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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민들레 홀씨> 제136호: 그리스도의 몸

첨부 1



136호/2005.1.18 발행처: 민들레성서마을 발행 및 편집인: 김재성  

그리스도의 몸


고전 12:12-31


1. 한 성령으로 세례 받고 한 성령을 마심

고린도교회는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많았지만, 각각 자기가 받은 은사만 내세우고 서로 화합하지 못했기에 바울은 고전 12:1-10까지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이어서 오늘의 본문인 ‘그리스도의 몸’ 또는 ‘하나의 몸과 많은 지체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서두에서 바울은,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다고 말문을 꺼낸다. 즉 그는 여기서 일반적인 신체 구조나 원리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말하려고 한다. 서두부터 파격적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천상의 영역에서 찾지 않고 오늘 우리 가운데서 찾고 있다. 우리가 지체들이라면 그것들이 하나의 몸을 이루는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라고 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유대 사람이든지, 그리스 사람이든지, 종이든지, 자유인이든지,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서 한 몸이 되었고, 또 모두 한 성령을 마시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바울은 이런 은유를 자주 사용하곤 한다. 바로 앞 10장에서도 출애굽 사건 때에 모세가 바위를 지팡이로 쳐서 물이 나오게 한 일을 두고, 자신의 조상들이 모두 똑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고 신령한 물을 마셨다고 한다. 그것은 그들의 동반자인 신령한 바위로부터 물을 마신 것이고, 그 바위는 그리스도였다고 한다(고전 10:1-4). 이것은, 크리스천은 같은 걸 먹고 마신, 한 근원에 잇대어 사는 존재들임을 강조하기 위한 은유이다. 한 우물의 물을 먹는 사람은 한 동네 사람이요 공동체라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한 성령에서 마신 사람, 그리스도라는 한 바위로부터 물을 마신 사람은 저마다 출신과 신분이 달라도 심지어 국적과 인종이 달라도 한 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기초 원리를 알 수 있다. 그것은 우연하게 모인 사람들의 친목 단체가 아니다. 우리가 한 식구 한 공동체임을 말할 때 흔히 “한 솥 밥 먹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쓰곤 한다. 먹는 게 중요하다. 특히 같은 데서 나는 것을 함께 먹는 게 중요하다. 교회는 한 솥 밥 먹는 사람들인데 그 밥이 그냥 밥이 아니라 말씀의 밥이요, 한 우물 먹는 사람들인데 그 물이 그냥 물이 아니요 성령이며, 한 바위에서 마신 사람인데 그 바위가 바로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이 경험이 없이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정체성을 가질 수 없다.

우리가 한분 그리스도로부터 마시고 한분 성령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마신다는 것은, 물론 건물이 없이도 할 수 있지만, 이렇게 교회가 있고 센터가 있을 때 훨씬 더 우리 마음에 와 닿게 깊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낙산교회가 이 건물에서 예배하는 것은 우리가 깨닫기만 한다면 매우 소중한 의미가 있다. 우리 자신에게 센터가 생긴 것이다. 샘물이 솟는 샘이 생긴 것이다. 이제 늘 자주 이곳에 와서 함께 마시고 배부르고 즐거워하는 체험이다. 교회에서 먹고 마시는 체험이 없이는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고 말할 수 없고 그리스도의 몸을 이룰 수도 없다. 먼저 이곳에 와서 어울리는 체험이 필요하다.

이렇게 해서 교회는 그리스도를 만나고 성령을 체험하는 센터가 되어야 한다. 그때에 비로소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것이다. 그때에 우리 삶에 필요한 생명의 양식을 공급해 주는 근원이 될 수 있다. 난 교회가 샘이라는 은유가 참 좋다고 생각한다. 조금 달리 표현하면 발전소 같은 것이다. 우리가 그곳에 연결되어 있어야 살 수 있다. 오늘날 도시생활에 익숙한 현대인들은 교회를 이런 샘이나 발전소로 생각하지 않고 슈퍼마켓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값싼 물건을 파는 곳이면 언제나 다른 슈퍼로 갈 수 있듯이, 교회도 언제나 필요에 따라서 그렇게 옮길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게 하면 할수록 우리의 삶이 공허해지고 허약해진다. 샘의 근원에서 멀어진 나무가 건강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우리 믿음의 근원을 무한히 솟아나는 샘에 두어야겠다. 잠시 문을 열었다가 닫기도 하는 수퍼마켓이나 구멍가게 같은 데 두어서는 안 된다.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 교회 자리에 유전이라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겠는가. 오색약수터 같은 약수터가 있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물통 들고 달려올 것이며, 금세 호텔 짓고 관광지를 만들고 그러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리스도 반석에서 나는 샘물 성령에서 마시는 샘물이 유전보다 못한가? 오색약수터보다 못한가? 그것보다 훨씬 더 귀한 것 아닌가? 문제는 우리가 그런 자부심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자부심과 한 뿌리 의식으로 먼저 하나가 되지 않으면 개인도 공동체도 힘을 얻을 수 없고, 주위 사람들도 우리를 이상한 사람들로 볼 것이다. 누가 이 동네에 멋진 건물 지어놓고 하는 일 없이 일주일에 한번씩 모이기만 한다고 소문이 날지도 모른다. 주님이 이 귀한 선물을 낙산교회라는 반석, 이 샘물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 우리 과제다.

