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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라 (행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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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라 (행 1:1-11)


부활하신 예수님은 40일 동안 세상에 더 계시면서 제자훈련 사역을 하시다가 오늘 성경말씀에 하나님께로 승천하셨습니다.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은 모두 유대인들인데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한 사람들은 비유대인 기록입니다. 의사 직업을 가진 누가가 기록했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에 사도행전을 기록한 목적을 1절에 밝히고 있습니다. 데오빌로에게 보내려고 기록한 것입니다. 당시 데오빌로는 통치자로서 절대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었는데 누가 선교의 특징은 힘 있고 영향력 있는 사람을 먼저 전도하게 되면 그 파급 효과가 크다는 계산을 했습니다. 

누가 선교의 특징을 그대로 행한 선교사들이 세상에 아주 많습니다. 아프리카에 가서 추장을 선교하고 나면 자연히 한 마을 전체가 예수 믿게 되는 경우가 많았고, 후진국에서는 대통령이 예수 믿게 되면 국민 전도가 실제로 잘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고종황제와 이승만 대통령 때문에 전도가 잘된 역사를 분명히 가지고 있습니다. 미국도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 신앙은 예화 거리입니다. 그래서 도움이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예수님의 마지막 관심이 잘 조명되어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사역 초점은 이것을 위해서 하신 것입니다. 열두 제자를 선택하신 것이나 70인 제자를 훈련하신 것 모두 다 똑같은 맥락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그 목표란 “너희는 성령을 받아 땅 끝까지 복음의 증인이 되라.” 이것 때문에 사역을 하신 것입니다. 전도를 해서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는 사역을 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때 우리는 무엇인가는 열심히 했는데 주님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헛된 에너지를 소비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영적 지혜라는 것이 있는데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주님의 사역에 도움인가 아닌가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지금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대면하면서 몇 가지 마음 방향의 정리가 필요한 단계가 되었습니다. 제일 먼저 인류 역사의 초유 사건인 죽었던 자의 부활이라는 자기들 앞에 닥친 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도마는 그 현실성을 합리성 있게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과학적 사실 근거를 감각적으로나 시각적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믿지 못하겠다는 말을 했습니다. 합리주의 사고에 속하는 것이며 지성인의 당연한 생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지금 자기들 눈앞에 나타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영적인 환각 상태일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누가복음 24장 39절에 보면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본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렇게 확인시켜 주시지 않습니까? 기독교 2천년 역사에는 수없이 많은 사건들이 지나갔습니다. 우리 신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영지주의라는 말을 기억합니다. 헬라 철학의 한 분파인데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철학적으로 이해하려고 해서 영향력을 많이 끼쳤습니다. 종교가 철학화되면 합리적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을 배재합니다. 오병이어 사건이라든가 죽은 자의 부활 같은 것은 안 믿게 됩니다. 

그런 일들은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어떻게 말할지 모르지만 전해지는 말씀을 듣고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성경에 나타난 초이성적 사건을 부인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인간은 이성적 존재입니다. 이성적 존재이기 때문에 이성을 초월하는 초이성적 사건은 받아들일 수 있는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철학이 종교화되면 영생의 문제도 철학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은 다 선하고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것은 다 악하다는 이원론 사상을 헬라철학에서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어떻게 볼 것인가? 헬라 철학의 영지주의파에서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때 우리 눈에 보이는 그 예수님의 몸은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 생각에 아플 것이라든가 육신에 고통이 있다든가 이런 것은 없다고 설명하는 학파입니다. “예수님의 실제적 몸은 우리와 같은 육체적 기능의 몸이 아니고 몸처럼 보이는 영적 현상이었다.” 그래서 예수의 인성 부분을 부인해서 이것이 교회 안에 파급되어서 혼란을 가져온 역사가 있습니다. 지금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렇게 보는 시각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감각으로 확인하라고 나를 만져보라고 예수님이 확인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내 육체가 영적인 존재만 있다면 이 손바닥에 나있는 상처는 왜 여기 있는 것이며 내 옆구리의 이 커다란 창으로 찔린 이 흔적은 왜 여기 붙어있는 것이냐?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나는 있느니라.” 이렇게 제자들에게 설명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지금 제자들의 갈등 부분을 보면 두 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는 예수의 신성 부분을 믿기가 어려웠습니다. 

