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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민들레 홀씨> 제140호: 삶을 주도하는 신앙

첨부 1



140호/2005.2.7 발행처: 민들레성서마을 발행 및 편집인: 김재성  



창 45:4-8


주도하는 삶은 기쁘다

사람이 짐승과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그가 자유로운 존재라는 점이다. 짐승들과는 달리 사람은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그 말은 그것을 먹을 수 있는 가능성 곧 자유가 있다는 뜻이 된다. 자유는 인간다움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요, 인간의 행복에 가장 결정적인 요소이다.

사람이 언제 자유를 느끼는가? 그것은 생을 주도할 때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주도적이다. 그것은 어린아이를 보면 알 수 있다. 어린아이는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울고 보채고 저항한다. 나이가 들면서 눈치를 보게 되고 어릴 때의 주도성을 포기하게 되지만, 사람들은 그것이 철이 든 것이나 성숙한 것이라고 자기 합리화를 한다. 중고등학생 시절은 입시 때문에 전혀 주도적인 삶을 살 수 없게 되어 있다. 하기 싫어도 무조건 공부를 해야 한다. 스스로 하는 게 잘 되지 않으니까 학원에 가서 강제로라도 공부를 하려고 한다. 군대에 가면 주도성은 최고로 억압이 된다. 그저 시키는 대로 복종하도록 훈련을 받는다. 그렇게 하고 나서 사회에 나오면 20대 중반이 되는데 어릴 때 주도적이고 기가 살아 있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소금에 절인 배추처럼 얌전한 모습이 되어 돌아온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오히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이제야 남자다워졌다느니, 의젓하다느니 하면서 칭찬을 해준다.

한국 사회는 아직도 유교의 영향이 강해서 주도적인 것을 매우 억압하고 있다. 뭔가 자기주장을 내세우면 그것을 체면과 예의범절에 어긋나는 것으로 여긴다. 심지어 무엇을 먹고 싶어도 그냥 먹으면 안 되고 두 번 이상 권하면 먹으라고 하고 그것을 사양지심이라 해서 미덕으로 여긴다.

오래 전에 처가에 가서 무슨 일을 하는데 아내의 아저씨뻘 되는 분이 나를 도와주고 있었다. 일하다 힘이 들어서 박카스를 하나 먹고 싶었다. 하나 드시겠느냐고 하니까 단호하게 싫다고 했다. 나는 진심으로 알고 가서 나 혼자 박카스를 마시고 왔다. 그리고 나서 며칠 뒤에 장모님으로부터 좋지 않은 소리를 들었다. 그분이 나를 아주 안 좋게 보더라는 것이다. 박카스를 혼자 마셨다는 것이다. 그 다음부터 나는 어른께는 무조건 억지로라도 권하는 습관이 생겼다. 먹고 싶은 것을 의사 표현하는 것조차 결례로 가르치는 문화 속에서 우리는 주도적이기보다는 늘 눈치를 보고 사는 데 익숙해져 있는 것 같다.

여자들의 경우 삼종지의(三從之義)라고 하는 것도 그저 아버지, 남편, 아들을 따르는 것이니 자기가 주도하는 생을 살지 못하는 것이다. 교회를 나가는 것도 남편이 결정한다. 남편이 가면 따라가고 안 가면 자기도 안 가는 것이다. 늘 숨어서 살고 생을 주도하지 못한다. 사실은 그런 사람에게는 기쁨이 없다. 기쁨은 자유에서 오는 것이고 그것은 생을 주도할 때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전거를 처음 배웠을 때를 생각해 보라. 뒤에서 잡아주고 있던 사람이, “이젠 혼자 잘 가네” 했을 때 조금 두렵기도 했지만 나 혼자 페달을 밟고 있다는 사실이 황홀하게 느껴졌다. 처음 운전을 배울 때도 그랬다. 사고날까봐 겁이 나긴 했지만 자기가 가고 싶은 대로 갈 수 있다는 것이 무지무지하게 기뻤다. 운전하면서 기뻐하는 것은 사람들의 본성이 주도적임을 말해준다. 가고 싶은 곳을 갈 수 있고 자기가 선택할 수 있고 운전할 수 있을 때 사람은 행복을 느낀다.

