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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세 가지 당부 (사 52:7-8, 막 1: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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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세 가지 당부 (사 52:7-8, 막 1:14-15)
 

본문은 마가가 기록한 마가복음서 입니다. 마가는 사도가 아닌 평신도 출신으로 타 복음서와 그 내용이 약간 형식이 다릅니다. 마가는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첫 장에서 예수님의 복음 전파하라는 말씀으로 시작해서 복음을 전파하라는 예수님의 마지막 당부의 말로 복음서를 끝마치는 예수님의 모습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마가는 예수님의 최대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대별하면 3가지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영혼구원

하나는 영혼구원입니다. 본문 첫머리 1절을 보면 예수님은 “때가 찾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로 시작합니다. 또 마가복음 1장38절을 보면 “가자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전도하기 위하여 세상에 왔노라”고 강조하십니다. 마태복음 9장13절에서는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제일의 관심사는 영혼구원임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선택하신 후 가장 먼저 전도법부터 가르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가르치시고 치유하시는 시범을 보여주시고 가르치신 후에는 둘씩 짝을 지워 능력을 부여하신 후에 내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영혼구원임을 강조하시는 부분들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많은 활동을 하십니다. 특히 가르치고 고치셨는데 이것은 모두 영혼 구원을 목적으로 하신 것입니다. 병자들을 고치면서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강조하십니다. 때로 기적도 수반합니다. 

모두 죄 사함과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영혼 구원의 문제는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예수를 알고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지구상에는 아직도 예수를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죽어가는 사람들 중에 예수를 모른 채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서 구원과 멸망의 문제를 생각하면 이 구원받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가를 알게 됩니다. 

병원 중환자실에 자주 갈 기회가 있습니다. 가서 보면 모두 시간을 다투는 위급한 환자들이 누워 있습니다. 그냥 놔두면 사망할 분들입니다. 중환자실에서 지금 내 가족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때 가족들이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마지막 회복을 기원하여야 하겠지만 구원의 확신을 줘서 보내는 일은 더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 그 시간에 환자의 정신이나 영혼은 희미해지고 몽롱할 것입니다. 그때 사탄은 별 방법을 다해서 방해할 것이 분명합니다. 

평생 신앙 속에서 살아갔던 분이라면 차분하게 기도 속에서 종말을 맞이하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입니다. 가족들은 마지막 신앙을 점검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마지막 순간이 참 중요한 순간입니다. 불분명한 신앙으로 그 순간을 맞이하는 분이라면 더욱 점검을 시켜 주어야 할 일입니다. 전혀 신앙이 없는 분이라면 그 순간 결신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린 강도가 마지막 시간에 예수께 구원을 부탁합니다.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 그때 예수님은 “네가 오늘 나와 함께 천국에 가리라”고 응답해 주십니다. 얼마나 소중한 순간입니까. 그 시간 그 자리는 구원받기 어려운 시간이고 어려운 자리입니다. 그동안 엉망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마지막 시간에 구원해 달라고 하소연합니다. 그 자리는 구원이 불가능한 자리입니다. 구원받기에 너무 늦은 시간입니다. 

예수님도 지금 그 강도에게 관심가질 여유가 없는 시간입니다. 그런데도 그 순간 예수님은 강도가 입을 열어 나를 기억해 달라고 할 때 그 요청을 기꺼이 용납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구원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런 사람이 가장 얄미운 사람입니다. 평생 실컷 놀다가 마지막 죽음 직전에 구원받고 천국에 갔으니 얼마나 얄미운 사람입니까. 영혼 구원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나 관심 없는 사람은 아무 의미 없는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영혼 구원이 중요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 순간이 얼마나 중요한 순간입니까. 하나님의 제일가는 관심사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미국의 필립 부룩스 목사가 임종시간을 맞이하였습니다. 누구도 만나주지 않고 면회를 사절하였습니다. 그때 법률가 잉거솔씨가 찾아와 면회를 허락하였습니다. 잉거솔씨가 “만나주셔서 감사합니다”하고 감사를 표시하였습니다. 그때 부룩스 목사가 그의 손을 꼭 잡고 조용히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여보게 잉거솔씨, 다른 사람들은 다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 같아 특별히 만나지 않았네, 그런데 당신은 아무래도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 같지 않아서 이렇게 면회를 허용했네.” 아주 의미 있는 대화입니다. 

부룩스 목사님은 임종이 가까워 오는 그 시간에도 한사람의 영혼구원에 관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고재봉이라는 1961년에 일어난 끔찍한 살인 사건의 주인공이 있습니다. 군대에서 상관의 잘못으로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원한을 품고 증오심을 불태웠습니다. 출소 후 상관 집으로 도끼들 들고 가서 부인 노모 아이들까지 무차별 살해하였습니다. 상관은 이미 이사를 갔고 다른 사람이 살고 있는 것도 모르고 말입니다. 그래서 군법회의에서 사형언도를 받았습니다. 사형이 집행될 때까지 안국선목사라는 분이 전도를 했으나 받지 않았습니다. 

