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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서로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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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강) 요한일서 4:7-8 서로 사랑하라

 

<본문>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한일서 4:7-8)

 

<설교>

사도는 사랑을 신자가 갖춰야 할 덕목의 요소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미 3:10절에서 말씀드린 대로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마귀의 자녀라고 선포할 정도의 중요한 문제로 말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은 아무나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 속한 자에게서만 보여지는 신자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형제가 서로 사랑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속하였음을 알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로 사랑하자’는 말을 하기 이전에 먼저 사도가 말하고 있는 사랑이 무엇인가를 필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이 세상에 속한, 세상에서도 얼마든지 보여지고 있는 사랑의 수준에 머물러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현대 교회는 믿음을 아주 값싸고 단순한 것으로 전락시켜 버린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교회만 잘 다니고 헌금만 잘하면 믿음이 있는 것으로 가르치고, 믿음의 결과로서 복이 주어진다고 가르쳐 버립니다. 결국 사람들은 복을 받으면 최고로 여기고, 이것을 위해 교회만 잘 다녀주면 되는 것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믿음의 가치와 귀함을 보지를 못합니다.

 

사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가 말하는 사랑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전혀 모른 채 세상적 수준에서 사랑을 말하고 가르칩니다. 인간적 관계, 즉 서로 웃으면서 친하게 지내고 사이좋은 관계를 사랑으로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사도가 과연 이러한 사랑을 말하고 있던가요? 겨우 사이좋게 지내지 못했다고 해서, 싸우고 다퉜다고 해서 그것을 사랑이 없는 것으로 말하며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을까요?

 

7절에서 사도는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말합니다.

 

사도는 하나님께 속한 자라면 서로 사랑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이신 하나님을 믿는 신자가 서로 만나는 것이라면 마땅히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의 ‘서로 사랑하라’는 말에는 개인적인 탐욕이 들어 있지 않습니다. 즉 오늘날 교회가 사랑을 강조할 때 서로 사랑하는 것을 이용해서 우리 교회는 이처럼 아름답고 교회다운 교회라는 것을 선전하고자 하고 그것을 이용해서 교회 부흥을 꾀하는 탐욕이 포함되지 않은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이점을 깊이 새겨야 합니다.

 

여러분도 교회가 서로 사랑하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혹 인간적 친분 관계를 즐기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까? 또한 내가 다니는 교회가 남다르기를 원하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교회를 즐기고자 하는 것일 뿐 사도가 말하는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사랑을 받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나를 사랑해 달라는 요구만 내어 놓습니다. 그러나 사실 사랑해 달라고 하는 것은 아직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적이 없다는 뜻이 됩니다. 왜냐하면 8절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씀하고 있고,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하나님을 믿는 신자는 사랑을 믿는 자로 살고 있다는 결론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믿는다면 굳이 사랑해 달라는 요구가 필요 없지 않습니까? 이미 사랑에 거하고 사랑을 믿는 자로 살고 있는데 말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벗어나 살아간 적이 없습니다. 어떤 일을 겪든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되어지는 일들입니다. 즉 비록 고통과 어려운 일이라 할지라도 사랑 안에서 되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믿는 자는 삶의 인한 낙심과 의심과 원망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처럼 사랑을 믿는 자로 만납니다. 그리고 내가 믿고 있는 사랑을 나타내고 전하기를 힘씁니다. 이것이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관계에는 지배하는 것이 없으며 세상의 형편과 상관없이 감사하며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다 같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입장이기 때문에 잘난 자 못난 자가 없습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친절을 베풀려고 하지 마십시오. 사람을 친절히 대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친절을 사랑으로 여기는 것을 문제 삼는 것입니다. 친절이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친절을 성경적인 의미로 이해한다면 예수님이 자신의 몸을 내어 주신 것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자신의 몸을 내어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예수님을 전하고 그 은혜와 사랑을 나누는 관계로 만나는 것이 친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자는 이러한 사랑을 해야 합니다.

 

7절에서 사랑을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말하는 것은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나올 수가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사랑은 모두 부인해야 합니다. 누군가에게 친절히 대한다고 해서 사랑이 있다는 생각도 금물입니다. 그래서 여러분께 필요한 것은 사랑에 대한 감정적이고, 윤리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고쳐져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예수님을 아는 자만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나타내고 전하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저를 좋아하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제가 전하는 예수님을 좋아하는 것이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저 또한 여러분을 좋아하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여러분이 사랑하는 예수님을 저 역시 사랑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 자가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누군가에 대해 섭섭한 마음을 가지지 마십시오. 섭섭하다는 것은 내가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바라봤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에게 뭔가를 기대했는데, 기대대로 되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섭섭한 마음이 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에게 형제에게 기대할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나를 좋아하고 나에게 잘 대해줄 것을 기대하지 마시고, 내가 사랑하는 예수님을 형제도 사랑하기를 기대하시라는 것입니다. 형제를 위해 기도한다면 그것을 두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그나 나에게 어떻게 대하든 내가 사랑하는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대접받아야 할 이유도 자격도 없는데 그래서 예수님의 은혜가 감사할 뿐인데 사람에게 또 무엇을 원한단 말입니까?

 

빌 1:15-18절을 보면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옥에 갇혀 있을 때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착한 뜻이 아니라 바울에 대한 투기와 분쟁으로 복음을 전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든 전해지는 것은 그리스도니 그것으로 기뻐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만을 바라보기에 사람에 대한 섭섭함도 미움도 자리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형제에게서 무엇을 원합니까? 내가 사랑하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내가 높이는 예수님을 높이고 내가 귀하게 여기는 예수님을 귀하게 여긴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것만으로 우린 이미 형제인 것입니다. 여기에 나를 좋아 해달라는 요구를 왜 합니까?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 사람을 보지 않고 예수님만 보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럴 때 서로 사랑하는 관계로 만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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