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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가인같이 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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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강) 요한일서 3:11-12 가인같이 하지 말라

 

<본문>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요한일서 3:11-12)

<설교>

형제 사랑은 낮아진 마음에서만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낮추고 형제를 높이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낮아지는 문제는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마음은 우리 스스로 통제하고 다스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형제 사랑은 마음이 높은 우리가 실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답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의 낮아짐은 예수님에 대한 인식에서 나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고 내가 그분 앞에서 어떤 존재인가를 자각할 때 자연히 마음이 낮아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알지 못한 자는 형제 사랑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처럼 형제 사랑은 마음이 낮아진 신자에게서만 보여지는 것이고, 마음이 낮아진다는 것은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 안에 거하는 신자의 특성이기 때문에 형제 사랑은 신자가 실천해야 할 덕목의 한 부분이 아니라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께 속한 자라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형제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녀 됨을 알 수 있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10절을 보면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됨으로써 필연적으로 따라오게 되어 있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엉뚱한 것을 내세우며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라는 말을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11절에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고 말합니다. 형제가 서로 사랑하는 것을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랑은 믿음에 추가하는 행위가 아니란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을 높이고 고상한 믿음으로 보이기 위해 신앙적인 행위를 추가시키는 것쯤으로 여겨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형제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믿음의 증거물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 사랑은 있어도 없어도 신자는 신자인데 사랑을 하면 더 수준 높은 신앙인으로 보여진다는 생각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사도는 분명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있고 의를 행하지 않는 것이기에 하나님께 속한 자가 아니라는 단호한 말을 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도는 이것을 12절에서 가인의 얘기를 통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12절에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고 말합니다. 즉 가인같이 하는 것이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란 뜻입니다. 가인의 행위가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결과로 나타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인의 행위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와 제물을 받고 자신의 것은 받지 않으신 것으로 인해 아벨을 죽인 것입니다. 그러면 동생을 죽이지 않는 것이 형제 사랑이라는 것입니까? 가인의 얘기는 그렇게 단편적인 내용이 아닙니다. 단순히 ‘가인이 아벨을 미워해서 죽였다 그러니 우리는 형제를 미워하지 말자 그것이 형제 사랑이다’고 가르칠 내용이 아니란 것입니다. ‘형제를 미워하지 말자’는 말 자체가 이미 공허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미움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고, 앞서 말한 대로 우린 마음을 다스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다스릴 수 없는 자에게 마음을 다스리라고 한다면 그것이 곧 공허한 말이 아니겠습니까?

 

가인의 행위에는 아벨에 대한 미움과 시기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중요한 것은 미움과 시기가 무엇 때문에 있게 되었는가를 먼저 살피는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가인은 악하고 아벨은 의롭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면 의로운 아벨 앞에서 악한 가인이 취해야 할 태도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의로운 예수님 앞에서 악한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바꾸어 생각하면 쉽게 답을 알 수 있습니다.

 

의로우신 예수님 앞에서 악한 우리가 취하게 될 태도는 우리의 악함을 깨닫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로우심에 비해 나는 참으로 악한 자임을 깨닫는 것이 예수님을 만난 자의 태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의로운 아벨 앞에서 가인이 취해야 할 것은 아벨에 비해 나는 참으로 악하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인이 자신의 악함을 깨달았다면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만 받으시는 것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갖게 될 것입니다.

 

결국 가인같이 한다는 것은 자신의 악함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 불평을 하면서 상대적으로 자신보다 더 나은 대접을 받는 자에 대해 미움과 시기가 나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해할 때 ‘가인같이 하지 말라’는 것은 미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는 의미라기보다는 의로움 앞에서 자신의 악함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 불평하고 분노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가인같이 행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우리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사람은 항상 타인과 자기를 비교하며 삽니다. 때문에 똑같이 하나님을 믿으며 사는데도 불구하고 누구는 편안함을 누리는데 자신은 어려움에 있을 때 하나님께 분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인같이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우리는 악한 자일뿐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러분이 받고 있는 대접은 사실 분에 넘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마음일 때 형제에 대한 미움과 시기가 자리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것만 받으시고 우리의 것은 받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것은 악한 자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말에 대해 ‘지금 신앙으로 잘하고 있는데 우리의 것을 안받는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라며 분노하는 것은 가인같이 하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살아 있기 때문에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서 형제 사랑은 불가능한 것일 뿐입니다.

 

미움과 시기가 무엇으로부터 나오는가를 명확히 봐야 합니다. 미움과 시기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의 실체를 명확히 깨닫고 들여다 봄으로써 해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번 깨달았다고 해서 완전히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악한 자임을 깨달았다고 해서 본성까지 모두 고쳐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악한 본성은 나보다 잘한 사람 앞에서는 고개를 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 앞에서 나의 악함을 생각하며 다스림을 받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미움과 시기에 머물지 않는 중요한 길이 되는 것입니다.

 

나를 낮추고 형제를 높일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악함을 봄으로 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낮추시기 위해 힘써 일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낮추시기 위해 나보다 나은 형제를 내 앞에 세우기도 하십니다. 세상의 조건으로는 별 것 아닌데 신앙에 있어서는 나보다 나은 형제를 세우셔서 우리를 낮추어 가시는 것입니다. 부디 가인같이 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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