받고 기록하였기에 사실 그대로를 기록하게 된 것입니다.

가장 큰 증거는 제자들의 생활의 변화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도망간 자들입니다. 장례식에 조차 참석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낙담하고 뿔뿔이 흩어진 자들입니다. 여인들이 부활을 전해 주어도 믿지 않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순교를 하였습니다. 진리를 위해 목숨을 내 걸 수 있지만 거짓과 사기를 위해 누가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내어 놓겠습니까? 죽은 다음의 생명을 분명히 믿은 제자들이 순교의 잔을 마신 뒤, 위대한 신앙인들은 순교의 길을 기쁨으로 알고 따라 나섰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탄생되었습니다. 이 보다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겠습니까? 사도행전의 삶들은 부활을 증거하였고(행4:2), 베드로는 부활을 말하지 말라는 사두개인들에게 사람의 말과 하나님의 말 중에 어느 것을 듣겠느냐고 반문하였습니다.(행2:14-36) 

사도행전은 '부활의 복음서'라고 불릴만큼 부활이 확증하고 있습니다.(2:23, 32,3:15, 26, 4:10, 33, 5:30, 10:40, 13:30-34, 17:31)

바울이 고린도 전서를 기록할 때가 ad 55년 또는 56년으로 본다면 부활에 대한 역사적 사실의 기록이 왜곡되거나 창작될 가능성이 없습니다. 아직도 수많은 목격자들이 살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욱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예수님의 가족의 변화입니다.
예수님의 가족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였습니까? 성경을 보십시오. 

마13:55-56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이 식구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요7:5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막3:21 "예수의 친속들이 듣고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그러나 그들은 부활을 목격하고 변하였습니다. 

행1:1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확실히 부활하였습니다. 야고보서는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예루살렘 교회의 감독)가 주후 62년경 순교하기 직전에 기록한 말씀입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예수님에 대한 신앙 때문에 돌에 맞아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뭐라고 말씀합니까? 

야고보서 1장 1절에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목격하였기 때문에 부정할 수 없는 확실한 부활을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쉽게 희생제사와 율법을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돌아가신지 불과 5주 만에 수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메시아로 받아들였습니다. 안식일 제사 대신에 주일 예배를 드렸습니다. 5천명이 3천 명이 그렇게 갑자기 1500여년동안 이어져 오던 전통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확실하고 큰 사건, 인생관을 바꾸어야만 하는 사건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채 20년이 되기 전에 로마의 황실에까지 복음이 들어갔겠습니까? 당대의 기준에 보기에는 어색하기 짝이 없는 부활을 믿을 수밖에 없었겠습니까? 예수님이 확실히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확신하였기 때문에 화형장의 이슬로 살아졌고, 사자굴 앞에서도, 십자가 앞에서도 담대하게 부활을 전하였습니다. 

옥스포드 대학의 역사학 교수였던 토마스 아놀드는 말하기를 "나는 여러 해 동안 과거의 역사를 연구하고, 그 사실을 조사하고, 이에 대하여 기록한 문헌과 유물을 고증하여 그 사실 여부를 조사하여 오는 중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는 표징, 곧 그리스도가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보다 더 분명하고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실을 인류사에서 나는 보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못하시는 분 계십니까?

구봉서장로님 연예인교회에 다닐 때 몇몇 기독 연예인들의 성경공부를 하였답니다. 동정녀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했다는 말씀을 들을 때 한분이 자꾸 물고 늘어졌답니다. "아니 세상에 믿을게 따로 있지! 어떻게 처녀가 아이를 가진다는 이렇게 황당한 거짓말을 마태복음 1장에 써놓고 믿으라면 어떻게 2장으로 넘어가겠느냐고" 그래서 성경공부 진도가 나가지 않았답니다. 그러자 지금은 장로님이지만 당시에는 교인이었던 구봉서 장로님께서 옆에서 가만히 앉아 있다가 하도 답답하니까 그 사람을 향하여 "야! 지 서방이 믿는다는데 왜 니가 난리야?"라고 했답니다. 

우리가 오감각을 통해 믿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오 감각을 통해 최소의 자극량을 심리학에서는 자극역(절대역) 이라고 합니다. 설탕을 물에 넣을 때 어느 정도 단맛을 느낍니다. 아무리 설탕을 집어 넣어도 똑같습니다. 이런 것을 자극정이라고 합니다. 그 이상은 아무리 높여 보아도 인간은 느끼지 못합니다. 청각은 20헤르츠에서 2만 헤르츠 주파수 법위만 듣는 것입니다(가청역). 듣지 못한다고 그 외 소리가 없습니까? 2만 헤르츠가 넘으면 초음파라고 합니다. 박쥐는 듣습니다. 시각은 380나모미터에서 780나노미터 범위의 빛만 봅니다(가시 스펙타클). 

그러면 적외선과 자외선은 없습니까? 돌고래는 자외선을 느낍니다. 어떻게 자외선 적외선이 있는 것 알고 믿습니까? 과학이 발달되다 보니 증명해 주니까 믿는 것입니다. 오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각이 있습니다. 영각이 있는 자만 영적 세계를 믿습니다. 상식적 믿음이나 과학적 믿음을 초월하여 영적으로 믿게 하는 것입니다. 30절 이하를 보십시오. 이런 믿음은 말씀과 성령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보고 듣고 믿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확실히 부활하였습니다. 죽음으로 끝이 아니라 우리도 부활합니다. 왜 이렇게 제가 강조하겠습니까? 