주도하는 삶은 책임적이다

주도하는 삶은 외고집이나 방종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스스로의 삶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의미이다. 자신의 행동은 스스로 결정해서 하는 것이지, 남이 시켜서 하거나, 여건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우리는 매사에 핑계를 대는 사람에게서 피곤함을 느낀다. 핑계를 댄다는 것은 삶을 주도하지 못하고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다.

책임(責任)이라는 말을 보라. 꾸짖을 ‘책’ 자에 맡길 ‘임’ 자다. 꾸짖을 게 있으면 나에게 하라고 하면서 나서는 것이다. 남에게 돌리지 않는다. responsibility라는 말도 response와 ability의 결합이다. 즉 벌어진 일에 대해서 피하지 않고 반응하는 능력이라는 것이다. 그게 능력이다. 주도적이 되는 능력이다.

주도적이 못되고 늘 의존적인 사람은 성공도 여건 탓으로 돌린다. 어릴 때 부모를 잘못 만나서 선생님을 잘못 만나서 …… 그때 체제와 사회 제도가 좋지 않아서 그렇다고 한다. 70-80년대에 사회과학 붐이 일면서 다들 사람들을 빈곤하게 만드는 사회 체제에 눈을 뜨게 되었고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에 불을 당겼다. 그런 인식은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이 모든 핑계를 사회체제로 돌리는 것을 정당화해주지는 않는다. 아무리 체제가 그렇다 하더라도 개인은 자기 삶에 대해서 책임적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행복할 수 있다. 절대로 체제가 개인을 행복하게 해 주지는 않는다.

사춘기 시절에, 으레 그 나이 청소년들이 그렇듯이, 나도 모든 여건이 내게 불리하다고 느낀 적이 있다. 가정환경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대학에 갈 비전도 없었고 공부는 잘 되지 않았다. 난 지독하게도 운이 없고 불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마침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아주 친한 선생님에게 이런 얘기를 털어놓다가 눈물이 나서 한참 울었다.

그는 내게 실컷 울라고 하더니 나중에 종이에 그림을 그렸다. 여러 개의 원을 그려놓고는 그 원 안에다 슬픔, 기쁨, 성공, 사랑, 괴로움 이런 식으로 단어를 써 넣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것이 바로 내 마음 속의 상자라고 하였다. 그것은 내가 가게에서 먹고 싶은 것을 골라서 사먹는 것처럼 내가 고르면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지금 네가 우는 것은 슬픔을 선택해서 그렇고 네게 그것이 필요해서다. 하지만 넌 슬픈 사람이나 불행한 사람은 아니다. 넌 다른 것을 즉시 선택할 수도 있으니까.” 이런 취지였다. 그 말은 내게 빛을 던져주었다. 난 늘 내가 불행한 사람이고 슬픈 사람이라고 생각했지 그것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아무리 슬픈 일이 벌어져도 그 환경이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결국 슬프거나 기쁘거나 선택하는 것은 나 자신이며, 나 자신은 그 어떤 외적인 환경에 의해서도 침해받지 않을 만큼 독립적인 존재라는 것, 주도적인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생각은 나를 바꾸어놓았다. 전에는 매玲?여건을 탓했지만, 이제는 그것은 내게 책임이 있다는 식으로 태도가 바뀌게 되었다. 나는 비로소 나 스스로 자유로울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는 공간을 갖게 된 것 같았다.