끈질기게 성경을 넣어주며 전도한 결과 나 같은 사람도 구원받을 수 있느냐면서 결심하게 됩니다. 사형이 집행되던 날 그는 이렇게 마지막 말을 남깁니다. “우리 동네에도 교회가 있었습니다, 군대에도 교회가 있었습니다. 이 세상 처처에 교회가 있습니다. 그런데 누구하나 나에게 예수 믿으라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분노로 온 몸이 타 들어가고 있을 때 누구 하나가 나에게 복음을 전해주었더라면 나는 이렇게 살지 않았을 것입니다.” 줄 수 있을 때 주어야 효과가 있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고 명령이행입니다. 하나님의 제일의 관심사는 영혼구원입니다. 

성령 충만

하나님이 주신 대표적인 선물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를 보내신 일이고 성경을 주신 일이고 부활을 주신 일이고 성령을 보내 주신 일입니다. 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셨는가 하면 전도 목적 때문입니다. 성령이 오심으로 사람들이 변화 받고 예수를 영접하고 구원받았습니다. 그렇게 구원받은 사람들이 모인 그 모임을 교회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지상 교회는 성령강림 후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성령을 주신 이유는 전도를 위해서 입니다. 전도는 맨 정신으로 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성령받기 전에는 전도를 하지 못하였습니다. 성령 받기 전에는 사람들이 두려워하였고 미래가 불투명해서 불안 해 하였습니다. 그러던 제자들이 다락방에서 성령 받고 난 후에 달라졌습니다. 두려움이 사라졌고 입이 열렸고 문을 열고 나가 전하였습니다. 죽음 두려워하지 않았고 마침내 모두 순교를 하였습니다. 모두 성령의 힘 때문입니다. 신앙의 삶은 성령이 함께 하시는 생활입니다. 성령이 내게 동기를 부여하고 힘을 주시고 열정을 주시며 은사를 주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성령을 보내신 이유는 전도 때문입니다. 

어느 전도자가 매일같이 간증하고 설교하고 집회를 인도하며 세미나를 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지치지 않고 전도를 하였습니다. 어떤 분이 어떻게 그렇게 지치지 않고 일하느냐고 물을 때 대답하기를 “주님이 바로 내 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내 영혼과 내 정신과 내 육체에 에너지를 불어 넣어 주셔서 일하고 있습니다. 당신도 그 안에 들어가시면 그런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전도는 누가하는가 하면 성령 충만한 자가 할 수 있습니다. 전도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나를 활용하셔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교회는 장점이 많은 교회입니다. 지성적이고 조용하고 정적이며 지극히 합리적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그런 믿음에는 영적 파워가 없습니다. 모험도 눈물도 행동도 적습니다. 그러니까 전도주일에 전도하자 해도 다른 주일보다 더 안 나옵니다. 참 이상한 교회입니다. 이상한 사례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 시간에 그러면 전도주일 하지 않으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전도주일을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들 중에 몇 명이라도 전도하라는 당부에 순종을 해서 몇 명이라도 새 영혼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소중한 결과입니까. 사람들이 새 생명을 잉태하고 있다가 그들을 하나님께로 이끌고 나온다는 그 일이 하나님 편에서 보면 얼마나 소중하고 얼마나 큰일입니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언제나 무슨 일이든 하나님 편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떤 결과가 주어질까를 먼저 생각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순서입니다. 그래야 나의 삶에 순종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것이 신앙인의 거룩한 삶입니다. 

전도는 성령의 힘에 의해 하는 일입니다. 한국교회가 부흥하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힘과 역사 때문입니다. 한국 상황은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올 때부터 평탄치 못했었습니다. 1885년 기독교가 공식적으로 이 땅에 들어온 그 당시 우리나라는 몹시 가난하였고 무지하였고 청나라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 이후에는 일본의 압제를 받게 됩니다. 이제는 해방되었는가 싶었는데 우리나라는 또 다시 6·25전쟁에 휘말렸습니다. 그리고 전쟁직후부터 지금까지 남북이 서로 대치하고 있습니다. 지난 130년 동안 우리나라는 한시도 마음 놓고 살지를 못했습니다. 

이 같은 상황은 역으로 생각하면 기도하기 참 좋은 풍토가 되었고 기도할 수밖에 없는 여건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국민이 열심히 기도하였고 기도하니까 성령이 임하셨고 회심의 역사가 일어났고 그 결과 오늘 전도의 열매가 맺혀 오늘 한국은 기독교 강국이 되게 된 것입니다. 세계에서 이런 민족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어도 한국인은 조용히 이론적으로 믿지 않습니다. 전도를 해도 약간 사회에 물의를 일으킬지라도 열심히 전도를 합니다. 

