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예화 주 안에 거하라

첨부 1


(24강) 요한일서 2:28-29 주 안에 거하라

 

<본문>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요한일서 2:28-29)

<설교>

신자의 관심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으로 집중 되어야 합니다. 성경을 대할 때도 이것은 불변의 원칙으로 자리하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관심을 가지고 성경을 대하게 되면 결국 예수님과 상관없는 전혀 다른 말을 하게 되어질 뿐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예수님이라는 말로 그럴듯하게 포장되어 마치 진리인 것처럼 행세를 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는 마지막 때에 이처럼 다른 예수를 전파하는 적그리스도, 거짓 선생들이 많이 일어날 것임을 말합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신자의 어려움은 과연 어떤 가르침이 맞느냐는 것입니다. 모두가 내 말이 옳다고 말하기 때문에 이 말을 들으면 그게 옳은 것 같고, 또 저 말을 들으면 그게 옳은 것 같은 혼란으로 인한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이 있습니다. 그것은 과연 그 가르침이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드러내고 높이고 있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여러분은 항상 말씀을 살피고 배우기를 힘써야 할 것이고, 모든 관심을 예수님에게 두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관심이 예수님을 향할 때 옳고 그름은 자연히 분별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28절에서도 “자녀들이 이제 그 안에 거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믿는 자가 그리스도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영원한 관계를 맺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자로 살아감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에 거하는 자로 굳게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도는 믿는 자가 그리스도안에 거하는 것을 흔히들 생각하는 세상의 복과 연결시키지 않습니다. 즉 세상에서의 평안과 행복을 누리기 위해 그리스도안에 거하는 문제를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에 거하는 자로 사는 것이야 말로 영원한 생명에 거하는 신자의 모습이기에 그 안에 거하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까? 물론 우리 스스로의 힘과 의지로 믿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믿음이 우리에게 주어진 이유를 어디에 두고 있는가는 다시금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늘에 계신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셔서 죽으셔야만 했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안다고 해서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니라 진심으로 십자가에 담겨 있는 진리에 거하고 있는가를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 문제로 죽으셨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 변할 수 없는 진리에 거하는 모습을 보기가 힘들어 졌습니다. 십자가의 죽으심은 단지 기독교의 교리로, 또는 기념할 만한 일로 여겨질 뿐이고,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안에 거하는 삶에 대해서는 회피해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점차 멀어지면서 내 육신과 세상에서의 삶에 관심이 몰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우리의 육신을 도우시는 분으로만 생각해 버리는 이것을 과연 그리스도안에 거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은 열심히 교회 다니고 기도하고 성경 보는 것으로 여길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은 일단 세상을 벗어난 자로 사는 것입니다. 물론 산속에 들어가 홀로 살아라는 뜻은 아닙니다. 세상이 살아가는 것과 같은 목적을 가지고 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말씀하시고 가르치신 그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이 사셨던 삶의 길을 가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안에 거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28절에 보면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도는 믿는 자가 주 안에 거해야 할 이유를 주께서 나타내신 바가 될 때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리스도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주 안에 거해야 할 이유를 주님의 강림하실 때와 연결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신자가 뭘 어떻게 했을 때 주 앞에 부끄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봉사를 많이 하고 전 재산을 교회에 바치면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신자는 모든 것을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즉 전 재산을 모두 교회에 바쳤다고 합시다. 그것이 사람들 앞에서 칭찬을 들을 수 있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님 앞에서는 어떻습니까? 십자가 앞에서도 자랑스러운 일이 되겠습니까? 이렇게 볼 때 우리의 어떤 행위를 가지고도 예수님 앞에서는 자랑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무엇을 해도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은혜에 비할 바가 못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한다고 해도 그것을 예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어떤 인간도 자신의 행위로는 떳떳해질 수 없고, 담대할 수도 부끄럽지 않은 존재로 예수님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는 주안에 거하는 것을 주가 강림하실 때 담대하게 부끄럽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때문에 주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것과 우리의 행위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부끄러움은 허물이 있음을 뜻합니다. 그러면 부끄럽지 않다는 것은 허물이 없음을 뜻합니다. 우리가 부끄러운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 모두 허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이 허물은 어떤 것으로도 덮을 수도 씻을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피로써만 덮어질 뿐입니다. 그러므로 부끄럽지 않은 존재로 선다는 것은 예수님의 피의 은혜로 모든 죄가 가려진 존재로 주님 앞에 서게 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의 은혜로 말미암아 심판 때 부끄러움이 없는 존재로 담대하게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 거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에 머물러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그리고 이렇게 주님의 은혜에 머물러 살 때 형제에 대한 사랑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를 아십니까? 그러면 그는 진리와 진리 아닌 것을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리가 아닌 것은 예수님의 의가 아니라 인간의 의를 높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예수님만 높이는 그가 주안에 거하는 참된 백성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