사실 이 부분은 제자들만이 아니고 유대민족 전체가 믿기 어려웠습니다. 예수님의 가족들도 믿지 않았습니다. “너는 나사렛 빈민촌의 목수 노동자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어찌 너 같은 노동자가 감히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라고 말하느냐?” 그 동네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아니, 저 사람의 아버지 요셉은 조상 적부터 우리 동네 사람이고 예수의 형제들은 모두 우리 이웃 친구들이 아니냐? 아니, 우리 옆집 요셉의 아들이 무슨 하나님의 아들이냐?” 

여러분!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게 되신 마지막 이유가 성경에 나옵니다. 대제사장이 물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냐?” “내가 그로라.” 그랬을 때 대제사장이 그 말이 하도 가소로워서 자기 옷을 찢었다고 했습니다. “더 이상 물을 필요가 없다. 이는 신성 모독죄이다. 이런 죄는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질문하셨던 것입니다. 모두가 예수의 신성 부분을 의심하였기 때문에 “어떤 이는 엘리야라고 합니다. 

어떤 이는 예레미야라고 합니다. 어떤 이는 세례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는 반대로 예수님의 신성을 믿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이 예수가 과연 그 예수인가? 그때 있었던 그 예수의 몸인가?” 이게 또 의심이 되는 겁니다. 이 문제가 제자들에게 큰 문제였기 때문에 예수님은 확인 작업을 성실하게 지켜주고 계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만 확실해지면 예수님의 목적은 이루어지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 후에 40일 사역의 특징이 성경에 나옵니다. 평소 사역의 정반대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3년 동안의 사역은 어떤 사역이었습니까? 공개적입니다. 대중적 성격을 가졌습니다. 한번 설교하실 때 남자만 5천 명씩 모였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땐 예루살렘 시민이 다 나와서 “호산나!” 외쳤습니다. 예수님이 길을 가실 때 하도 사람이 몰려와서 통행이 어려웠습니다. 밀려드는 군중의 요청이 하도 많아서 식사할 시간도 없었다고 성경에 나왔습니다. 

어느 집에 들어가서 환자 고쳐주는 사역을 하니까 예수님을 만날 수가 없으니까 사람들이 중풍 병자를 데리고 지붕으로 올라가서 지붕을 벌리고 예수님을 그 앞에 달아 내렸다고 했습니다. 아주 대중적이고 공개적이었습니다. 일종의 영적 영웅적 문화를 창조하는 사역을 예수님이 계속하셨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후에는 정반대입니다. 마치 사람들이 볼까봐 숨어 다니고 계시는 인상을 강하게 줍니다. 우리 보통 사람들이 생각할 때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일종의 보복성 사역을 하셨으면 어떠했을까?’ 이렇게 생각이 되지 않습니까? 빌라도 앞에 가서 “빌라도! 너 당장 총독의 자리에서 내려 와! 너 같은 통치자 때문에 세상은 악이 생기는 거야. 너 같은 사람이 사회정의를 올바르게 세우고 불의와 싸우고 인간답게 싸우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해야 되는데 그 자리에 앉아서 그렇게 불의한 일을 해? 

