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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민들레 홀씨> 제139호: 예수의 퍼포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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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호/2005.2.2  발행처: 민들레성서마을 발행 및 편집인: 김재성  


예수의 퍼포먼스  막 9:33-37

1. 길에서...

예수께서 수난 예고를 하신 다음에도 제자들은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여전히 길에서 누가 더 크냐 하는 것으로 싸움을 벌였다. “길에서” 그랬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차분하게 토론을 한 것이 아니라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사람들 앞에서 창피한 모습을 드러냈다는 뜻이다.

이것은 꼭 제자들을 비판하는 말만은 아니다. 이미 초대교회 상황에서 교회들이 서로 경쟁하고 신자들이 서로 경쟁하면서 세상 사람들과 다름없이 행동하려고 하는 세태를 비판하는 의미도 있다 하겠다. 다시 이것은 오늘날 그저 경쟁을 부추기면서, 내가 더 크다, 내가 더 많다, 내가 더 잘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의미도 된다.

2. 첫째가 되려고 하면...

예수는 그런 제자들에게 전혀 다른 질서, 가치를 제시한다. 첫째가 되려고 하면 전력질주하여 맨 앞으로 나가야 하는데 오히려 꼴찌가 되라고 한다.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한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여전히 “첫째가 되려면”이라는 단서가 있다는 것이다. 꼴찌가 되고 섬기는 것도 여전히 첫째가 되기 위한 것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우월주의가 아닌가? 그렇게 볼 수는 없다. 예수는 항상 청중들이 이해할 수 있는 용어를 사용한 것뿐이다. 그들은 첫째가 되는 것이 아니면 관심이 없다. 예수는 그들이 관심하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진정한 첫째의 길을 제시하여 기존의 가치를 뒤집는 것이다.

또 그들은 주위 사람들을 대접하거나 지극히 작은 자를 대접하는 데는 관심이 없지만, 예수께는 잘 해드리려고 한다. 예수께서 그들의 스승일 뿐 아니라, 그가 앞으로 무슨 기적을 일으키고 무슨 큰 벼슬을 그들에게 줄지 모른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 그들은 하나님께 몸과 마음과 성품을 다 바쳐야 함을 잘 알고 있다.

예수는 또 그들이 잘 알고 있는 이러한 사실들을 이용하여 새로운 가치를 깨닫게 하려고 한다. 그들의 주위에 있는 지극히 작은 자를 영접하는 것이 곧 예수를 영접하는 것이요 예수를 영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첫째가 되고 싶으면, 그들이 예수를 영접하고 하나님을 영접하고 싶으면, 지극히 작은 사람을 섬기고 영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자기 자신을 자기를 보내신 이와 일치시키는 것이요, 이 세상의 지극히 작은 자들과 일치시키시는 것이다. 이것을 제자들에게 분명히 이해시키기 위해서 예수는 어린아이를 그들 가운데 세우고 껴안으시면서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들 가운데 하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다”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초대교회 상황에서 해석하면, 능력 있는 부활의 그리스도는 찬양하면서 주위의 작은 사람들을 돌보지 않는 신자들에 대한 비판일 수도 있다. 이제는 이런 어린아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를, 나아가 그분을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하나님께 잘 해 드리려면 이제는 지극히 작은 자에게 잘 해 주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기존의 질서와 가치관의 전복이다. 새로운 가치이다.

하지만 이것이 의무니까 무조건 그렇게 하라거나, 이것이 종교이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렇게 하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마태복음 25장 <최후의 심판> 이야기 같은 데서는 이런 동기가 매우 극대화되어 있다. 나중에 양과 염소로 나누는 심판 자리에서 임금은 지극히 작은 자를 찾아보고 먹을 것을 주고 입히고 감옥에 가보고 한 것이 곧 자신에게 해 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 심판 받지 않으려면 지금 여기에 있는 헐벗고 굶주리고 감옥에 갇힌 이들을 입히고 먹이고 찾아보라고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심판에 강조점이 있지만, 이것은 아마도 후대의 형태일 것이고 본래는 그런 심판에 초점이 있는 것은 아니다. 본래 초점은 예수의 퍼포먼스, 실천에 있었다.