생을 주도하는 신앙

오늘 읽은 본문에 나오는 요셉도 매우 주도적인 생을 산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이복형들의 미움을 받아서 이집트로 팔려가서 보디발 장군의 집에 하인이 된다. 의존적인 사람 같으면 형들을 원망하고 신세를 한탄하면서 세월을 보냈겠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어디서든 남에게 끌려가지 않고 스스로 적극적으로 기회를 찾고 생을 주도해 간다. 그래서 그는 보디발에게 아주 신임을 받게 되어 집안일과 재산을 모두 맡아 관리하게 된다.

그런데 이번에는 보디발의 부인이 그에게 유혹의 손길을 내뻗는다. 그가 미남이므로 자꾸만 그에게 침실로 가자고 끌고 가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쾌락을 맛볼 수 있는 기회요, 노예에게는 출세할 수 있는 기회일 수도 있다. 못 이기는 척하고 그렇게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요셉은 거기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는 자기 생의 진정한 주인이었다. 아무리 주인마님의 압력이 있어도, 달콤한 유혹이라고 하여도, 그런 외적인 것이 그를 행복하게 하거나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행복은 외부에서 내부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샘처럼 내부에서 외부로 솟아나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절대로 유혹이 자기 내부로 침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스스로 바람을 피우지 못하는 착한 사람들도 어쩔 수 없이 바람을 피게 되는 경우를 상상을 하곤 한다. 자기는 뜻하지 않았는데 친구가 억지로 이상한 데 데려가서 여자들과 어울리다가 어쩔 수 없어서 즐기게 되었다는 식이다. 그러니까 그의 생은 주도적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사실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 욕망을 추구했으면서 떳떳하게 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어서 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는 한 그는 늘 누군가에게 의존해서 사는 존재가 되고 만다.

요셉이 자신은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주인마님 때문에 억지로 할 수 없이 그렇게 되었다고 하면서 부인에게 넘어갔다면 잠시는 부인의 사랑을 받았을지 모르나 이용당하고 나서는 버림받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주도적이어서 절대로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히기까지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면서도 신세 한탄을 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주도적으로 일을 했다. 그러자 간수장이 그를 좋게 보아서 그에게 모든 일을 맡긴다. 이렇게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남을 탓하거나 핑계 대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을 지키고 여건을 변화시키고 주변 사람들을 감화시키는 것이 요셉의 진정한 모습이다. 우린 그가 그저 바로 왕의 꿈을 잘 해몽주어서 운이 좋아서 총리가 된 줄 알지만, 그것보다는 이런 주도적이고 적극적이고 누구에게도 핑계 대지 않는 그의 성품에서 이미 총리가 될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신앙의 주도성

요셉이 이렇게 생을 주도하고 책임적으로 사는 비결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그의 신앙에 있다. 요셉의 신앙을 단적으로 표현해주는 것은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삭과 야곱에게도 늘 함께하겠다고 약속하셨다(창 26:24, 28; 28:15, 20; 31:3). 야곱이 돌베개 베고 잘 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서 네가 어디를 가든지 너를 지켜주겠다”고 하신다. 그 신앙의 맥이 요셉에게 그대로 이어지며 특히 요셉이 고난당할 때마다 그 고비마다 이 말씀이 다시 나오고 있다. 요셉이 보디발에게 팔려갔을 때 주님은 요셉과 함께 계셨다(39:2), 그가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갔을 때도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계셨다(39: 21, 23). 마침내 그가 바로왕의 꿈을 해석해 주었을 때 바로는 요셉을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사람”이라고 부른다(41:38). 바로 이 결정적인 선언 이후에 요셉은 이집트의 총리로 발탁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서술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제3자가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계시는 것을 보는 것이 가능한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후대의 사람들이 요셉의 삶을 해석하는 것일 따름이다. 그가 언제나 마음의 중심에 신앙을 갖고서 흔들림 없이 살기 때문에, 어떤 시련 속에서도 굽히지 않고 적극적으로, 희망을 가지고 살므로, 그의 그런 삶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는 것이고 그것을 그런 식으로 서술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신다”는 반복되는 말은 요셉이 그에게 닥치는 모든 일을 하나님 중심으로 해석하고 사는 신앙인이라는 말이다.

