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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책망과 담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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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강) 요한일서 3:19-23 책망과 담대함

 

<본문>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일까 보냐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요한일서 3:19-23)

<설교>

본문은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19절)는 말로 시작합니다. 즉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함으로써 진리에 속한 줄을 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는 것은 진리에 속한 자들에게서만 보여질 수 있는 증거물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 사람들에게서는 볼 수 없다는 것이지요. 이런 이유로 사랑을 세상적인 차원에서 이해하면 안되고 사람을 좋아하는 감정으로 이해해서도 안된다는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19절의 내용이 단순히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할 것을 강조하는 것은 아닙니다. 즉 사랑을 행하는 행함이 중점이 아니란 것이지요. 왜 그런가 하면 20절부터 등장하는 내용이 뭔가 다른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행함을 강조한다면 사실 20절부터의 내용은 불필요 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절까지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20절부터의 내용은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22절에서는 갑자기 기도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볼 때 뭔가 다른 의미의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22절을 보면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사랑으로 이해할 때 결국 사랑을 행하는 자는 무엇을 구하든 응답 받는다는 뜻으로 생각될 수 있지만 그것은 문자에 매인 단편적 생각일 뿐입니다.

 

22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20-21절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일까보냐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20-21절)라는 내용을 이해해야 합니다.

 

사람은 스스로를 책망할 줄 압니다. ‘내가 이래서야 되겠는가?’라는 책망을 안해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이라는 구절의 뜻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일까보냐’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이 자신을 스스로 책망할 줄은 알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합니다. 즉 자신을 죄인이라고 인정한다 할지라도 스스로 느끼고 인정하는 죄의 깊이는 너무 얕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죄의 깊이를 아십니까? 모든 죄를 아십니까?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고백한다고 해도 단지 세상에 욕심을 두고 살아가고 믿음으로 살아가지 못한다는 일종의 치장용의 말로 끝내는 경우가 대부분이 아닙니까? 자신의 죄의 깊이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신다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은 내가 모르는 나의 죄의 깊이를 완벽히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9절의 말은 나의 죄의 깊이를 알지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을 책망할 수밖에 없는데, 하물며 우리의 죄의 깊이를 완벽히 아시는 하나님이시라면 그 책망이 얼마나 크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21절에 가면 또 다른 말이 나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책망할 것이 없으면’이라는 이 말을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합니까? 스스로를 책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인데 ‘우리 마음이 책망할 것이 없으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책망 받을 일을 전혀 하지 않으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본문은 책망 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책망 받을 일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이상하고 앞뒤가 맞지 않는 뜻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아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입니다. 나도 나를 책망할 수밖에 없는데 나의 감춰져 있는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눈에 우리가 어떻게 비춰지겠습니까? 구원의 가능성이 전혀 없고 오히려 멸망에 처해지는 것이 당연한 존재로 비춰지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런 우리를 위해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책망할 것이 없다는 것은 자신을 책망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자신을 책망하지 않는다는 것은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의지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죄를 범해도 괜찮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래가지고도 구원받을 수 있을까?’라는 의심과 불안과 책망이 없는 상태를 뜻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안다는 뜻입니다. 이런 자의 모든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게 되는 것은 하나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은 나에게 아버지시고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관계를 안다는 것입니다. 아들이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아들의 자리에서 쫓겨나는 것이 없음을 믿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는 기도할 때도 아들로서 기도하게 됩니다. 아들의 기도이기에 무엇이든 구하는 것을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할 때 어떻게 하면 응답 받을 수 있는가?에 관심을 두는 사람이 많습니다. 100% 응답받는 비결이라는 엉터리 가르침까지 등장한 것이 현실입니다. 이처럼 어떻게 하면 응답 받는가에 관심을 둔다면 그것은 곧 아들로서 아버지께 나아가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들이면서 뭔가 잘못했을 때 ‘내가 이런 잘못을 했는데 혹시 아버지의 아들이 아닌 것은 아닌가? 혹 나를 아들의 자리에서 쫓아내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심을 가진다면 그 아들이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나님과 신자는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영원히 깨어지지 않는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이 깨어지지 않는 관계가 곧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사랑안에는 책망이 없다는 것이고, 때문에 담대해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무엇도 나를 아버지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음을 아는 것이야 말로 신자의 담대함인 것입니다.

 

아들이기에 무엇이든 구하는 것을 들어주십니다. 하지만 잘못된 것을 구할 때 들어 주시지 않는 것도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내용을 사랑과 연결하여 말씀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독생자 아들이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일에서 사랑을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된 것은 독생자의 목숨 값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이 사랑을 아는 자가 형제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감정이 아니란 것입니다. 사랑을 행하는 것은 그 사람을 좋아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을 아느냐의 문제로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었으면 살 수 없는 궁핍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런 우리를 도우시기 위해 독생자를 버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궁핍한 자가 보일 때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를 도우신 하나님의 사랑처럼 형제를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재물을 도와주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재물보다 더 귀한 그리스도로 돕는 것이 필요합니다. 궁핍한 모든 자에게 항상 그리스도를 증거하고자 하는 것이야 말로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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