3. 예수의 퍼포먼스

예수는 참 교육적이다. 이 점을 제자들에게 설명해 주시기 위해서 이번에는 그들 앞에서 퍼포먼스를 하신다.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껴안으셨다. 꼭 숙달된 조교가 훈련생들 앞에서 시범 동작을 보이는 것 같다.

그리스어에서 아이를 가리키는 단어로 teknon, hyos, pais가 있다. 여기 사용된 paidion은 pais에서 나온 말이다. 그런데 teknon은 자녀라는 뜻이고 hyos는 상속자라는 뜻인데 pais는 나이가 어리다는 뜻이다. 즉 teknon이나 hyos는 가족의 사랑을 받는 자녀라는 긍정적 의미가 있지만 pais는 단지 어리다는 의미, 즉 사회의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는 부정적 의미가 지배적이다. 그래서 pais는 아이라는 뜻 외에 종, 노예, 하인이라는 뜻도 된다.

어린이에 대한 고대인들의 태도는 대체로 중립적이거나 특히 소녀일 경우에는 부정적이었다. 그리스인들은 대체로  어린이를 미숙하고 유치한 존재로 보았다. 구약성서에서도 어린이는 방자하고 이해력이 부족하며 하나님과 인간의 엄한 훈육을 필요로 하는 존재로 나오기도 한다(사 3:4; 열하 2:23-24: 어린 아이들이 성읍에서 나와 그를 보고 "대머리야, 꺼져라. 대머리야, 꺼져라" 하고 놀려 댔다. 엘리사는 돌아서서 그들을 보고, 주의 이름으로 저주하였다. 그러자 곧 두 마리의 곰이 숲에서 나와서, 마흔두 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찢어 죽였다).

그러므로 여기서 예수께서 어린아이를 가운데 세우신 것은 세상의 가장 작은 사람, 하인 가운데 한 사람을 세우신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리고 예수는 그 아이를 껴안으셨다.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누구를 껴안으셨다는 표현은 어린아이에게만 사용될 뿐이다. 이는 지극히 작은 자에 대한 예수의 파격적 사랑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퍼포먼스일 수 있다.

며칠 전 교회 근처에서 음식점으로 가는데 몇몇 젊은이들 여럿이 귀에 핸드폰을 대고는 입으로는 강아지 짖는 소리 같은 이상한 소리를 내서 깜짝 놀라서 쳐다본 적이 있다. 아마 그게 퍼포먼스라는 것인가 보다. 아마 핸드폰을 갖고 공공장소에서 수다를 떠는 현대인이나, 별 것 아닌 것을 갖고 의미 없이 수다를 떠는 현대인을 풍자하려고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예수는 아이를 세우고 껴안는 퍼포먼스로 지극히 작은 자에 대한 그의 사랑을 극대화시켰다.

