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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메일 책벌레 274호 | 다큐팽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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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김재욱 님(낮은울타리 웨딩)이 다큐 <펭귄>을 본 소감을
보내 주셨습니다. 저도 지난해 극장에서 조카랑 함께  봤는데..
그때의 감동이 되살아나는군요. 연미복을 입은  펭귄의 모습이
어찌나 친근감 있게 다가오는지. 보는 내내 흥미진진하고
가슴이 짠~하고.. 우리가 사는 삶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같은 내용을 봐도 어쩜 이렇게 섬세하게 잘 표현할까 싶어
글을 보며 또 한 번 세세한 부분까지 포착해낸 감성에 감동을.. ^^
나눔 감사하고요, 두 분 다 하시는 사업이 잘~~되기를
바랍니다.

***

펭귄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감사할 정도로, 왜 저러고들 살아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드는 영화. 보는 내내 불편하고 가슴이 저며오는 영화 <펭귄>.

그러나 가만히 돌아보면 우리의 삶도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보다 고등한 존재가 우릴 보면 반드시 왜 저러고들 사나 싶을 것이기 때
문이다.우리보다 고등한 존재라는 것은 당연히 하나님이다.
우리가 펭귄을 창조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분명 펭귄 보다는 나은 존재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은 천사도 흠모할 만한 귀한 신분을 확보한 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귀한 신분을 잊고 펭귄처럼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날개가 있는 새지만,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날지 못한다...."
이 대사처럼 그들은 꾸역꾸역 걷고 또 걸어서 오모크까지 무리지어 간다.
우리에겐 세상을 변화시키고 문화를 다스릴 능력이 있지만 언제부턴가 우리는
그 능력을 잃어버린 것 같다. 우리중 삶에 찌들어 자신을 비하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바로 펭귄이다.

엉뚱하게도 나는 영화도중 나오는 성우들의 더빙에서 한 가지 생각을 먼저 해
보았다. 아나운서 이금희의 나레이션은 영화와 잘 어울렸다. 그러나 중간 중간
나오는 대사들이 차라리 없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네티즌들의 의견을 본적이
있는데 나도 동감이다.

특히 너무나도 유명한 성우 배한성과 송도순의 목소리는 너무나 많이 알려졌다.
이들은 텔레비전 방송이나 광고 등 인쇄매체에 너무 많이 얼굴이 등장해서
오래전에 라디오를 통해 들으며 얼굴을 궁금해 했던 때에 비하면 완전히 다른
느낌의 엔터테이너가 된 느낌이다. 펭귄의 대사를 들으면서 나는 배한성과 송도순의
매끄러운 목소리만 못한 얼굴이 자꾸 떠올라 언짢았다.

나는 장유진이라는 성우를 좋아한다. 예전에 교통방송에서 자정부터 흘러나오
던 그녀의 목소리. 그 도도한듯 기름칠을 한듯 표정이 있는 목소리가 시나 책을 읽어주
기 시작하면 밤까지 미뤄진 작업도 마냥 행복하기만 했던 것이다.
또 오래전부터 엘리자베스 테일러 등의 목소리 담당으로 유명한 것을 거론하
지 않더라도 그 목소리만으로도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성우다.
"소니 사이버샷이라고 말하세요" 라든지, "얼굴에 바르고 5분만 기다리세요
(미샤)" 등등의 텔레비전 광고 나레이션으로도 유명한 그녀는 절대 외부에 얼굴을
공개하지 않는다.

그녀가 못 생겨서 그러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녀는 진정한 프로다.
그녀가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하면 그 목소리는 그대로 파란눈을 가진 여배우
의 것이 되고, 디제이의 마이크를 잡으면 밤의 연인이 되고 만다.
프로란 그런 것이 아닐까. 자기 일의 목적성을 아는 것이다. 골퍼가 노래를
잘 하는 것은 그의 멋진 티샷을 보러 온 갤러리들에겐 불필요한 개인의 자랑일 뿐이다.
자기가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 이 일은 누구를 위한 일인지, 돈이나 명성
이전에 내가 정말 갖춰야 할 것은 무엇일지를 생각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작가는 글로 말하고, 성우는 목소리로 말하고, 의상디자이너는 옷으로 말하는
것이다.