2. 그리스의 몸을 이루는 대원칙

그렇게 하나 된 경험에서 출발한 고린도교회였지만 교우들 간에 심한 분열이 생겼다. 그것은 빈부격차, 배우고 못 배운 사람 사이의 갈등 같은 것이 원인이 되었겠지만, 바울은 그것을 지체들이 서로 무시하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저 서로 다르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배운 사람이 못 배운 사람을 무시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발이 말하기를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속한 것이 아니다”고 하고 또 귀가 말하기를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속한 것이 아니다”고 항의를 하는 것이다. 발보다 손이 대접받고 귀보다 눈이 더 대접받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니까 발이, 귀가 화가 난 것이다. 바울은, 온몸이 다 눈이라면 어떻게 들으며 또 온몸이 다 귀라면 냄새는 어떻게 맡겠느냐고 하면서 약한 지체를 달래는 말을 하고 있다. 눈만 중한 게 아니라 귀도 중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몸에서 눈이 둘이 있어야 보기 좋지 귀의 자리나 코의 자리에 눈이 있다면 징그러운 괴물이 될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서로 다른 지체를 두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전체가 한 지체로 되어 있다고 하면, 몸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고 묻는다. 즉 바울에게서 그리스도의 몸 개념은 서로 다른 지체들이 하나를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것은 이른바 “짬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데는 원칙이 있는데, 그것은 눈이 손에게 말하기를 “너는 내게 쓸 데가 없다” 할 수가 없고, 머리가 발에게 말하기를 “너는 내게 쓸 데가 없다”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몸 가운데서 더 약하다고 여기는 지체가 오히려 더 요긴하며, 몸 가운데서 덜 귀하다고 생각하는 지체들을 더욱 귀한 것으로 입히고, 볼품없는 지체들을 더욱더 아름답게 꾸며 주는 것이 지체가 하나가 되는 대원칙이다.

2000여 년 전에,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Seneca)는 이런 비유를 말한 적이 있다. “당신이 보고 있는 이 모든 것은 다 하나이다. 우리는 한 거대한 몸의 지체들이다.” 또 다른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투스(Epictetus)도 이와 비슷한 비유를 든 적이 있다. “당신은 세계의 시민이며 세계의 한 부분이다. 누구든지 이성을 갖고 있고 자연의 질서를 이해한다면 손이나 발이 하는 것과 같이 행동하여야 한다.”

당시의 사회는 황제, 귀족, 평민, 그리고 노예가 피라미드 구조를 이루고 있는 고대 노예제 사회이다. 이런 사회 속에서 귀족이나 평민이나 노예가 모두 다 전체로서 하나의 몸을 이루는 지체라고 하는 것은 매우 파격적이며, 낮은 계층의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적어도 말 자체는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나 같은 말이라도 누가 누구에게 어떤 의도로 하느냐에 따라서 그 의미가 판이하게 달라진다. 이러한 말을 한 철학자들의 진정한 뜻이 무엇이었든 간에, 로마의 통치자들은 이와 같은 ‘몸과 지체의 비유’를 가지고 자신들의 통치를 합리화할 수 있었다. 그들은 불만이 가득한 평민들과 반항심이 가득한 노예들을 이렇게 설득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귀족이든 평민이든 노예이든 다 같은 지체이며 전체로 한 몸을 이룬다. 그러니 여러분이 우리를 위하여 열심히 일하고 봉사하면 그것이 곧 여러분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B.C. 494년 경 메네니우스 아그립바(Menenius Agrippa)는 당시에 유행하던 ‘몸과 지체의 비유’를 이런 식으로 사용하여 불만 계층을 설득하였다고 한다.