퍼포먼스는 의미가 있다. 이것은 실행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아이를 껴안으신 것은 분명한 실행이다. 그것은 첫째가 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섬기는 척하는 그런 위선이나 한번 해 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냥 아이가 측은하고 귀엽고 좋아서 껴안는 것이다. 그 행동 자체가 목적이지 그것은 다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지난번 크리스마스 때 우리 교회 분위기가 많이 침체되어 있었기에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살아나지 않을까봐 은근히 걱정을 했다. 그런데 주일학교 아이들이 여럿 나와서 같이 캐롤을 부르는데 우리의 우울한 기운을 다 내쫓고 교회가 환하고 밝은 분위기로 바뀌게 하였다. 어린아이들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를 느끼게 해 주는 순간이었다. 지금도 교회 홈페이지 낙산앨범에 아이들이 크게 입을 열고 노래하는 모습이 있다. 특히 제일 어린 유치부 아이의 귀여운 모습은 누구라도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들게 했다. 그런 아이를 한번 안아 보면 우리가 행복해지지 않는가. 그 자체로 행복하고 기쁘지 않은가. 거기에 무슨 목적이 있는가. 낮아지기 위해서 어린아이를 껴안는 것인가? 그냥 어린아이를 껴안는 행동 자체가 기쁜 일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마음을 이미 주셨다. 사람들은 어린아이를 보면 안아주고 싶고 보살펴주고 싶은 마음이 속에서 일어난다. 약한 사람을 보면 돕고 싶고, 불쌍한 노인을 보면 무엇이라도 드리고 싶은 동정심이 속에서 일어나게 되어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인간답게 살게 하기 위해서 우리 속에 심어놓은 어떤 장치와도 같은 것이다. 예수는 어쩌면 우리 속에 있는 이것, 아직은 잠자고 있는 이것을 일깨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린아이를 세우고 껴안는 퍼포먼스를 제자들 앞에서 해 보이신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해서라도 관념적 사랑, 머리로 하는 사랑 하지 말고, 실제로 손을 잡고 껴안아주는 터치(touch)를 하는 사랑을 하라고 일깨워 주시고 싶은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왜 문제인가? 이전보다는 다들 잘 살게 되었는데 왜 다들 삭막하다고 하고 살기 힘들다고 하고 행복지수는 떨어지고 자살률은 높아만 가는 것인가? 전에 한국 사람은 오늘 우리들보다 훨씬 더 순박했다. 옛날에 중국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오면 그 인상이 사람들이 순박했다고 하고, 길을 잘 양보하는 사람들이라는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요즘은 한국 사람이 길을 잘 양보한다거나 순박하다거나 여유가 있다거나 인정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한다.

몇 년 전에 <살림>지 편집장으로서 오재식 교우를 인터뷰할 때 들은 이야기이다. 요즘 우리는 사회 안전망을 갖추어야 한다고 이야기들을 하지만, 이전에는 비록 우리가 지금 같이 잘 살지도 못하고 복지 시설도 없었지만 그래도 사회안전망은 잘 되어 있었다고 한다. 자식들이 부모를 잘 모시고 사촌도 형제처럼 돕고 일가 간에 무슨 일이 있으면 도우며 살고, 고아가 생기면 친척들이 다 맡아서 길렀다. 가난하기는 해도 인정이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저마다 잘 난 사람들밖에 없고, 서로 자기가 더 크다고 하고, 강하다고 하고, 늘 상대방을 깎아내리려고 하는 풍토가 강해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약한 자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주셨고, 특히 한국 사람들이 인정이 많은 사람들인데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는가? 어떻게 이전의 그런 인정어린 마음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인가? 너무 어렵고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 먼저 예수께서 하신 것을 따라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이를 일으켜 세우고 껴안아 주는 것부터 실천해 보자. 그러면 우리가 머리로는 모르는 것이 몸으로 느껴지고 마음속에서 솟아날 것이다.

지난주에 주일학교 교사를 임명하고 다음 주일부터 주일학교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이것은 큰 의미가 있다. 아이들을 껴안아주고 아이들에게 찬송을 가르치고 성경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 교회가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다. 그것은 아이들을 예수께로 인도하는 복된 일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행복해지고 복을 받고 구원을 받는 일이기도 하다.

선교부가 주축이 되어 동숭동의 독거노인들을 돕기 위한 계획을 하고 있지만, 우리가 외롭게 사는 노인들을 만나보고 돌보게 될 때, 그분들도 고마워하겠지만, 먼저 우리가 마음속에서 따뜻함을 느끼고 내가 인간이 되는 느낌이 들 것이다. 내가 먼저 속에서 기쁨이 우러나고 예수께서 나와 함께하신다는 그런 행복을 느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극히 작은 자를 영접하는 가운데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을 영접하게 된다는 말씀은 참으로 이해할 수 있고 설득력 있는 진리의 말씀이라 하겠다.

