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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알맹이와 껍데기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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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맹이와 껍데기 사이에서

- 안효관 목사(전주남성교회)


레너드 스윗(Leonard Sweet)이 쓴 
『교회, 스타벅스에 가다』  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상스럽고 교양머리 없는 한 사내가 
어느 가게의 유리 진열장에 놓인 아름다운 꽃병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화려한 색상과 불투명한 흑적색 빛이 그의 눈을 사로잡았습니다. 

늘 상점 앞에 서서 물끄러미 꽃병을 쳐다만 보던 이 남자가 
용기를 내어 가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꽃병에 대해 물어보았습니다. 

그 꽃병은 아주 희귀한 것이었습니다. 
그 꽃병을 만든 사람의 사인과 연도가 표기된
‘갈르(Galle) 1900’ 카메오 세공 꽃병이었습니다. 
그것을 구입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두 달 치 월급을 모두 털어넣어야 했지만, 
그는 큰맘을 먹고 그것을 샀습니다.

갈르를 집으로 데려오던 날, 
그는 거실 벽난로 선반 위에 꽃병을 올려 놓았습니다. 
순식간에 꽃병이 주변 환경을 압도했습니다. 
그는 꽃병과의 조화를 고려하여 온 집안을 깨끗이 청소했고, 
지저분한 커튼도 교체하고 망가진 소파도 바꾸었습니다. 
형광등이 갈르의 색을 제대로 살려내지 못했기에 새로운 조명등으로 교체하고, 
벽지도 새로 바르고 페인트칠도 다시 했습니다. 
그 꽃병으로 인해 그의 집 전체가 조금씩 바뀌어갔습니다.

또 하나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인도에 왕과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던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녀는 결혼한 지 1년 만에 병으로 인해 죽고 말았습니다. 
왕비를 너무너무 사랑했던 왕은 너무 슬펐습니다. 
그래서 정성껏 무덤을 만들어주고는 
무덤 옆에 자신의 모습을 조각한 동상을 세웠습니다. 

1년 후 왕은 다시 왕비의 무덤 곁에 
왕가(王家)를 상징하는 호랑이 동상을 세웠습니다. 
또다시 1년 후 무덤 곁에다 죽은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호화스러운 별장과 자신의 권력을 상징하는 웅장한 성을 건축했습니다. 

왕은 무덤을 내려다보면서 흡족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무덤을 내려다보던 왕은 웅장한 성과 별장, 
그리고 정교하고 아름다운 조각들이 사이에 놓여있는 
초라한 무덤이 눈에 거슬렸습니다. 
그리고는 신하를 불러 이렇게 명령을 내리고 맙니다.
“저 무덤을 당장 치워버려라.”

이 이야기는 영국의 소설가 웰스(Wells)의 단편소설 ‘무덤’의 줄거리입니다.

신앙을 갖고 산다는 것은 내 영혼과 삶에 새로운 존재가 들어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내 인생에 주인공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런데 내 인생의 주인공으로 오신 예수님으로 인해 
내 인생이 어떻게 바뀌어지는지를 우리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처음 이야기에 나오는 경우처럼 
내 인생의 집에 새로운 꽃병이 하나 들어옴으로 인해 
내 삶이 아름답고 향기 나게 바꿔져야 합니다. 

세상의 최고의 가치이신 예수님이 우리 인생에 들어오심으로 
우리의 마음은 그분을 모시기에 합당한 아름다움으로 변해가야 합니다. 
조금씩 조금씩 말입니다.

그런데 변해가던 우리의 인생과 마음에, 
두 번째 이야기에 나오는 왕처럼, 
우리는 또 다른 가치로 인해 본질을 잃어버린 채 
비본질의 삶을 살아가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웅장한 성과 아름다운 별장, 
그리고 섬세한 조각들은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합니까? 
사랑하는 아내(왕비)을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비본질이 본질의 자리를 꿰차고 들어온 순간 
우리는 알맹이가 사라진 껍데기만 간직한 채 살아가게 됩니다. 
교회에서 받은 직분이 그렇고, 
예수님으로 인해 얻어진 축복이 그렇습니다. 
그런 것은 결코 본질이 아닙니다. 
교회성장과 부흥은 본질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역이라는 본질에 주어진 보너스일 뿐입니다. 
그런데 보너스가 본질이 되어버린 오늘날의 교회는 껍데기를 벗어내야 합니다.

우리는 나름대로 하나의 가면(persona)을 쓴 채 살아갑니다. 
이 가면(페르조나)은 개인이 사회적 요구에 적응하기 위하여 
또는 자아와 개인을 둘러싼 환경과의 타협으로 생겨난 공적 얼굴일 뿐입니다. 
즉 본질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너무 오랫동안 쓰고 있는 탓에 
우리는 가면이 우리의 본질인 양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목사는 가면입니다. 
그 가면 속에 감추어진 본질은 사람됨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가면을 너무 오래 쓴 탓에 우리는 사람됨은 잃어버리고 
목사로서의 권위와 체면만이 남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본질이 회복되지 않는 목사는 가짜입니다. 
장로, 집사, 권사,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껍데기를 벗어던질 줄 아는 용기, 
오늘 우리 시대에 가장 절실하게 요청되는 우리의 결단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껍데기 없이는 알맹이를 담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알맹이보다 껍데기에 더 많은 가치를 두고, 
더 많은 투자를 한다면 그것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알맹이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 
그것이 알맹이를 우리 안에 채우는 첫걸음입니다. 
본질의 가치를 아는 것, 
그것이 오늘 우리 시대를 사는 신앙인들이 회복해야 할 신앙의 첫걸음입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여호와와 바알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고 
엘리야 선지자를 통해 책망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오늘 우리가 들어야 합니다. 

“어느 때까지 알맹이와 껍질 사이에서 방황하겠느냐?”고, 
“어느 때까지 본질과 비본질 사이에서 머뭇머뭇하겠느냐?”는 
주님의 안타까워하는 말씀 말입니다. 

본질인 예수님을 잃어버리지 않는 교회, 
예수님을 잃어버리지 않는 신앙을 갈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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