너는 절대 직무 유기야. 내려 와! 너 같은 놈을 없애는 것이 세상을 구원하는 거야!”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속이 시원했을 것입니다. 대제사장, 서기관들에게 가서 “너희들은 예언서를 믿으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죽였어! 당장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돼.” 이렇게 한다든지, 죽이라고 소리치던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대중 전도 집회를 열어서 부활하신 몸을 보여주면서 “여러분이 나를 죽이라고 했지? 살아났느니라. 산다고 말했지? 예루살렘을 망치고 있는 이 마귀집단 이제 소멸될 것이다.” 위엄 있는 설교를 하시고 모두 심판해버리셨다면 어떠셨을까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영적 영웅적인 사역을 왜 안하시고 숨어 다니시는가? 막달라 마리아, 열한제자,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고기잡이 하는 베드로, 꼭 만날 사람만 몰래몰래 골라서 만나고 계십니다. 거기에 대한 해답은 무엇입니까? 이미 예수님은 영웅 문화적인 사역을 3년 동안 끊임없이 하셨습니다.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열두 제자마저도 소용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정말 내가 주는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는데 필요한 일꾼들만 만나고 계신 것입니다. 5천명 떡 나눠주고 죽으면서 복음을 전했는데 그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니 이제 그런 사역은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우리들은 지금 이러한 예수님의 마지막 관심사를 잘 기억해야 신자가 되고 훌륭한 교회가 됩니다. 우리 자신도, 교회도 초점을 잃으면 엉뚱한 일만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사역이 무엇인가에 대한 방향 설정이 잘못되면 공연히 에너지를 가지고 싸움만 합니다. 이제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의 재교육을 통해서 자신들의 존재 의미를 비로소 파악하게 됩니다. 우선, 이때 예수님의 말씀을 마지막으로 들은 열한제자의 그 후 사역지를 살펴보면 그것이 확실하게 증거가 됩니다. 

그렇게 의심이 많던 도마는 어디로 갔습니까? 땅 끝까지 가라고 하니까 인도로 갔습니다. 여러분! 지금 인도에서는 기독교를 도마교라고 합니다. 도마가 와서 전도했기 때문입니다. 도마 기념교회가 인도에 많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인도까지 가는 거리를 생각해 보십시오. 교통수단이 없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갔습니다. 마가는 우크라이나로 갔습니다. 

안드레는 그리스와 아가야를 찾아가서 선교하다 순교당했고, 빌립은 히에라볼리에 가서 마지막을 보냈고, 바돌로매는 아르메니아, 부르기아, 루가오니아, 메소포타미아를 거쳐서 페르시아까지 바돌로매가 책임을 졌고, 베드로는 로마를 선택했습니다. 마침내 로마 복판에 베드로 성당을 만들어내는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습니까? 주님의 마지막 관심이 “나는 이것을 위해서 너희를 선택한거야.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 이 선교의 사명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 방향을 노력할 때 교회는 교회의 존재 가치를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는 충실한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2주 전에 멕시코 치아파스 안수학 선교사님이 현지 신학교 교장과 함께 오셔서 수요 예배 때 선교 보고를 하셨습니다. 수요 예배는 95퍼센트가 여신도이십니다. 그날 선교 보고를 듣고 감동해서 집에 가서 남편들에게 이야기를 많이 하신 거 같습니다. 저한테 전화가 얼마나 많이 왔는지 모릅니다. “목사님! 그런 선교 보고를 주일 낮 시간에 해야 우리 남성 신도들도 선교 헌금했는데 우리도 궁금한데 여자들만 나오는 수요일에 하셨습니까? 다시 한 번 할 수 없습니까?” 그래서 제가 어제 선교사님 만나서 멕시코로 돌아가는 일정을 조정하고 있습니다. “두 주간 연기하시면 안 됩니까? 우리 성도님들이 원하십니다.” 그래서 조정하고 있습니다.

 제가 갈보리교회에 부임해서 10년 동안 선교와 교육에 중점을 두었는데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한번 읽어보십시오. 두 가지입니다. “너희는 이 복음을 전하라.” 이게 선교입니다. 그 다음에 뭐라고 하십니까? “가르치라.” 이게 교육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주님의 관심사가 어디 있는지 정확하게 보고 그 분야에 노력하면 틀림없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할 때 선교라는 것이 열매가 무엇이냐? 우리 한국 사람들은 성격이 급해서 오늘 선교비 내고 다음 주에 뭐가 오는지 아는데 그러면 안 됩니다. 선교는 지금 우리가 씨를 뿌리고 100년 후에 거두는 거라 생각하고 해야 합니다. 여러분!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다. 우리 대한민국 개신교의 확실한 간판은 장로교가 제일 많습니다. 