4. 인정 공동체에서 구원 공동체로

동네 군인 출신 어느 아저씨를 기억한다. 그분은 가정에서 자상하고 평소에 누구에게나 호인인 타입이다. 그런데 어느 한 아저씨에게 호되게 한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그 두 사람은 한 공장의 물건을 떼어다가 팔면서 경쟁관계가 된 것이다. 그랬으면 정당하게 경쟁하면 좋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내가 ‘옥씨 아저씨’라고 부르는 한 아저씨를 향해서 소리를 지르면서 ‘육군 중위 ○중위를 뭘로 보는 거야?’한다. 어린 생각에 육군 중위가 그렇게 높은지 이해할 수 없었다.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 말을 들은 옥씨 아저씨의 반응이다. 그는 그런 소리를 들으면 기가 죽어서 꼼짝도 못하고 비난을 다 받고 말없이 서 있었다. 그 ‘육군 중위’아저씨가 한번은 ‘차렷!’하고 명령을 하자 그는 우습게도 부동자세를 취하는 것이었다. 어린 속에도 옥씨 아저씨가 너무나 불쌍하고 그러면서도 바보처럼 당하는 게 안타까웠다. 그 아저씨는 내 친구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그 친구는 중학교 진학도 못하고 이발소에서 일하고 있었다. 난 그래서 옥씨 아저씨에게 한없이 동정하는 마음이 일었다. 비록 무슨 행동을 취하지는 못했지만 약한 사람에 대한 동정, 군사문화에 대한 거부감을 느꼈다.

누군가를 불쌍히 여긴 이런 기억은 이외에도 많다. 여러분들에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늘 내 마음속의 추억 같이 있을 뿐 늘 나 개인은 그저 내 가족 챙기기에 바쁘지 주위의 사람들을 돌아볼 겨를이 없이 살아온 것이 지난날의 삶인 것 같다. 내 속에 아무리 인정이 넘치고 측은한 마음이 있어도 그것이 퍼포먼스로 연결이 되거나 실천으로 연결이 되지 않으면 그것은 감상적인 추억으로 끝나고 만다.

한 교사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경이라고 하는 6학년 아이인데, 아버지는 술로 지내고 그래서 어머니는 집을 나갔다. 그래서인지 옷도 지저분하고, 공부는 1학년 수준이다. 재미가 없고 자주 다투고, 주로 지체장애가 있는 아이들과 어울린다. 그런 경이와 짝을 하려는 아이가 없고, 같이 놀아주지도 않는다. 선생님은 친구를 사랑하자고 말하기도 하고, 짝이 되기를 기피하는 아이를 꾸중도 하며 여러 가지 방법을 써서 학급 분위기를 밝게 하려 애썼다. 경이에게 다정하게 대하려고 하며 수준에 맞는 동화책을 읽도록 배려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은 꾸중과 훈계하기에 바빴다. 한번은 리코더를 가르치면서 잘하는 아이가 못하는 아이를 가르치도록 하였다. 그런데 아무도 경이를 가르치겠다는 아이가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경이는 선생님이 가르쳐줄게’하였다. 친구들이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마다 열심히 친구들을 가르치자 경이는 선생님께 리코더를 가지고 나왔다. 자기도 가르쳐 달라는 것이다. 처음 리코더를 배우는 아이에게 운지법을 가르치려니 손가락을 만지기도 하고 뒤에서 껴안는 자세로 위치를 잡아주기도 하고, 같이 리코더를 불어야 되었다. 이렇게 아주 가까운 자리에서 아이가 리코더를 불기 위해 입술을 오물거리는 것을 살피면서 아들이 젖을 먹을 때 바로 저 모습이었는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면서 경이가 참 사랑스럽다는 생각을 하였다. 경이에게 사랑스럽다는 생각을 한 것이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 동안은 불쌍한 아이, 무료급식자, 말썽쟁이, 특수반 등의 기록이 경이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런데 아들같이 사랑스러운 느낌을 갖게 되다니... 스스로 자신에게 놀라운 경험이었다고 한다.

어떻게 이 선생님은 그 경이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는가? 분명 의식으로는 이미 처음부터 잘 해주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 아이의 손가락을 만지고 뒤에서 껴안아주고 오물거리는 입술을 가까이서 보면서 비로소 속에서 인정이 솟아난 것이고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예수의 방식이다. 이것이 예수의 퍼포먼스다. 이런 퍼포먼스는 감상으로 끝나지 않는다. 아이를 사랑하고 변화시키는 단계로 나간다. 그렇게 할 때 그 아이도 변하게 되지만, 동시에 선생님도 변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진정으로 교사가 되는 경험이다. 크리스천으로 말하면 그것이 바로 구원의 경험이다. 인정이 그것으로 끝나면 감정 해소 같은 것이 되고 말지만, 그것이 퍼포먼스가 되고 실천이 되면, 그 속에서 크리스천은 자신이 변화되고 구원 받는 경험을 하게 된다.