이런 구호들에서는 ‘우리는 하나’라는 것이 허울 좋은 것이고 그 내용에 있어서는 오히려 약한 사람들의 불만을 무마시키는 거짓 이데올로기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저 아무런 원칙 없이 ‘우리는 하나’라고 외치는 것은 속임수일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원칙을 분명하게 한 것이다. 강한 지체가 약한 지체를 향하여 쓸데가 없다고 말할 수 없고, 약한 지체를 더 돌보아주고 볼품없는 지체를 더 화려하게 입혀야 한다는 원칙이다. 이것은 세상 원칙과 반대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IMF 이후로 정리해고니 명퇴니 하면서 이 사회가 견지하고 있는 원칙이라는 것은 약자를 희생해서 강자들 소수가 잘 살자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가 아무리 하나라고 외쳐도, 또 아무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고 외쳐도 공허한 소리로 들릴 뿐이다.

TV에서 <동물의 왕국> 같은 프로를 재미있게 보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사람들은 사자가 영양을 물고 늘어지는 그 적나라한 장면을 보면서 은근히 대리만족을 느끼고 인간도 본성에서는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법칙을 따르는 존재라는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자도 배가 부르면 양과 같이 물을 마시면서도 양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고 한다. 지렁이 같은 것은 생태계의 파수꾼으로 알려져 있고 동물들 가운데 평화롭게 사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사자나 표범이 양을 물고 늘어지는 그런 특수한 장면을 자연의 법칙인 양 확대하고 은연중에 인간도 그렇게 살아도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크나큰 착각이다.

최근에 특히 87년대 이후로 시민사회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것은 바람직하다. 대개 약한 자들 이 사회가 소외시키고 있는 자들, 말도 못하고 소외당하고 파괴당하고 있는 환경, 이런 것을 위해서 정부도 아니고 재벌도 아닌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로 이루어진 조직들이 약자를 위해 소외된 자를 위해 활동하면서 강자에게 섬김과 부자에게 나눔을 촉구하는 것은 교회가 할 일을 대신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교회에도 이런 일을 선구적으로 해오고 계신 분들이 많다. 에큐메니컬 운동의 선구자이신 김관석 목사님을 비롯하여, 월드비전을 이끌어 오신 오재식 교우, YMCA, 지구촌나눔사랑운동을 이끌어오신 강문규 교우, 시민운동과 환경운동의 각 분야에서 활동하고 이론을 뒷받침하시는 이시재 교우가 있다. 이 사회가 늘 가진 자 기득권 자 편을 드는 것으로 오랫동안 나타났지만, 이제 이런 시민사회운동이 활발하고 그들의 영향으로 정부도 복지나 중소기업을 위한 정책들로 전환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분명 이전에 비해서 많이 달라지고 있다. 사회가 이렇게 변해가고 있는데 교회가 오히려 그것을 따라가는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된다. 앞장서서 가야겠다.

이제 각자의 삶의 터전에서뿐 아니라 이 낙산 센터에서 이런 역량을 모으고 집중하여야 할 때다. 우리 교회가 이런 일들을 잘 하는 센터가 되어야겠다. 먼저 우리 자체 안에서 약한 지체들을 돌보고 그들을 더 존귀하게 대접하고 아름답게 꾸미는 것은 물론, 우리 사회 속의 약한 지체들을 돌보는 일을 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지난번 여신도 총회에서 나온 이야기는 참으로 귀하다. 우리 교회가 속한 동숭동이 그 어디보다 교육에 취약한 곳이고, 우리 교회에는 우수한 선생님들이 많으므로 방학 같은 때에 무료로 영어, 일어... 등등을 가르치는 학교를 열자고 제안하였다. 오는 부활절 창립기념주일에는 여신도들이 음식을 만들어서 온 동네 사람들을 초대하여 함께 잔치를 벌이고, 또 바자회를 열어 돕자는 제안도 나왔다.

또 지난번 실행위원협의회에서는 지난번 불우이웃돕기에 교우들이 참여한 헌금에 선교헌금을 더하여 동숭동 지역의 독거노인들을 돕되 일회성 행사로 하지 말고 일년 중 3-4회라도 지속적으로 돌보는 일을 하자고 제안하였다. 우리 교회가 이 지역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길은 바로 이런 일에서 시작하는 것이 옳다. 이 지역의 약한 지체들을 일으켜 세우고 강하게 하는 것이 우리 교회에게 주어진 중요한 사명일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원칙이다. 우리 사회처럼 강한 자에게 약한 자가 굽히고 강한 자가 약한 자의 것을 빼앗는 것이 아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굽히고 부한 자가 가난한 자에게 나누고 그래서 몸에 분열이 생기지 않고, 지체들이 서로 같이 걱정하게 하는 시스템이다. 26절에 말한 대로,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모든 지체가 같이 고통을 당하고,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하는 운명공동체이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지체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이번에 남아시아 지진이 일어났을 때 첨단 정보력을 갖춘 미국은 어느 정도 그 사실을 미리 안 모양이고 그 근처 주둔하는 미군들에게는 알려줘서 대피하라고 했다고 한다. 그랬다면 왜 인도네시아 같은 데 급히 정보를 주어 대피시키지 않았는가. 몇 년 전에 미군이 아프가니스탄 공습을 할 때 미국인 선교사들에게만 대피하라고 미리 알려주었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이 얼마나 마음이 황폐해진 것인가. 아프가니스탄,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죽든 말든 자기들만 살면 된다는 마음 아닌가.
크리스천들도 이렇게 황폐한 마음들을 따라가고 있다. 서울의 수천 명 모이는 어느 유명한 교회 목사는 이번 남아시아 사람들의 그런 재난이 예수를 안 믿어서, 기독교를 박해해서 당한 재난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그곳에 와서 참사를 당한 유럽 사람들에게는 성탄절을 교회에서 안 지키고 그런 휴양지―그 목사 말로는 마약이나 하는 문란한 지역―에서 보내니 벌을 안 받을 수 있느냐고 한다. 이런 식으로 그저 자기들만 잘 믿어서 재난이 있을 때 피하고 무사하면 된다고 하는 사고는 크리스천의 사고가 아니다. 그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 사람들의 생각이 아니다.

