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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민들레 홀씨> 제132호: 회개는 비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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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호 / 2004 년 12월 12일 발행 (부정기
욥 42:1-6 막 1:14-15

1. 참회로서 회개

연말이 되면 연말정산 서류들을 준비하게 된다. 더 낸 게 있으면 받아내고 덜 낸 게 있으면 더 내야 한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결산을 하고 묵은 것을 털어버리고 새로운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하려고 한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결산할 게 있으면 하고 털어버릴 게 있으면 털어버려야겠다. 대림절 기간이야말로 신앙의 연말정산 기간이라고 생각하면 좋겠다. 신앙의 연말정산은 무엇인가? 그것은 회개다.

어떤 목사님이 대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기독교를 안내하는 과목을 가르쳤는데, 한번은 시험문제에 회개에 대해서 쓰라고 했더니 다들 ‘회개’를 ‘회계’로 썼다고 한다. 처음에는 정말 교회에 대해서 기초도 모르는구나 하고 탄식을 했는데, 한참 있다가 문득 어떤 깨달음이 왔다고 한다. 결국 회개라는 것도 알고 보면, 빚진 사람이 돈 빌려 준 사람에게 낱낱이 셈을 치르듯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의 ‘회계’를 맞춰보는 것 아니겠느냐는 깨달음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회개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지난날의 삶을 돌이켜보면서 잘못한 것을 뉘우치고 반성하고 새 출발을 하는 것이다.

구약성서에서 대표적인 예는 다윗이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탐하여 데려다가 아내를 삼고, 그 죄를 은폐하려고 하다가 우리아까지 죽이는 죄를 범하였다(삼하 11). 왕권이 저지른 범죄였다. 그 누구도 감히 그것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없었고 그의 죄는 흙이 눈에 덮이듯 덮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예언자 나단이 그의 죄를 고발하였을 때 다윗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고, 나단 앞에서 "내가 주께 죄를 지었습니다."(삼하 12:13) 하고 고백을 하였다. 시편 51편은 다윗이 이때 지은 시로 알려져 있다.

하나님, ... 2 내 죄악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내 죄를 깨끗이 없애 주십시오. 3 내 반역죄를 내가 잘 알고 있으며, 내가 지은 죄가 언제나 내 앞에 있습니다. 4 주님께만, 오직 주님께만,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 (시 51:1-3)

다윗은 뒤늦게라도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살았기 때문에 역사 속에서 좋은 평을 받을 수 있었다.

다윗은 주께서 보시기에 올바르게 살았고, 헷 사람 우리아의 사건 말고는, 그 생애 동안에 주의 명령을 어긴 일이 없었다.(왕상 15:5)

신약성서에 오면 세례 요한의 회개 운동이 두드러진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였다(마 3:1). 그는 사람들에게 그러니 회개하라고 하면서 세례를 주었다. 사람들에게 형식적인 회개에 그치지 말고 회개에 알맞는 열매를 맺으라고 하였다.

(무리에게)...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 (세리들에게) "너희에게 정해 준 것보다 더 받지 말아라." (군인들에게) "남의 것을 강탈하거나 거짓 고발을 하지 말고, 너희의 봉급으로 만족해라.(눅 3:11-14)

세례 요한이 촉구한 회개 운동은, 그저 감정적으로 눈물 찔끔거리는 그런 형식적인 회개가 아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나누는 실천을 촉구하고 있다. 특히 세리와 군인들은 당시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착취하고 억누르던 자들이다. 그들에게 그런 죄악을 끊는 행동이 없으면, 성전에 와서 제물을 바치고 회개를 해도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2. 돌아섬으로서 회개

세례 요한의 회개는 실천을 강조하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는 일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런 점에서 세례 요한의 회개는 과거지향적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비해서 예수의 회개는 전혀 새로운 차원을 갖는다.
오늘 읽은 마가복음 본문은 예수의 선교와 선포를 요약하는 말이다.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막 1:14-15)

예수의 선포는 세례 요한의 선포와 아주 비슷하다. 하지만 세례 요한의 회개와 예수의 회개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세례 요한이 회개를 촉구할 때는 심판을 강조하였다.

요한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말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다가올 징벌을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놓였다. 그러므로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눅 3:7-9)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혼인 잔치나 어떤 사람이 베푼 큰 잔치에 비유하였다. 큰 잔치의 비유(눅 14장)에서 사람들의 과거의 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보다는, 지금 주인의 초청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가 중요하다. 여기에서는 굳이 죄를 따진다면 그것은 도덕적 의미의 죄가 아니다. 주인의 초대를 거절하는 것이 죄다.

