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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관계의 중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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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에 외무부장관을 지낸 <이동원 선생>의 회고록에 보면 
우리나라 근대사에 매우 의미 있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960년대 초 어느 날 <리처드 닉슨>이 우리나라에 왔습니다. 
그가 공항에 도착할 때 우리 정부에서는 아무도 영접하러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닉슨은 한물 간 인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닉슨은 1960년에 미국 현직 부통령이란 유리한 입장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선거에서 케네디에게 져서 낙선했습니다. 

2년 후인 1962년에는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서도 낙선했습니다. 
그의 정치 생명이 끝났다고 생각한 우리 정부는 그를 홀대하였습니다. 

당시 주한 미국 대사인 브라운 대사는 이동원 장관을 통해 
닉슨을 위해 청와대 만찬을 열어줄 것을 여러 번 요청했지만 청와대는 거절했습니다. 

이 장관도 그가 미국의 부통령이었다는 경력만으로도 
귀하게 대접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지만, 
청와대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단지 잠시의 대통령 면담만 이루어졌을 뿐입니다. 

닉슨이 초라하게 한국을 떠나기 전날 밤에 
브라운 대사는 미 대사관에서 만찬을 열고, 
한국의 장관 모두를 초청했지만, 이동원 장관 한 사람만 참석했을 뿐입니다. 
닉슨은 매우 섭섭한 마음으로 한국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상대의 이용가치를 보고 대한 결과는 매서웠습니다. 
정치 생명이 끝난 것처럼 보였던 닉슨은 모든 사람의 예상을 뒤엎고 
1968년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어 1969년 1월에 제37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했습니다. 
취임 6개월 후 괌에서 발표한 <닉슨독트린>의 핵심 내용은 주한미군을 철수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당황한 사람은 박정희 대통령과 청와대 참모들이었습니다. 
청와대는 닉슨과의 정상회담을 수없이 요청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후에 박정희 대통령은 백악관도 아닌 새크라멘토로 가서 한 호텔에서 겨우 닉슨을 만났는데, 
닉슨은 호텔 입구에도 나오지 않고, 방안에 앉아서 박 대통령을 맞이했습니다. 

그 날 저녁 만찬에는 국무장관 외의 다른 각료는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치명적인 것은 애걸하듯 이루어진 회담은 아무 열매도 없었다는 점입니다. 

박 대통령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1971년 3월 27일 미 제7사단은 
24년간의 한국 주둔을 끝내고 철수했습니다. 
상대를 이용가치란 측면에서 대할 때 오는 불편한 결과였습니다. 
아마도 이때부터 박 대통령은 자주 국방의 필요성을 절감했을 것입니다. 


- ⓒ 설교닷컴 : http://www.biblei.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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