3. 몸만이 품을 수 있다

여신도총회에서 예수께서 자신을 암탉이 병아리를 품는 것에 비유하신 것을 이야기하면서 예수님 따라서 교회를 품는 여신도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설교하였다.

이것을 몸과 지체의 비유에 적용해도 좋을 것 같다. 사람이 표현할 수 있는 몸짓 가운데서 포옹보다 더 아름답고 따뜻한 것은 없을 것이다. 짐승들이 못하고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포옹은 우리말로 하면 품어주는 것이다. 품는 것은 몸으로만 할 수 있다. 지체로는 할 수 없다. 예를 들어서, 손만으로, 가슴만으로, 팔만으로, 머리만으로 우리는 누구를 품을 수 없다. 하지만 그 모든 지체들이 합력할 때 팔로 안으면서 손으로 등을 다독이고 가슴으로 따뜻하게 품어주고 볼을 부빌 수 있는 것이다. 지체들이 이렇게 아름답고 따뜻한 행동을 하게 하는 것은 지체들을 하나가 되게 하는 사랑이요 마음이다. 그 마음이 있을 때 지체들은 각각 다르지만 하나가 되어 누군가를 품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한 사람을 품을 때는 우리 한 사람의 몸으로 되지만, 더 넓은 지역 더 많은 사람들을 품으려고 할 때는 우리 전체가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되어서 하나의 몸을 이룰 때만 할 수 있다. 우리 혼자서는 감히 생각도 못할 일들을 우리가 이 낙산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룰 때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다.

여러분이 예배하고 있는 이곳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다. 많은 사람들이 와서 마시고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그리스도의 반석, 성령의 샘물이 되도록 우리가 모두 힘을 모아야겠다. 우리 안에 아직 일치하지 못하는 게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일치하게 하는 길은 회의를 많이 하는 것이 아니다. 모두가 한 근원에서 먹고 마시는 경험이 없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경험이 없이 그렇게 하나 되는 경험이 없이는 아무리 우리가 회의를 거듭하고 논쟁을 거듭해도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의 모습 이상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이 소중한 그리스도의 몸을 그저 자기들끼리 모여 예배만 드리고 흩어지는 작은 암자로 만들 것인지, 수많은 사람들이 와서 생수를 마시고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그리스도의 몸, 그리스도의 센터로 만들 것인지는 우리 손에 달려 있다. 성령께서 우리 모두의 마음을 부드럽게 해 주셔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 이곳에 그리스도의 센터 그리스도의 반석 성령의 샘물이 솟아나게 하는 주님의 일꾼들 되기를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한다.(낙산교회 05.1.16 주일예배 설교)


결단의 기도:

주님,
우리를 사랑해 주셔서
그리스도의 반석에서 나오는 샘물을 마시게 하시고
한 성령을 마시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한 우물의 물을 마신 우리, 한솥밥을 먹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소서.
눈이 잘나도 귀가 없으면 소용없고
귀가 잘났어도 코가 없으면 안 됩니다.
보잘것없어 보이는 지체가 더욱 소중한 지체입니다.
약한 지체를 가장 소중하게 여김을 받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게 하소서.
내가 누군가를 두 팔로 끌어안을 때
더 이상 내 손은 나를 돌보지 못합니다.
지체들만 따로 있으면 근육운동을 할 뿐이지만
지체들이 누군가를 끌어안을 때
사랑의 품을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 낙산공동체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품을 이루게 하소서.
성령의 샘물이 솟아나는 그리스도의 반석을 이루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마시는
그리스도의 센터가 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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