이와 같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앞에서 죄의 의미는 전혀 달라진다. 그것은 새로운 세계로의 초대를 거절하는 것이 죄다. 그렇다면 회개의 의미도 역시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제 회개는 과거의 죄를 참회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초대에 응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열어주신 하나님 나라의 초대에 자기를 개방하는 것이다.

세례 요한의 회개가 과거 지향적이라면, 예수의 회개는 미래 지향적이다. 그것은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초대 앞에서 우리가 자신을 새로운 세계에 개방하는 것이다. 다윗과 세례 요한의 회개가 참회로서 회개라면 예수의 회개는 방향전환, 곧 돌아섬으로서 회개이다. 실제로 회개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슈브(Shuv)나 그리스어 에피스트레포, 휘포스트레포(epistrepho, hypostrepho)는 모두 돌아서다(turn)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의 회개는 참회를 함으로써 기존의 질서와 가치 체계로 돌아가 정착하는 것이 아니다. 기존의 것, 정착해서는 안 될 것에 정착하여 거기에서 안전 보장을 구하는 상태에서 탈출하는 행동이다. 이런 회개는 필연적으로 역사의식을 동반한다.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의식, 그리고 안전을 보장하는 기존의 것에서 과감히 벗어나서 하나님 나라의 초대에 응하는 것은 역사의식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여기에서 일반 종교에서 말하는 회개와 기독교의 회개의 결정적 차이가 있다. 일반 종교에서 말하는 회개에는 윤리적 참회만 있지 역사의식은 없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에, 자신을 돌아보아야겠다. 정말 내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믿고 주님의 초대 앞에서 새로운 세계로 자신을 개방했는지 물어보아야겠다. 바로 그 점에서 결산하고 회개하여 예수께로 진정으로 방향을 전환해야겠다.

3. 자기 비움으로서 회개

이런 두 가지 회개와는 또 다른 차원의 회개가 있다. 그것은 욥기에 나타나는데 ‘자기 비움으로서 회개’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회개라고 하면 ‘회개하지 않으면 벌(심판)을 받는다’는 권선징악의 사고가 깔려 있다. 그런데 권선징악이나 <해피엔드>라고 하는 것은 동화나 드라마 속에서 이야기지 현실에서는 전혀 그런 것이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 전도서나 욥기 같은 데 이런 것이 자주 나온다.

“나는, 악한 사람들이 죽어서 무덤에 묻히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사람들은 장지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 악한 사람들을 칭찬한다. 그것도 다른 곳이 아닌, 바로 그 악한 사람들이 평소에 악한 일을 하던 바로 그 성읍에서, 사람들은 그들을 칭찬한다. 이런 것을 보고 듣노라면 허탈한 마음 가눌 수 없다. 사람들은 왜 서슴지 않고 죄를 짓는가? 악한 일을 하는데도 바로 벌이 내리지 않기 때문이다. 악한 사람이 백 번 죄를 지어도 그는 여전히 살아 있다”(전 8:10-12).

“7 어찌하여 악한 자들이 잘 사느냐? 어찌하여 그들이 늙도록 오래 살면서 번영을 누리느냐? 8 어찌하여 악한 자들이 자식을 낳고, 자손을 보며, 그 자손이 성장하는 것까지 본다는 말이냐? 9 그들의 가정에는 아무런 재난도 없고, 늘 평화가 깃들며, 하나님마저도 채찍으로 치시지 않는다.”(욥 21)

이런 생각에서 사람들은 회의에 빠진다. 삶이 헛되고, 회개니, 용서니, 역사니, 정의니 하는 것이 모두 다 헛되다고 말하기도 한다.

회개 무용론을 주장하는 또 다른 사람은 자기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이를테면, 나는 모태신앙으로, 평생 동안 착하게 살아왔고 누구에게 부끄러운 일을 한 적이 없고, 처음에 입교할 때는 회개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지만, 요즘 와서는 그다지 회개할 만큼 죄에 빠진 적이 없다는 것이다. 회개가 하나님 나라를 향한 개방이요 돌아섬이라 하더라도, 지금까지 그렇게 하나님 나라 앞에서 살아왔고 좋은 방향으로 달려왔기에 후회도 회개도 필요 없다는 것이다.