가장 가슴 아픈 장면은 아무래도 무리지어 이동하는 펭귄의 대열에서 혼자 낙오된
펭귄의 모습이었다. 인생을 살다 보면 누구나 한번쯤은 그런 외로움과 패배감
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주변에서 끊임없이 그런 사람들을 보게 된다.
더구나 그 장면을 같이 본 사람이 우리의 대열에서 낙오한다는 것은 정말 안
타까운 일이다. 그 친구가 그 장면은 잊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나는 그 장면에 찍힌 펭귄이 왠지 대열의 후미를 따라잡아 결국은 오
모크에 도착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혼자 남아 죽었다면 감정없고
잔인한 카메라가 그것을 잡아내지 않았을 리가 없으니까 말이다.
혼자 걷다가 바위 사이로 사라져 화면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때 그 장면은
끝난다.죽는 것은 아무도 보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그 펭귄이 살아서 그들의 땅까지
갔을 거라고 스스로 위안해 보는 것이다.

황제 펭귄들은 무리지어 이동한다. 재미있는 것은 열에 한 둘은 걷다가 눈밭
에 배밀이를 하며 썰매타듯 미끄러지다가 또 일어나서 걷곤 한다는 것이었다.
아무도 걷지 않고 배밀이를 하는 펭귄을 나무라지 않았다.
누가 순서를 정해준 것도 아닌데 알아서 오모크까지 이동하는 펭귄들은 어찌
보면 좀 획일적이다. 그러나 그들의 걷는 모습을 보면 무척 자율적이다.
목표를 위해 동시에 움직이지만 그 방식은 비슷하면서 조금씩 다른 것이다.
이것이 자연의 법칙이고 인간에게도 다르지 않을 법칙일 것이다.
또 펭귄들은 안락한 동물원을 모른다. 그러나 그래서 더욱 그들의 거친 삶이
의미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삶이 고되더라도 동물원을 꿈꾸는 인간은 되고 싶지 않다.

알을 품었다가 놓쳐서 발을 동동 굴러 보지만 이미 그 알 속의 아기는 죽었다.
소중히 품기도 하고, 먹이를 구하러 갈 때는 아빠 펭귄에게 인계하기도 한다.
알에서 깨어난 아기들은 조금씩 자라면서 어른들이 하는 대로 모여서 추위를
피하고 또 그렇게 살아간다.

아무튼 이들은 어른이 되면 또다시 오모크로 모여들어 자신들의 부모가 했던
과정을 되풀이 할 것이다. 그 과정은 고생스럽다.
추위가 몰아닥치고 혹독한 찬바람이 퇴화된 날개밑 연미복 속으로 파고들 때면
대열에서 낙오하는 것으로 단번에 고통을 끝낸 동료가 오히려 부러울 정도다.
그들은 왜 할까... 우리는 왜 하는 것일까...
생선 한 조각을 위해서? 몇 푼의 돈을 위해서?
그들의 삶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인생의 법칙이 아닐까 싶다.
하나님이 펭귄을 창조하실 때 나중에 누군가 저들의 삶을 담아 인간들에게 보
여주어 무언가 깨닫게 하려 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조차 든다.

우리 삶의 본질이 펭귄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지만 우리는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에겐 하나님이 주신 날개가 있다.
언제부턴가 쓰지 못하는 날개지만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그것을 인식하는 순
간 우리는 세상을 날아다닐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문화 명령을 완수할 책임과 사명과 권한이 있는 귀한 존재니까.
그리고 그 황제 펭귄들이 상상할 수도 없는 인간들의 문명사회가 분명히 존재
하듯이 우리에게도 상상조차 못할 위대한 땅이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것을 인식하게 될 때 잃어버렸던 우리의 날개도 찾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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