모세는 인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이집트 왕궁에서 편하게 살 수 있었고 동족의 아픔을 나 몰라라 할 수 있었지만, 동족이 이집트 병사에게 맞는 것을 보고 같이 아파하였다. 그래서 그는 이집트 병사를 죽이고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가게 되었다. 그가 미디안 광야로 간 것이 중요하다. 그가 인정만 있고, 미디안 광야로 나가지 않았다면 그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미디안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났기에 그는 개인의 감상적 인정에 머물지 않고 민족을 구원하는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목자 없는 양 같이” 불쌍히 여기셨다고 한다. 그분은 인정이 많으신 분이었다. 마음이 따뜻한 분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그냥 속마음으로 끝나지 않고 인정 공동체를 이루고 나아가 서로 걱정하고 돌보는 밥상공동체, 운명공동체로 발전이 되었다. 인정 많은 사람과 예수의 차이는 이것이다. 예수도 인정이 많은 분이셨지만 그분은 그냥 마음으로 끝나지 않고 그런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인정을 한 데 모으고 서로 돕고 격려하는 공동체를 만드셨다. 그것이 예수운동이고 하나님 나라 운동이다. 그것을 계승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교회다.

오늘 우리 각자는 정도 많고 인정도 많고 좋은 사람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 개인으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가족을 사랑하는 일을 넘어서기가 어렵다. 교회에서 우리는, 자신만 사랑하고 가족만 사랑하는 것을 넘어서서,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를 예수를 대하듯 하고, 하나님을 대하듯 하는 삶을 배우고, 훈련하고, 실천할 수 있다. 예수의 이 인정 어린 마음을 따라가는 것이 크리스천의 마음이요, 예수의 이 퍼포먼스를 따라하고 실천을 따라하는 것이 크리스천의 삶이다.

난 우리 교회가 이런 일에 많은 가능성을 갖고 있다고 본다. 한 예를 들면, 송세진 교우가 동대문 근처에 들어서게 될 장애인 전문 치과병원 원장직을 맡게 되었다고 한다. 장애인 한 사람에게 인정을 갖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조직적으로 시설을 갖추고 치료를 해나간다면, 의료행위도 그저 단순한 치료를 넘어서서 하나님 나라 운동의 차원에서 전개될 수 있다고 본다. 이런 귀한 병원과 송세진 교우를 통해서 많은 장애인들의 손을 잡아주고 안아주고 일으켜 세우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리라고 믿는다.

어디 송세진 교우뿐이겠는가. 우리 낙산교우들은 저마다 일과 장소는 달라도 자기가 선 곳에서 지극히 작은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는 일들을 하고 있는 분들이 많다. 뿐만 아니라, 이 곳 낙산교회에서도 어린아이를 껴안아주고 약한 사람들의 손을 잡아 세우는 예수의 퍼포먼스를 따라하시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감상적인 인정에 머물지 않고, 사람들을 입히고, 먹이고, 살리고, 일으켜 세우는 생명 공동체, 구원 공동체를 이룩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기도:

주님,
우리를 지극히 작은 자들 가운데서 불러주시고
자녀삼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고난의 길을 가실 때
누가 더 크냐고 다툰 제자들처럼
오늘날 우리도 서로를 탓하고
누가 더 크냐면서 싸우고 있습니다.
첫째가 되려면 꼴찌가 되고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는데
우리는 늘 첫째가 되려고 하고
섬김을 받으려고만 합니다.
우리 죄를 고백하오니 용서하여 주옵소서.
어린아이를 세우시고 안으신 뜻을 헤아려
우리가 이 세상의 지극히 작은 사람들을
찾아보고 손을 잡고 안아주며
우리 안에 있는 주님의 마음을 일깨우게 하소서.
그리하여 그들에게 주의 사랑을 전할 뿐 아니라
우리도 진정한 기쁨과 구원을 맛보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낙산교회 05.1.23 주일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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