오늘날 교회에 다녀도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믿어도 미지근하게 믿습니다. 믿어도 막연하게 믿습니다. 이신론적으로 믿습니다. 회의론적으로 믿습니다. 그러게 믿으니까 신앙이 뜨겁지 않고 삶이 활력이 없습니다. 부활의 소망이 없으니까 이 땅이 전부인줄 알고 살아갑니다. 교회에 다녀도 가난하다고 비굴하게 살고, 장애가 있다고 불행하게 살고, 못 배웠다고 주눅 들려 살고, 힘없다고 낙심하며 삽니다. 

하버드 대학교의 유명한 법학 교수 사이몬 그린리프(Simon Greenleaf) 박사는 증거를 다루는 천재로서 하버드 대학교 법학과를 미국의 명문으로 끌어 올린 석학입니다. 그는 법원에서 사용하는 증거의 법칙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증거자료들에 적용한 결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상 어떤 사건보다 더 확실한 증거로 증명되는 사건이라는 결론을 얻었다고 하였습니다.

문학적인 천재이며 캠브리지의 중세와 르네상스 문학 교수인 'C.S 루이스'는 기독교는 틀렸다고 생각하는 분이었습니다. 자기가 기독교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기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라고 했었습니다. 그런 그가 밤마다 연구를 하다가 자기가 가장 협오했던 복음서의 역사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의 부활하심과 그 분이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엎드려 회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로슈 멕도르씨는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지금까지 사람들을 속여 오던 일 중에서 악랄하고 비도덕적이고 비양심적인 위선 중에 최대의 위선이라"고 했습니다.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이라면 인류 역사상 가장 기적적인 사건일 것이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시카고 트리뷴 지의 기자였던 리 스트로벨은 철저한 무신론자였다가 회심한 후에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후 출현에 대한 증언과 증거의 수량은 압도적으로 많다. 만약 당신이 예수님의 부활 후 출현을 목격한 증인들을 한 사람씩 법정에 세우고서 각 사람마다 15분씩 시간을 들여 반대 심문을 한다고 해보자. 쉬지 않고 종일토록 심문하면 월요일 아침에 시작해서 금요일 저녁 때까지 그들의 증언을 들어야 할 것이다. 

연이어 129시간 동안 목격자의 증언을 들은 후에도 믿지 않을 사람이 과연 있을까?” 예수님의 부활은 제자들의 증언을 통해서 볼 때 분명히 믿을 수밖에 없는 사실인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도마가 어떻게 고백합니까? 

2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다" 이 고백이 우리 성도님과 저의 거짓 없는 진실한 고백이 되시길 바랍니다.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최초의 신앙 고백을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후 그의 삶에 대하여 성경에 기록은 없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있던 날 도마는 성령 충만함을 받고 인도에 가서 인도 복음화에 헌신하다가 순교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3. 우리가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을 가지고 살면 어떤 결과가 옵니까?

도마가 부활하신 주님을 하나님이라고 신앙 고백할 때 우리 주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29절을 보십시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부활의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약속해 주시는 축복은 무엇입니까? 

(1)영생의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물고기 두 마리가 싱싱한 지렁이 한 마리를 발견했습니다. 한 물고기가 그것을 집어삼키려고 하자 다른 물고기가 타이릅니다. "저 지렁이는 낚시 바늘에 걸려 있는 거야. 저것을 잘못 삼키면 바늘에 걸려 사람들의 식탁에 오르는 신세가 되고 말아." 그러나 다른 물고기는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누가 믿어? 아무도 그것을 증명하지 못했잖아. 어디 사람들의 식탁까지 갔다 온 물고기가 있으면 증명해 봐. 네가 저 지렁이를 욕심내는 거지?" 그 물고기는 덥석 지렁이를 삼켰습니다. 그러면 다시는 바다로 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영원한 지옥불에 떨어집니다. 지렁이를 삼킨 물고기처럼 그 때 후회해도 이미 기회를 잃게 됩니다.

(2)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3)기도응답을 받습니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마21:22)”

(4)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힘이 있습니다. 병고침을 받고 능력을 행합니다. 소원을 이룹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막9:23)” 

(5)세상을 이깁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5:4)” 

(6)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7)하나님의 보호를 받습니다.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벧전1:5)”

참으로 부활의 믿음을 가진 자가 복된 자입니다. 부활의 믿음으로 영생의 복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심판에 이르지 않기 바랍니다. 기도응답을 받고, 병 고침을 받으며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힘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부활의 능력을 행하고 소원이 이루어져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길 바랍니다. 마귀의 유혹과 공격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얻고 복음으로 세상을 이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믿음을 가진 자에게 이런 행복을 주실 것을 성경은 약속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만났는데도 여전히 부활에 대하여 의심하는 신앙이 아니라 확신하는 신앙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막연한 부활 신앙이 아니라 확고한 부활신앙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냉소적이고 관념적인 부활 신앙이 아니라 경험적 부활신앙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내 안에 머무는 부활이 아니라 이 부활을 능력 있게 전하는 삶으로 변화되시길 바랍니다. (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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