구약성서에 꼭 이런 사람이 있는데 그가 바로 욥이다. 하나님이 욥을 시험하여 그가 가진 것을 모두 빼앗고 건강까지도 잃게 하고, 겨우 목숨만 붙여 놓고 극심한 고통 속에 살게 하였을 때, 욥의 친구들은 뭔가 잘못을 했으니 벌을 받는 게 아니냐면서 회개를 촉구한다. 그러나 욥은 자신의 의로움을 길게 변호한다. 그는 자신이 가난한 사람들과 고아를 돌보았고, 고난 받는 사람과 함께 울었고, 다른 사람을 속이지 않았고, 남의 아내를 탐내지 않았고, 우상을 숭배하지도 않았고, 재산을 믿고 거만하지도 않았고, 나그네를 잘 영접하였다고 한다(30-31장).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기 자신에게서 죄를 찾을 수 없고 벌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욥에게 하나님은 폭풍이 몰아치는 가운데 말씀하신다. 오늘 읽은 <예배에로의 부름>은 그 시작 부분이다.

3 이제 허리를 동이고 대장부답게 일어서서, 묻는 말에 대답해 보아라. 4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거기에 있기라도 하였느냐? 네가 그처럼 많이 알면, 내 물음에 대답해 보아라. 5 누가 이 땅을 설계하였는지, 너는 아느냐? 누가 그 위에 측량줄을 띄웠는지, 너는 아느냐? 6 무엇이 땅을 버티는 기둥을 잡고 있느냐? 누가 땅의 주춧돌을 놓았느냐? ... 8 바닷물이 땅 속 모태에서 터져 나올 때에, 누가 문을 닫아 바다를 가두었느냐? .... (욥 38장)

놀랍게도 하나님은 욥에게 죄가 있는지 없는지, 회개할 것이 있는지 없는지, 그가 받는 벌이 합당한 것인지 아닌지, 그런 것을 따질 뜻이 없는 것 같다. 하나님은 욥이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들을 길게 말씀하신다. 그건 이 세상의 창조, 바다와 육지의 창조, 바람과 구름과 천둥과 번개 그리고 별과 별자리들, 짐승들이 새끼를 낳게 하고 그것들을 먹이는 일, 심지어 말이 앞발길질을 하고 콧소리를 내는 것까지, 독수리가 높은 곳에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까지 일일이 말씀하신 다음에 이렇게 말씀하신다.

“전능한 하나님과 다투는 욥아, 네가 나를 꾸짖을 셈이냐? 네가 나를 비난하니, 어디, 나에게 대답해 보아라.”(욥 40:2)

이제 욥이 하나님께 대답한다.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욥 42:5-6)

여기에서 욥의 회개는, 과거의 잘못에 대한 참회로서 회개도 아니고, 새로운 세계로 돌아섬으로서 회개도 아니다. 그것은 이 세상을 지으시고 나를 지으신 분 앞에서 나의 의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태양 앞의 티끌과도 같은 것임을 느끼는 데서 오는 감동이요 두려움이다.

악한 사람이 이 세상에서 벌을 받지 않는다고 하는, 앞의 전도서와 욥기의 구절들이 약간 허무주의적인 느낌을 준다면, 욥의 이러한 기도는 자기를 비우는 겸허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여태까지 놓지 못했던 자기 의를 마침내 놓아버리고, 자기를 비워버리는 데서 찾는 새로운 자아이다. 욥은 지금까지 주님에 대해 귀로만 들었다고 한다. 회개니 뭐니 하는 것이 머릿속에서만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눈으로 뵙는다고 한다. 실제로 계시나 환상을 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기 의에서 벗어나니까, 자기를 비우니까, 비로소 대자연 속에서 일상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참회로서 회개도 좋지만, 그것은 한계가 있다. 이제는 용서받았다는 안심, 회개하지 못한 사람에 대한 무시, 또 다시 죄에 빠지면 어쩌나 하는 불안이 우리를 사로잡을 수 있다. 방향전환으로서 회개도 좋다. 그러나 제대로 전환하지 못하고 합당하게 살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자책, 후회가 끊이지 않고, 현실 타협에 대한 부끄러움이 우리를 놓아주지 않을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참회‘해야 한다’거나 방향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 회개를 하나의 의무로 만들어서 구속하고, 또 그런 회개의 필연성이 다른 사람을 구속하거나 정죄하는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회개하고 내가 의로워지겠다는 집착, 또는 누가 뭐래도 나는 의롭다고 하는 교만을 비울 때 비로소 “이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하는 욥의 고백을 우리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두 여자가 장로에게 가르침을 받으러 찾아왔다. 한 여자는 자신을 큰 죄인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젊었을 때 남편을 배신하고, 그것 때문에 줄곧 괴로워하고 있었다. 또 한 여자는 한평생 율법을 지키며 이렇다할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자신에게 만족하며 살고 있었다.