보디발의 아내가 그를 유혹하자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어찌 이런 나쁜 일을 저질러서,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를 지을 수 있겠습니까?”(창 39:10) 그에게서 그런 행동은 그의 주인에게 죄를 짓는 것만이 아니라 그보다 먼저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심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가 자신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이다. 그에게도 여러 가지 원칙과 욕망이 있을 수 있다. 쾌락의 욕구는 부인과 동침하라고 유혹했을 것이고, 권력의 욕구는 부인을 이용해서 출세하라고 했을 것이다. 억울하게 종살이 한다는 생각은 그렇게 해서라도 주인의 것을 빼앗는 통쾌함을 누리라고 속삭였을지도 모른다. 돈에 대한 욕심을 그게 집안을 주물럭거리면서 돈을 챙길 수 있는 기회라고 속삭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요셉에게는 이 모든 것보다 우선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을 거역할 수 없다는 신앙이다. 이 대원칙을 굳건하게 지키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창피를 당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생을 주도하는 비결이다. 이렇게 생을 주도하는 사람을 제3자가 볼 때는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신다”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 읽은 본문은 더욱 감동적인 부분이다. 나중에 그를 팔아넘긴 형들이 양식을 구하러 애굽까지 오게 되었다. 감정에 치우치고 여건에 좌우되는 사람이라면 그가 취할 행동은 뻔하다. 이제야말로 그 옛날에 당한 일을 시원하게 갚아줄 기회가 온 것이고, 이제 총리가 되었으니 그 형들은 자기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가 의존적인 사람이고 감정적인 사람이었다면 그는 자기의 여건을 최대한 활용하여 시원하게 복수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복수의 감정보다도 총리로서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그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것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것은 신앙이요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다. 하나님 편에서 생각하고 하나님의 대원칙에서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그는 이 중심이 확고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이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책하지도 마십시오. 형님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아넘기긴 하였습니다만, 그것은 하나님이, 형님들보다 앞서서 나를 여기에 보내셔서, 우리의 목숨을 살려 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 그러므로 실제로 나를 이리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창 45:5-8).

이 얼마나 멋진 말이며, 신앙인다운 말인가! 자기를 죽이려고 하고 팔아넘긴 형들을 이렇게 너그럽게 용서하면서, 그건 형들이 나빠서 그런 게 아니라 하나님이 시키신 일이라고 해석을 해 버린다.

하나님이 나를 이리로 보내셔서, 바로의 아버지가 되게 하시고, 바로의 온 집안의 최고의 어른이 되게 하시고, 이집트 온 땅의 통치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 하나님이 저를 이집트 온 나라의 주권자로 삼으셨습니다”(창 45:8-9).

그리고 이어지는 말들(8-9절)은 언뜻 보기에 자화자찬의 말같이 보이기도 한다. 자기 자신을 가리켜 ‘바로의 아버지’ ‘최고의 어른’ ‘온 땅의 통치자’ ‘온 나라의 주권자’ 등으로 부르고 있다. 이는 ‘주님’과 같은 칭호이다. 어찌 보면 신성모독으로 걸릴 수도 있을 법한 용어들을 쓰고 있다. 그래서인지 요셉의 부하 관리인은 요셉의 지시로 자루에 보물을 집어넣었는데 하나님이 넣었다고 말한다. “댁들을 돌보시는 하나님, 댁들의 조상을 돌보신 그 하나님이 그 자루에 보물을 넣어 주신 것입니다”(창 43:23).

이것은 그만큼 요셉이 하나님과 함께하고 있다는 확신에 찬 삶을 살았음을 의미한다. 그 확신이 있고 자신의 삶에 자부심이 있었기에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앙의 주도성은 바로 이런 확신과 자부심에서 나온다 할 것이다.

