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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세상을 사랑치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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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강) 요한일서 2:15-17 세상을 사랑치 말라

 

<본문>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한일서 2:15-17)

<설교>

15절에 보면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는 말을 합니다. 이 말씀에 대해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세상이라는 단어에 대한 정확한 이해입니다. 아마 여러분은 세상이라는 단어에 대해 여러분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지칭하는 것으로 여길 것입니다. 그렇다면 직장도 세상이고, 가정도 세상이고, 학교도 세상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요한이 직장을 사랑하지 말고 학교를 사랑하지 말라는 의미로 세상을 사랑치 말라고 말했을까요? 물론 직장이든 학교든 그것들이 사랑의 대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그러한 것으로만 이해를 하게 되면 신앙에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세상이라고 했을 때, 그렇다면 눈에 보이는 교회는 무엇입니까? 누구든 교회를 가리켜서 세상이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결국 교회는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것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자연히 교회에서 하는 일은 세상 일이 아니고 교회 밖에서 하는 모든 일은 세상 일로 구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어떤 잘못됨이 발생합니까? 교회 밖의 일보다는 교회 일을 더 우선으로 하는 것을 신앙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직장 일보다는 교회 일, 가정 일보다는 교회 일이라는 잘못된 주장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인해서 빚어지는 결과입니다

 

세상적인 것은 세상일을 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흔히 교회가 세속화 되었다는 말을 합니다. 예전에는 교회의 세속화를 막기 위해 극장을 가는 것, 노래방 가는 것, 교인들이 매니큐어를 칠하고 파마를 하는 것까지 금지하였습니다. 그런 모든 것을 세상의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결국 세상의 어떤 문화가 교회로 들어오는 것을 막음으로써 교회가 세속화 되는 것을 막는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이것이 곧 신앙을 금욕적인 것으로 오해한 결과입니다.

 

세상을 사랑치 않는 것, 교회가 세속화되지 않는 것이 그런 것이라면 수도원처럼 사회와 격리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철저히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존재로 여길 것입니다. 자기들에게는 세속화란 없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을 사랑하지 않기 위해서는 스스로 세상과 격리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요한이 말하는 세상은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요한이 말하는 세상의 의미를 안다면 우리가 얼마나 세상적이며 세상을 사랑하는 자로 살고 있는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수도원처럼 격리되어 살아가는 그들 역시 비록 사회와는 격리되었다 할지라도 그들도 세상을 사랑하고 세속화되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될 것입니다.

 

먼저 요한이 말하는 세상은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뜻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지 않고 의지하지 않는 모든 사고방식을 지칭하여 세상이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세상의 삶의 정신 자체가 하나님이 없어도 자신들의 힘과 능력으로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도 세상은 얼마든지 존재합니다. 자신들의 힘으로 뭔가를 이뤄보고자 할 때, 하고자 하면 못이룰 것이 없다는 말이나 하고 있을 때 그것이 곧 세상이며, 그것을 가리켜서 교회의 세속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은혜와 사랑의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인정하며 하나님이 온 우주를 주관하시고 다스리

심을 인정하면서 하나님의 일하심에 순종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교회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인정하기보다는 반기를 듭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에 대해 불만과 불평을 내세우며 자신의 뜻대로 이뤄 달라고 소리칩니다. 이것이 세상이며 교회의 세속화 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없이 자신들의 힘으로 원하는 것을 이루며 살아가는 삶이 좋아 보이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대로 산다는 것보다는 열심과 힘을 다해 원하는 것을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 훨씬 사는 것 같고 보람이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야 말로 세상에 대한 사랑이 그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있다면 세상이 살아가는 사고방식은 절대로 마음에 들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아버지의 다스리심을 부인하는 사고방식에 대해 적대감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과 싸우며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그러한 모습이 나와지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있다면 그 사랑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아버지를 바라보고 믿고 의지하게 합니다. 세상이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모습들이 결코 좋게 보이지를 않게 됩니다. 때문에 세상을 사랑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없을 때 자연히 세상이 좋아 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세상적 인간, 세속적인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16절에 보면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없이 사는 세상이 목적하는 것은 모두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들입니다. 육신의 즐거움을 위해 살고 외형적인 것으로 가치를 판단하며 살아갑니다. 그러기에 이들은 하나님을 싫어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관한 대로 순종할 것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정욕이란 세상에 있는 것을 자신의 소원을 삼은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기도하게 됩니다. 이것을 두고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한 기도라고 말씀합니다. 즉 자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기도하는 것은 잘못된 것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4:4절에 보면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세상과 벗되는 것이 왜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세상의 삶의 사고방식이 하나님과 전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의 존귀함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스스로 부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은 흘러 지나가는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눈에 좋아 보이는 모든 것들이 잠시 후면 사라질 것들에 불과합니다. 영원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세상것으로 이생의 자랑으로 삼으려고 하고 세상 것을 소유함으로서 자신을 존귀하게 할려고 한다면 참으로 어리석다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영광은 오직 그리스도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사랑치 말기 바랍니다. 신자는 영원한 생명으로 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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