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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자존감을 넘은 굴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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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

진나라 말에 한신은 농사는 짓지 않은 채 천하통일의 꿈을 안고 무예만 연마하며 칼을 차고 다녔다. 어느 날 길을 가는데 동네 불한당 수십 명이 길을 가로막고 “통과하고 싶으면 길을 돌아가든지 우리의 가랑이 사이로 기어 가라”고 조롱했다. 물론 그 순간 한신은 칼을 빼어들고 싸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 일 때문에 다치거나 죽는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한신은 태연한 얼굴로 몸을 굽히고 불한당의 가랑이 사이를 지나갔다. 그리고 훗날 한고조 유방을 도와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룬다. ‘과하지욕(袴下之辱)’의 수치를 당하면서도 꿈을 이루기 위해 순간의 굴욕을 참아냈던 것이다.

후한말 유비가 잠시 조조에게 몸을 의탁했다. 우연히 식탁에 마주앉은 조조가 물었다. “그대는 이 시대 영웅이 누구라고 생각하오?” 유비는 “원소와 공손찬이 아니겠습니까?”라고 에둘러서 이야기했다. 그러자 조조가 “이 시대 진정한 영웅은 나와 그대가 아니겠소”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유비는 조조가 자신을 곧 죽일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그때 마침 하늘에서 천둥이 쳤다. 그러자 유비는 급히 식탁 밑으로 기어들어가 벌벌 떨었다. 그 모습을 보고 조조는 마음 속으로 ‘유비는 영웅이 아니라 천하의 무뢰배로구나’라고 비웃었다. 그래서 결국 유비는 조조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고 무사히 빠져나와 훗날 촉나라를 세우게 됐고 삼국지에 영웅 중의 영웅으로 기록되었던 것이다.

사람이 자존심을 생명처럼 여기고 지키는 일은 아름답다. 물론 자존감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러나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미션을 이루지 못하고 치명적인 위해를 당한다면 차라리 자존감을 지키지 못하는 게 나을 것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양아치처럼 비굴하게 살라는 말은 아니다. 더 큰 자존감 세우기 위해 순간의 굴욕은 참아내야 한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굴욕을 생각해보라. 십자가의 수치와 굴욕은 얼마나 비참했는가. 그러나 예수님께는 인류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거룩한 야망과 꿈이 있었다. 바로 그런 거룩한 야망과 꿈 때문에 주님도 기꺼이 십자가의 굴욕을 견디지 않았던가.

우리도 그렇다. 찬란한 꿈이 있고 진정한 자존감이 있는 사람은 때로는 굴욕을 아름답게 받아드린다. 이제 무조건 덮어놓고 자존심만 앞세울 것이 아니라 진정한 자존감을 세우기 위해 작은 굴욕을 선택하는 용기를 갖자. 그것이야말로 참된 자존감의 극치를 보여준 십자가의 영성이며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포기의 영성이기 때문이다.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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