요셉의 형들은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요셉이 그런 자신감을 보일수록 그들은 요셉이 어느 때라도 앙갚음을 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마침내는 아버지의 유언이라고 하면서 형들을 용서하라는 야곱의 유언을 전하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는 아우님의 종입니다” 하고 머리를 조아렸다. 요셉은 이렇게 말한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기라도 하겠습니까? 형님들은 나를 해치려고 하였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을 선하게 바꾸셔서, 오늘과 같이,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50:19-20).

여기에서 요셉의 신앙과 낙관주의가 잘 나타난다. 아무리 자부심이 대단하다 해도 자기가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인간의 나쁜 행동마저도 선하게 바꾸셔서 수많은 생명을 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높이고 있다. 이것은 신앙의 낙관주의다.

바로 이것이 요셉이 가장 주도적인 생을 살 게 된 비결이다. 자기의 가장 깊은 곳에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는 사람은 절대로 생을 주도할 수 없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자유를 얻는 비결이기도 하다. 가장 깊은 곳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그 복종이 없이는 절대로 이 세상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오늘날 사람들은 너무 쉽게 속이 상하고 마음이 상한다. 너무 쉽게 이성을 잃는다. 기껏 예배드리고 은혜 받고 집에 가서 주식값 떨어진 것 알고는 속이 상하고, 집값 떨어진 것 보고는 술을 마신다. 직장에서 스트레스 받는다고 우울하고, 상사에게 한 마디 들었다고, 언제 쫓겨날지 모른다고, 앞날이 암울하다고, 입시에 떨어졌다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다고 …… 아무리 들어도 끝이 없는 그런 수많은 이유를 대면서, 쉽게 상처받고 쉽게 흔들린다. 돈은 안전하게 금고에 보관하지만, 가장 소중한 것을 지키는 안전장치가 너무나 허술하다. 그래서 결국은 이런 외부 여건 때문에 나는 스트레스를 받고 슬프고 술을 마시고 불행하다고 하면서, 자기 연민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사실은 전혀 불쌍한 사람도 가엾은 사람도 아니다. 그는 자기 속에 하나님을 모시지 못해서, 자기가 어디로 가야 할지 원칙이 없어서, 그저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이리 저리 흔들리는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은 존재이다.

주도적인 신앙인은 요셉처럼 많은 시련을 당할 수도 있지만 그런 여건에 의해 흔들리지 않는다. 하나님이 주신 삶의 목표가 그의 중심에 있어서 방향을 잃지 않게 해 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것이 옳고 그른가를 밝히기 위해 논쟁도 하고 때로 투표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쪽이 북쪽인지 알기 위해 다수결로 하거나 투표를 하지 않는다. 나침반만 있으면 된다. 하나님이 그 삶의 목표가 되고 중심이 되는 사람도 그런 사람이다. 그가 가야할 길을 외부 조건에 의해 결정하거나, 논쟁이나 투표로 결정하는 사람이 아니다. 나침반 같이 확실한 하나님의 대원칙을 따라서 굳건하게 나아가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주도적인 삶을 살 수 있고,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다.

요셉과 같은 생애를 살아서 우리 가장 깊은 곳에 주님을 모시고 사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란다. 늘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셔서, 어떤 외적인 여건에 의해서도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소중한 자아가 다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생을 주도하고 진정한 자유와 기쁨을 누리시는 성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기도:

주님,
우리에게 천하보다 귀한 생명 주시고
우리 삶의 주인이 되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세상은 사람들을
이 세상 원리대로 살도록 몰아갑니다.
사람들은 어쩔 수 없다 하면서
세상 풍조를 따라가고 있으며,
신자들도 따라가고 있습니다.
주님,
주님 주신 귀한 생명을
마지못해 끌려가며 살지 않게 하소서.
삶을 주도하게 하시고
신앙의 원칙을 지키게 하소서.
억울하게 팔려가고 감옥에 가면서도
삶을 주도하고 신앙을 지킨 요셉처럼
십자가를 지면서도
세상을 이기신 주님처럼
신앙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낙산교회 05.02.06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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