1885년 4월 5일 제물포항에 언더우드라는 청년 한명이 내림으로 이루어진 수확입니다. 그 사람 하나 때문에 대한민국에 장로교가 생긴 것입니다. 120년 만입니다. 감리교 간판 얼마나 많습니까? 아펜젤러라고 하는 사람이 우리 대한민국 조선 땅에 발을 디딤으로 120년 만에 대한민국 감리교 간판이 그 사람 때문에 다 생긴 것입니다. 세계에서 제일 큰 감리교의 1, 2, 3번이 대한민국에 다 있습니다. 이렇게 씨를 뿌리고 물을 주면 자라서 언젠가는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 이 선교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9절에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때를 기다리며 할아버지는 씨를 뿌렸고 아들은 물을 주었고 손자가 열매를 보는 이것이 선교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절대 헛수고가 없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 선교를 위해서 열정을 가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에티오피아는 예수님 시대에 벌써 기독교 복음이 들어갔습니다. 기독교 국가가 되었습니다. 누가 선교했습니까? 간다게 여왕의 국고를 맡은 내시가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빌립 설교를 듣고 길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간 것이 에티오피아가 기독교 국가가 되는 기초였습니다. 이매 지하철역에서 우리 교인들이 항상 전도합니다. 행사도 많이 하고 어떤 때는 선물도 주고 추운 겨울날 차도 따뜻하게 끓여서 대접하고 음악도 들려주고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전도합니다. 

그렇게 10여 년 동안 열심히 전도했는데 그 지나가는 그 수없이 많은 사람 가운데 단 한 사람도 전도지를 받아들고 “수고하십니다. 다음주일부터 정말 교회 나가고 예수 믿겠나이다.” 있습니까?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면 헛수고입니까? 아닙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너는 힘만 쓰라. 씨만 뿌리라.” 거두는 것은 주님께서 거두십니다. 그게 선교입니다. 우리 갈보리교회가 10년 동안에 선교비 그렇게 많이 썼는데 열매를 보여 달라고 하면 나는 할 말이 없습니다. 100년 후에 보십시오. 또, 선교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따라옵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아주 신기한 통계가 하나 있습니다. 외국에 파송한 선교사 숫자와 GNP 숫자가 언제나 같이 갑니다. 외국 선교사 통계가 1만 명일 때 대한민국의 GNP 1만 달러였습니다. 지금 2만4천명 파송했더니 GNP가 2만4천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똑같이 가게 해주셨습니다. 인류 역사에 어떤 나라들이 부강한 역사를 가졌느냐? 선교 많이 한 국가들입니다. 영국, 미국, 프랑스 모두 똑같은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10년 동안 선교비 그렇게 많이 썼는데 본 교회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교회 부흥 많이 되었지 않습니까? 시설도 많이 좋아졌습니다. 

오늘도 교육관 준공예배를 드리지 않습니까? 주님은 하나님의 역사에 노력하는 자를 강건하게 붙드십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선교 많이 하는 교회를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선교 많이 하는 나라를 하나님이 힘 있게 하십니다. 역사가 그런 것을 어떡합니까? 복음서에 주님의 설교는 두 가지를 늘 강조했습니다. “전하라. 가르치라.” 이게 선교와 교육입니다. 그래서 저는 10년 전에 갈보리교회 올 때 목회 철학을 이야기하라고 해서 “선교와 교육에 중점을 두겠습니다.” 그래서 교육관을 많이 지었고 주일학교가 부흥되었고 세계 선교를 잘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이면서도 유대교 사상에 깊이 빠져있습니다. 그 사상이 뭐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이란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인 유대인에게만 필요한 것이다.” 이방 사람에게는 안전합니다. 그 생각은 예수 그리스도의 땅 끝까지 가라는 오늘 말씀과 정 반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인류 구원 역사는 강원도만한 이 유대 지역에만 국한한 유대 백성만 구원 받느냐?” 베드로는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베드로마저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무슨 세계 선교가 이루어지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사도행전 10장에 로마 사람 고넬료를 만나게 하시지 않습니까? “너 그 집에 심방 가라.” 기도하는 중에 환상을 보여주시고 영적인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로마 사람인 고넬료의 집에 심방 가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들어갔더니 그 집 식구들이 베드로를 하나님과 같이 봅니다. 거기 성경 10장 26절에 나와 있습니다. 너무 발밑에 엎드려서 쩔쩔 매니까 베드로가 일으켜 이르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거기에서 설교를 하고 베드로가 한 말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 너희도 알거니와”라고 합니다. “이게 법을 어기는 것이다. 율법에 어긋난다. 