장로는 두 여자에게 지금까지 살아온 것에 대해 여러 가지를 물었다. 한 여자는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의 죄를 고백했다. 그녀는 자신이 저지른 죄를 참으로 크다고 생각하고 아예 용서를 바라지도 않았다. 그런데 또 한 여자는 이렇다 할 죄를 저지른 기억이 없다고 말했다. 장로는 먼저 첫 번째 여자에게 말했다. “울타리 밖으로 나가 당신이 들 수 있는 한 큰 돌을 찾아가지고 오시오.” 그리고 큰 죄를 저지른 적 없다는 여자에게, “그대는 가능한 한 많은 돌을 가져오되 작은 돌만 가져오시오.”
여자들은 장로가 시키는 대로 했다. 한 여자는 큰 돌을 한 개 가져오고 다른 여자는 작은 돌을 가득 채운 자루를 하나 가지고 왔다.
장로는 그 돌을 보고 여자들에게 말했다.
“이번에는 가지고 온 그 돌을 다시 가지고 가서 제 자리에 놓고 오시오.”
여자들은 장로가 명령한 대로 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첫 번째 여자는 돌이 있었던 곳을 금방 찾아내어 그것을 제 자리에 놓았다. 그러나 다른 여자는 어디서 어떤 돌을 주웠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아서 시키는 대로 하지 못하고 다시 장로에게 되돌아왔다.
장로가 그녀에게 말하였다.
“자, 죄라는 것도 그와 같소. 저 여인은 자신이 어디서 그 돌을 주웠는지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크고 무거운 돌을 쉽게 제 자리에 가져다 놓을 수 있었고, 그대는 어디서 그 많은 작은 돌을 주웠는지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거요. 죄의 경우도 마찬가지요. 저 여인은 자신의 죄를 기억하고 남들의 비난과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겸허하게 견뎌냈기 때문에 죄의 결과에서도 해방될 수 있었던 거요.
그런데 그대는 작은 죄를 많이 짓고도 그것을 기억하지 못해 후회하기는커녕, 죄의 생활에 익숙해져서 오히려 남의 잘못을 비난하면서 스스로 점점 깊은 죄에 빠졌던 것이오.”

이것은 우리 모두 죄인이며 회개해야 한다고 가르치기 위해 톨스토이가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난 이것이 자기 의를 고집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이야기가 될 것이라 믿는다.

회개할 것이 없는 사람은 없다. 다만 자기 의로 자신을 가득 채워서 도무지 주님이 들어오실 공간이 없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저 하나님 앞에서 홀로 선 존재로서 하늘의 별을 보다가, 아름다운 초원과 대지를 보다가, 높은 산에 올라서 세상을 보다가 뭔가 거룩한 것에 압도당하여 자기도 모르게 기도를 하고 눈물을 흘리는 경험을 한 적이 있지 않은가. 그저 존재 자체가 신비롭고, 그저 이렇게 살아 숨쉰다는 자체가 은혜롭다는 생각, 거기에 생각이 미치면 내가 너무나 많은 욕심과 불평과 불만과 온갖 억압과 콤플렉스와 한탄과 불안으로 채워져 있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우리 영혼의 집에 미처 치우지 못한 쓰레기와도 같은 것이다. 집의 청소를 해도 해도 쓰레기가 나오듯이 우리 존재도 그렇다. 늘 이런 것들이 어지럽혀져 있다. 우리가 그것을 깨끗이 비워야 한다. 비워야 한다는 의무감까지도 버려야 한다. 그런 빈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수 있다.

그 빈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환하게 빛나서 진정한 평화와 행복 그리고 영원한 기쁨을 맛보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주님,

대림절 셋째 주일을 맞이하여
세 개의 촛불을 밝혔습니다.
우리 마음에도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촛불이
환하게 빛나게 하소서.
한 해를 돌아보며
우리의 잘못을 진심으로 회개합니다.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며 살고
형제자매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나의 의로움만 내세우며
형제자매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나라가 임하옵기를 기도하면서도
오시는 나라 앞에서
우리의 삶을 돌이키지 못했습니다.
우리 자신은 늘,
세상 염려와 걱정으로
자기 의로움과 의무감으로
다른 사람에 대한 판단과 정죄로 가득 차서,
주님의 촛불을 밝힐 공간이 없었습니다.
이제 우리 잘못을 회개합니다.
욥처럼 우리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의 빈 마음에
주님의 빛이 환하게 빛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낙산교회 04.12.12 주일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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