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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하나님의 자녀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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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강) 요한일서 3:9-10 하나님의 자녀라면

 

<본문>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요한일서 3:9-10)

<설교>

신자는 세상 사람과는 다릅니다. 다르기 때문에 다른 점이 보여지게 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기준으로 해서 다르다 다르지 않다는 분별을 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신자의 다른 점의 기준은 세상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신자의 다른 점을 보여주는 기준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준은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은 세상과 다르게 사셨습니다. 따라서 세상과 다르게 사신 예수님을 통해서 신자가 세상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를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다른 점은 자유함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세상에 매여 삽니다. 자신을 위해 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매일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유로우신데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항상 근심과 염려 불안과 초조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그리스도안에서 하나하나 벗어버리는 삶을 살기보다는 거미줄에 얽힌 파리처럼 세상에 얽혀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 우리들의 처지가 아니겠습니까? 이런 우리가 과연 세상 사람과 다르게 산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자유하기 위해 힘을 쓰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유가 세상과 다른 모습이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우리가 힘쓴다고 해서 자유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희미하게나마 그 맛을 볼 수 있을 뿐입니다. 때문에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안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이고, 그리스도에게로 깊이 들어가기 위해서는 자신에 대한 철저한 절망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참으로 자유하신 예수님을 보면서 자유하지 못하고 세상에 얽혀 살아가는 자신의 믿음 없음과 무능함을 발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만 살아있는 예수님에 비해 세상의 온갖 근심과 걱정을 다 가지고 살아가는 자신의 악함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나의 죄를 씻어주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에게 깊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자신의 믿음 없음을 볼 수 있어야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의 사랑에 붙들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는 신자들을 믿음에 대해 자신있는 사람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믿음에 대해 절망하기는커녕 할 수 있다는 큰소리를 치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들이 십자가에서 주님의 사랑을 볼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사랑에 깊이 빠져들 수 있겠습니까?

 

신자가 세상 사람과 다른 점은 자신의 죄에서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답게 사는 것입니다. 신자답다는 것은 착한 행위로 인해 세상의 칭찬을 듣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보시느냐가 중요할 뿐입니다.

 

3:1절에 보면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고 말합니다. 세상은 아버지도 아들도 모릅니다. 그런 세상 사람들이 신자를 제대로 이해하고 평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칭찬을 들어야 한다는 생각은 버리시기 바랍니다. 물론 욕을 들어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세상 사람의 칭찬을 받으니까 신자다울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마귀는 내 자신에게 가능성을 두게 합니다. 그러한 가능성을 포기하기 위해 자유하신 예수님을 보면서 자유하지 못한 우리의 못남과 악함을 깊이 자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 자신이 낮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자의 낮아짐은 아버지의 사랑을 아는 것으로부터 나오게 됩니다. 사실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 덕분에 살아가는 우리가 큰소리 칠것이 무엇이고 내세우고 자랑할 것이 뭐겠습니까? 내게 무엇이 있든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 내게 있는 것을 사용하시는 것뿐인데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겠습니까? 자신의 행위를 자랑하고자 하는 것은 내가 내 주인이라는 사고방식일 뿐이고 이러한 사고방식으로는 무엇을 해도 마귀의 일일 뿐입니다.

 

9절에 보면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고 말합니다.

 

죄를 짓지 않고 범죄치 않는다는 말을 잘못 이해하면 성경은 완벽한 신자가 될 것을 요구한다는 얘기가 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죄없는 완벽한 자로 변화되는 것이 아니고 완벽한 삶을 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죄가 되는 일을 하지 않고 살아가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에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기준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의 죄는 선악과를 먹은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말씀에 순종치 않고 선악과를 먹은 것이 이미 그 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닌 자기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죄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9절에서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산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10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10절)는 말씀에서처럼 세상은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로 구분됩니다. 그런데 의를 행치 않는 자, 또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즉 마귀에게 속한 마귀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이 내용이 어쩌면 우리를 당혹스럽게 할 수도 있습니다. 의를 행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에 대해 부담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의를 행하고 형제를 사랑해야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의를 행하는 자로 산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형제를 사랑한다고 할 수 있습니까? 아마 선뜻 그렇게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는 자기 행함을 기준하고 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아무리 봐도 형제에게 해준 것이 없다는 것 때문에 사랑에 대해 자신감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형제 사랑은 자신을 낮추고 형제를 높이는 것입니다. 물질로 돕는 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약자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을 높이는 것은 예수님을 아는 신자에게서만 보여질 뿐입니다. 그러므로 형제 사랑은 예수님을 알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녀는 마음을 낮추게 됩니다. 어떻게요? 마음이 높은 교만한 나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셨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확증되었음을 알기 때문에 사랑을 아는 신자라면 자연히 자신을 낮추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의 사랑과 은혜가 증거됨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악함을 알고 낮아진 자리에서 주님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형제를 대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내 의가 증거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의가 증거되는 것이고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증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다른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자로 사는 것을 형제 사랑으로 바꾸어서 말하고 있음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자가 형제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고, 형제를 사랑하는 신자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을 거짓말로 여기는 것입니다.

형제 사랑이 없다면 무엇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증거되겠습니까?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것입니까? 하지만 교회를 위해 뭔가 했다고 해서 그것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3:14절에 보면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고 말합니다. 형제 사랑이 예수님을 믿는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자녀에게서만 나올 수 있기에 이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악함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런 나를 위해 낮아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은혜를 바라보십시오. 예수님 앞에서 날마다 낮아지십시오. 그리고 그 마음으로 형제를 대하십시오. 이 마음으로 살아가는 그가 바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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