그런데 하나님이 너희 집에 보내셨다. 이게 무슨 일이냐?” 그래서 그날 거기서 베드로가 설교를 하고 뭐라고 합니까?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고” 외모가 유대인입니다.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을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비로소 세계 선교의 문이 열리는 사도행전 10장을 보게 됩니다. 결국 고넬료라고 하는 군인 장교 한 사람 때문에 로마 전도가 문이 열리고 선교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육체 부활의 사건이라는 초이성적 상황을 맞이한 제자들의 갈등은 이제 점차 현실로 인식이 되어졌습니다. 그랬을 때 이제 마지막 남은 작업이 뭐냐? 제자들의 사명에 대한 결단인데 오늘 예수님이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선교하던 시대는 끝났다. 나는 오늘 아버지께로 간다. 너희가 맡아야 된다.” 그것입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이제 상황이 매우 더 어려워집니다. “예수님이 우리들과 같이 계셨을 때 그렇게 어려움이 많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는데 온통 예수님 반대자들만 세상에 우글우글한데 우리만 두고 가시면 우리가 이 일을 어떻게 하겠나이까?” 이런 걱정이 오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오늘 조건 하나를 그들에게 제시했습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을 것이다. 그 권능의 힘으로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가게 될 것이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 성령의 임재가 나타날 것이다.” 이렇게 조건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성령을 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이미 제자들은 성령을 받은 사람들인데 무슨 또 다른 성령의 은혜가 필요합니까? 이것은 은사적 개념의 성령 충만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미 성령을 받아서 하나님을 잘 믿고 은혜 생활을 하고 있는데 그 사람들 가운데 특별히 선택해서 어떤 목적에 쓰시고자 할 때는 그 목적에 맞는 은사적 개념의 성령의 역사를 따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신학의 기초로 해석하면 주님이 어떤 사명을 주실 때는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힘까지 함께 주신다는 것입니다. 

겁부터 내는 사람은 아무 것도 못합니다. 일하는 사람은 항상 성경에 똑같습니다. 고난당해야 합니다. 위험을 무릅써야 하고 오해와 공격적 어려움을 당해야 되고 끝없는 모함과 불이익을 만나고…. 그것을 겪기 싫으니까 안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이 시각까지 우리는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모욕을 당하고 만물의 찌꺼기같이 되었노라.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했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했고 매도 수없이 맞았으며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게 땅 끝까지 가는 사람들의 수고입니다. 이런 모함이, 이런 어려움이 항상 있어서 자기는 항상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 지금까지 왔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선교는 선교사만 하는가? 절대 진리가 있습니다. 선교는 절대 혼자 못합니다. 바울 사도의 글에는 사람 이름이 많이 나타나는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왜 사람 이름을 그렇게 많이 썼습니까? 모두가 바울의 선교 동역자들입니다. 예수님도 혼자 할 수가 없어서 열두 제자와 많은 여인들의 협조를 얻었습니다. 넓은 의미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다 선교사들입니다. 모두 힘을 합하여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이 선교 사명을 협력하는 사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 위하여 내 삶을 바치는 삶의 철학이 뭐냐? 크리스천이란 말입니다. 

어떤 선교사가 선교지에 가서 많은 일을 했다는 것은 그 선교사 뒤에 후원자들이 많았다는 증거가 됩니다.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부활해서 나타나신 예수님의 사역의 모습을 보면 우리가 알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삼일 동안에 벌어진 일을 보면 예수님의 측근들은 다 예수님을 버린 상태로 돌아갔습니다. 다시 안볼 것 같은 태도가 분명해졌습니다. ‘아! 예수를 만나서 내 인생은 망쳤다. 이게 뭐냐?’ 이런 사람들뿐입니다. 그러한 제자들을 예수님이 지금 하나씩 하나씩 다시 찾아나서는 작업을 하시는데 예수님도 자존심이 있으십니다. 

