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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사랑으로 자녀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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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강) 요한일서 3:1 사랑으로 자녀됨

 

<본문>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요한일서 3:1)

<설교>

1:4절에 보면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는 말을 합니다. 이 구절에서 서신을 쓰는 사도의 마음을 볼 수가 있는데 그것은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으로 인한 사도의 기쁨에 신자들을 초대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처럼 믿는 자에게 믿음으로 인한 기쁨은 당연한 것이고 자연스런 것입니다. 스스로 기뻐하겠다고 발버둥을 칠 문제가 아니라 믿음에 있는 신자에게 주어지는 자연스런 열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믿음의 기쁨에 거하지를 못한다면 그것은 뭔가 문제가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이점을 염두에 두고 신자에게 권면을 하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보면 사도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녀로 일컬음을 얻게 된 것으로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사도와 동일하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된 존재라고 할 때 과연 우리에게는 사도와 같은 기쁨이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녀가 되었음을 부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와 같은 기쁨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일컬음 받게 되었다는 것이 우리의 삶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왜 그럴까요?

 

2:15절에 보면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는 신자라면 세상을 사랑하지 않게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즉 아무리 아버지의 사랑을 고백하고 말한다 할지라도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라면 그 속에 사랑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서 아버지의 사랑을 말하고 인정하는 것처럼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상태가 아닐까요? 사랑이 없으면서 사랑을 말하는 것 말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면 세상이 크게 다가오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이 크게 보일 때 세상에서 별 쓸모가 없는 아버지의 자녀라는 신분에 대해서는 마음을 두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일컬음 받게 되었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세상에서 무엇을 얻을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자녀된 것에 대한 기쁨을 상실하게 하는 것은 아니겠습니까? 자녀 됨이 크게 다가오지를 않는 것입니다. 세상이 사랑의 대상이고 세상이 내 마음에 가득 채워져 있는데 아버지의 자녀 됨에 대한 감사와 기쁨이 있을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신분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거나 힘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재벌의 자녀가 되었다면 그 신분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힘이 될 것입니다. 때문에 세상이 알아주는 신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에 대해 세상은 철저히 외면합니다. 오히려 조롱하기까지 할 것입니다. 신자는 세상의 이러한 반응에 대해 이상하게 여길 필요가 없습니다.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무시합니다. 하나님을 크신 분으로 만물의 주인으로 보지를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없다’는 말만 외칠 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면서도 그것을 철저히 거부합니다. 오직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이만큼 살고 있다고 큰소리치는 것이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크게 보겠습니까? 절대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으로부터 신자라는 신분으로 크다 일컬음을 받지 못하고 높임 받지 못한다고 해서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된 신분에 대해 하찮게 여긴다면 참으로 어리석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크고 위대하시고 전능하신 분으로 보지 않고 있다는 증거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신자는 세상에서 대접을 받는 존재로 부름 받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세상에서 미움을 받아야 할 존재로 부름 받았음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과 같은 길을 가는 것이 아닙니다. 전혀 다른 길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신앙인으로서의 기쁨이 없고 아버지의 자녀로 일컬음 받게 된 것으로 감사함도 기쁨도 없다면 그것은 세상에 대해 자꾸 곁눈질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을 향해 갈 때 그들에게 기쁨이 있었습니까? 기쁨 대신에 원망과 불만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것은 애굽을 돌아봤기 때문입니다. 지금 비록 고달프지만 약속의 땅으로 인도받고 있다는 것이 크게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애굽에서 지내던 시절이 더 그리운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에게서 기쁨을 상실하게 한 것입니다.

 

사도는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라고 말합니다. 이 말의 의미가 뭐겠습니까? 아버지의 사랑이 참으로 놀랍고 위대하고 크신 사랑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버지께서 주신 사랑이 어떤 사랑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사랑을 베풀 가치가 없는 존재를 위해 독생자 아들을 죽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아들을 내어 놓게 할만한 조건이 뭐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아니고, 오히려 심판의 대상에 불과할 뿐인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내어 놓으신 것입니다. 이 사랑을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서 구출하시고 하나님의 나라에 있게 하신 것은 그냥 지나가다가 걸인에게 동전 하나 던져준 식으로 베푸신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신 아들을 희생하셨습니다. 그 결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일컬음 받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기뻐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마음에는 분명 다른 것이 크게 자리하고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 세상을 심판의 자리에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심판을 믿으신다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결국 사라질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린 애당초 세상에서 세상과 함께 멸망당할 존재였습니다. 그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구출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 사랑을 절대 허술하게 보지 말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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