그런데 일본은 우리와 정반대입니다. 일본 기독교에 지대한 영향 미친 사람이 내촌감삼입니다. 그는 지성신앙과 이론신앙과 정적인 신앙과 고요를 강조하였습니다. 그런 신앙은 마침내 무교회주의로 나아갔습니다. 교회를 부정하고 개인의 지성신앙을 강조하고 지나친 내핍적인 성결신앙을 강조하였습니다. 그 결과 남에게 실례행위나 부담을 주지 말라고 강조하였습니다. 그것이 기독교만 아니고 일반 사회에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래서 오늘 일본인은 이웃에게 부담을 주는 것을 가장 꺼리게 되었고 신앙도 너무 조용하고 소극적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 결과가 오늘 일본 기독교가 이렇게 약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나가 전도하고 강권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약간의 실례는 있지만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전도하고 전파하고 봉사하고 간증하고 새벽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발걸음에는 반드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전도는 조용히 조심조심하며 소극적으로 할 수 없습니다. 제자들이 다락방에서 조용히 지내던 어느 날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성령이 그들을 가만히 놔두지 않고 밖으로 내몰았습니다. 입을 열고 전하게 하였고 성령의 역사가 수반되어 그곳에 기적이 일어났고 병 고침과 회심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 결과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가 전도된 것입니다. 

때를 아는 삶

본문은 때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때가 찾고”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때”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크로노스(klonos)입니다. 현재에서 미래로 흐르는 자연스러운 시간관입니다. 또 하나는 카이로스(kailos)인데 이 의미는 호기(好期 opportunity) 적기라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의 경륜에 따른 구속사의 결정적인 시점이란 뜻입니다. 그때가 언제냐 하면 바로 지금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세상에 살면서 때를 알고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사람은 때를 알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시간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시간 속에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시간 속에서 뜻을 이루십니다. 오늘 우리는 몇 가지 감사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는 “오늘 이 시간 내가 있음”에 감사할 일입니다. 어제도 중요합니다. 어제의 부귀영화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더 중요합니다. 고로 할 일이 있으면 지금 해야 합니다. 지금 더 사랑하고 지금 더 감사하고 지금 더 베풀어야 합니다. 아니면 지금 이 시간이 지나면 후회하게 됩니다. 물질을 다 잃게 되면 후회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할 일은 선을 행하고 전도를 하고 봉사를 해야 합니다. 또 인간은 유한한 존재임을 아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늘 깨닫고 겸손해야 합니다. 인간은 때로 대단해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풀과 같이 마르는 인생이라고 말씀합니다. 인간은 시간에 관한한 나무보다 못하고 거북이만도 못하고 바위 앞에서 초라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겨우 80에서 90을 살면 장수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5장16절에서는 세월을 아끼라고 했습니다. 시간 사용의 필요성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세월을 아끼라는 말은 일의 우선순위를 정하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적절하게 재배치하라, 효율성을 높이라는 뜻입니다. 시간의 재배치로 효율성을 높이는 것은 준 창조행위와 같은 일입니다. 예를 들어 무질서를 잘 질서화 시키면 준 창조성을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능한 자들을 모아 공부시켜 능력자를 만들면 재창조하는 것이 됩니다. 

자투리 시간들을 모아 효율화 시키는 것도 재창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명에 충실해야 합니다. 또 영원을 사모하게 된 것도 감사할 일입니다. 전도서 3장11절을 보면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인간은 타 피조물 특히 짐승들이 알지 못하는 한 가지 고통이 있습니다. 그것이 유한하면서도 영원을 알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영원을 모르면 속이 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원을 알게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이 영원의 세계에 들어가게 하시기 위해입니다. 

시간은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과거입니다. 과거시간은 누구도 손댈 수 없는 시간입니다. 변경도 지워지지도 않고 실패도 그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둘째는 현재입니다. 이 현재가 중요합니다. 오늘 현재의 삶에 따라 또 과거가 만들어집니다. 또 하나는 미래입니다. 미래의 시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영생의 세계입니다. 미래는 기대가 있고 비전이 있습니다. 비전 중에서 최대의 비전은 천국이고 영생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영생을 주시고 천국을 주시고 비전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그러면 그 비전과 천국과 영생을 우리만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은 세상에 이 이치를 알리고자 하십니다. 그 알림이 전도입니다. 마가복음은 첫머리에서 주님은 복음을 전파하라고 강조하시고 끝머리에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강조하십니다. 이사야 52장 말씀에서도 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발이 가장 아름답다고 하였습니다. 다음주일에 우리는 전도주일로 설정하였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뜻에 순종하십시다. 그리고 이 세상에 이 하나님의 비전을 알리십시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몫을 이루는 삶입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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