이때 예수님의 태도는 땅에 떨어진 패잔병 같은 모습으로 조명되어 있습니다. 도마가 뭐라고 합니까? “나는 못 믿겠소. 예수의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 자국을 만져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노라.”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셔야 합니까? 그 모욕감 때문에 “그만 둬라. 너 같은 사람은 내가 필요 없다.” 그러셔야 되는데 도마 때문에 다시 한 번 나타나셔서 그 건방진 도마의 소리를 무시하고 손을 내밀어 “내 손을 만져보고 내 옆구리에 네 손을 넣어서 이 창 자국을 만져보라. 네 소원대로 되었니? 그리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어라.” 왜 그렇게 자존심을 버리고 사역하셨습니까? 도마를 쓰시기 위해서입니다. 더 슬픈 일이 있습니다. 

갈릴리 해변으로 가셔서 이른 아침에 예수님이 손수 조반을 마련해 놓으시고 고기 잡는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 조반을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이나 똑같은 질문을 애처롭게 하시는 아주 불쌍해 보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가 상상할 수 있습니다. 실패했다고 낙심하면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길을 가며 긴 설교를 하셨다고 했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는가? 그래도 복음을 위해서 몸을 바칠 사람들이 그들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 감리교 신자였던 교우님들은 아펜젤러에 대해서 많은 설교를 들으셨을 것입니다. 이 땅에 복음과 교육을 심어준 선교사였죠? 1886년 정동에 집 한 채 사서 벽을 헐어 교실을 만들고 학생 네 명을 모집해서 신문화 교육을 이 땅에 심어준 사람, 이 땅에 최초의 학교, 교육기관을 세운 사람이 아펜젤러입니다. 그가 최초로 세운 감리교회가 정동교회입니다. YMCA 창립의 공헌자이며 그 위험을 무릅쓰고 그때 이 나라의 지도자들이 다 감옥에 들어가 있을 때 감옥을 심방한 사람입니다. ‘이 지도자들을 기독교 복음으로 살려내야 이 나라가 산다.’ 그래서 그 위험을 무릅쓰고 감옥을 찾아가서 감옥에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 믿는 지도자가 되라고 열정의 선교 사역을 했는데 그 중에 이승만이 있었습니다. 

그의 전도로 예수 믿고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가 목회해서 한국 여학생 두 명과 함께 배를 타고 선교 여행을 가다가 그 배가 다른 배와 충돌하는 바람에 두 여학생을 구조하기 위해서 마지막 순간까지 힘을 쓰다가 대한민국 땅에서 44세에 물에 빠져서 돌아가셨습니다. 그의 아들 헨리 다지 씨는 아버지 대를 이어서 배재학교 교장으로, 딸 엘리스는 이화 전문학교 교장으로 한국 교육선교에 몸을 바치고 한국 땅에 묻혔습니다. 우리는 빚진 자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40일 사역을 우리가 조명하면서 지금 우리들은 ‘내가 왜 이 땅에 살고 있는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데 협력자가 되기 위한 것입니다. 

갈보리교회가 왜 이렇게 서있는가? 땅 끝까지 복음을 구체적으로 전하라고 그런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 교회가, 너희가 또 성령을 받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그것이 이 지상에 남기신 주님의 마지막 공기를 진동시키는 언어였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한다면 ‘아!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될까?’ 그 사명의 빛이 보이지요? 계속해서 우리 갈보리교회는 주님께 그렇게 쓰임받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위해서 우리가 몸과 마음을 바치고 살아가는데 주님이 말씀하신 가장 큰 관심사는 무엇인가를 기억하면서 그 방향을 따라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역을 힘쓸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수없이 많은 선교사들이 이 땅을 찾아와 선교해 주었기 때문에 이 나라가 이렇게 기독교 국가가 되었나이다. 이제는 우리가 갚을 때가 되었으니 이 사역의 초점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마지막 관심사의 사역을 감당하는 우리 갈보리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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