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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모세 빛낸 아론 같은 주광조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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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 빛낸 아론 같은 주광조 장로

- 박용규 (총신대 신학대학원 역사신학 교수)
    

모세를 빛나게 해준 아론 같은 탁월한 지도자, 주광조 장로

아버지 주기철 목사의 순교의 신앙이 헛되지 않도록 일생동안 겸손히 자신의 책임을 충실하게 감당해온 주기철 목사의 4남 주광조 장로가 2011년 6월 26일 0시 30분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모세를 빛나게 해준 아론 같은 존재였다. 지난 15년 동안 가까이서 그를 지켜본 사람 중 한 사람으로서 필자는 그가 얼마나 훌륭한 인물이었는가를 피부로 확인할 수 있었다. 

솔직히 주기철 목사를 만나본 적이 없지만 주광조 장로의 삶과 사역을 통해 주기철 목사를 더욱 존경하게 되었고, 지난 15년간 주기철 목사를 한국교회에 알리는 일에 기쁨으로 협력할 수 있었다. 그는 워낙 걸출하고 위대한 순교자로 칭송받고 있는 아버지 주기철 목사의 그늘에 가리어져 제대로 평가를 받아오지 못했지만 다음 몇 가지 점에서 그가 한국교회사에 남긴 족적은 뚜렷하다. 

첫째, 한국교회의 방송선교에 끼친 지대한 공헌이다. 그는 공직에서 은퇴한 후 큰 회사 하나를 맡아달라는 친구의 청을 거절하고 극동방송국 부사장으로 10년이 넘게 전혀 월급을 받지 않고 무임으로 섬겼다. 천부적인 목소리에 뛰어난 매너, 오랜 사회적 경험에서 나온 친화력과 모나지 않은 교계 지도자들과의 관계는 남다른 자산이었다. 

그의 재임 중 극동방송국은 기독교방송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 방송규모와 시설과 그리고 시청률 모두에서 한국의 대표적인 기독교 방송으로 도약했다. 주 장로의 친화력과 탁월한 경영능력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극동방송국의 오늘의 영광은 없었을 것이다. 복음주의 정신을 그대로 견지하면서 방송을 저변확대 시키는 작업은 쉽지 않은데 주광조 장로의 탁월한 리더십이 이를 가능케 한 것이다. 

둘째, 건강한 복음주의 신앙의 저변확대이다. 그는 언제나 교계 지도자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그들과의 협력을 통해 복음주의 이상을 한국교회 안에 구현하는 일에 앞장섰다. 복음주의 협의회 일원으로 복음주의 지도자들과 활발하게 교류하면서도 신앙 색깔이 다른 진보적인 교단에 속한 이들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그들의 협력을 이끌어 내는 탁월한 수환을 발휘했다. 순교자의 자녀라는 교만함이나 우월의식이 그에게는 찾을 수 없었다. 

뛰어난 친화력을 통해 의견이 맞지 않거나 반대하는 사람들을 적으로 만들지 않고 그들의 협력을 이끌어내는 일에 있어서 아마도 그를 능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미국 복음주의 지도자 케넷 칸저가 오래 전 크리챤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에서 언급한 것처럼 기독교 리더십은 주변 사람들을 독려하여 공동의 목표를 향해 함께 달릴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주광조 장로는 너무도 탁월한 리더십의 소유자였다. 

셋째, 순교적 신앙을 한국교회에 알리고 계승할 수 있도록 혼신을 다했다. 사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지만 1945년 해방 후 순교자의 자녀는 너무도 외로웠다. 신사참배한 이들과 친일파들이 여전히 기득권 세력으로 한국교회를 주도하고 있어 순교자의 자녀는 교회에 발붙이기 힘들었다. 

주광조 장로 역시 젊은 시절 이런 한국교회 현실을 목도하면서 잠시 교회를 떠나야 했다. 그러나 지금의 아내의 헌신과 사랑에 힘입어 다시 교회로 돌아올 수 있었고 옛 신앙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는 산정현교회 출신 김상복 목사를 비롯하여 뜻을 같이하는 의식 있는 교계 지도자들과 함께 주기철기념사업회를 결성하여 아버지 주기철 목사의 순교적 신앙을 계승하는 일을 착수하는 한편 1996년부터 주기철 기념강좌를 열어 주기철 목사를 학적으로 정리하도록 장을 마련해주었다. 

그동안 주기철 목사에 관한 많은 책들을 출판하는 일을 감당해왔다. 지금까지 발굴된 많은 주기철 목사의 자료들, 주기철 목사에 관한 단행본들과 논문들 상당수는 배후에서 그가 헌신적으로 노력하지 않았다면 빛을 볼 수 없었다. 그는 일본과 미국을 비롯한 국내외의 수많은 교회를 다니며 간증집회를 인도했다. 헤아릴 수 없는 청중들이 그의 간증을 통해 눈물을 흘리며 주기철 목사의 순교적 신앙을 접할 수 있었다. 

필자 역시 지금까지 수십 번 주광조 장로의 간증을 들었지만 매번 여전히 눈시울을 붉히며 그의 간증을 들었다. 이 일의 목적은 단순히 아버지이기 때문에 주기철 목사를 높이려는데 있지 않았다. 역사의 그늘에 가리어져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는 순교자 주기철을 역사의 장으로 끌어 올려 한국교회의 신앙의 유산으로 승화시키려는 소박한 목적이었다. 한국적 토양에서 만약 주광조 장로의 신앙의 인격과 친화력과 겸손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교파와 교단을 초월하여 그렇게 많은 이들이 이 일에 기쁨으로 동참하지 않았을 것이다.

넷째, 신학교 간 기념강좌 교류를 통해 건강한 연합운동에 기여한 일이다. 주지하듯이 지금도 한국교회 안에는 교파간의 갈등과 신학적 입장에 따라 교단의 벽이 높다. 이런 가운데 한국의 장로교단 소속 세 개의 신학교들이 강의 교류를 한 그 배후에는 주광조 장로가 있었다. 

1996년 제 1회 주기철기념강좌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개최된 후 기념강좌가 총신대학교와 고신대학교에서도 차례로 열렸다. 1959년 예장통합과 합동이 분열된 후 처음으로 장로회신학대학교 소속 교수가 총신대학교에 와서 그것도 전체 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강의를 했고, 총신대학교와 고신대학교 교수가 장신에 가서 강의했다. 1959년 예장통합과 합동이 분열되고 1963년 고려파가 환원된 이후 처음으로 세 학교가 강의교류를 한 것이다. 이 아름다운 전통이 앞으로도 중단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기독교 인재양성이다. 김상복 목사와 함께 주광조 장로가 배후에서 이끌어온 주기철기념사업회에서는 오래전부터 장로회신학대학교만 아니라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과 고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상당수의 신학생들에게 “주기철장학금”으로 매 학기 등록금 전액을 지급해 오고 있다. 이 장학금의 수혜를 받고 졸업한 신학생들이 한 둘이 아니다. 이들 중 상당수가 목회 일선과 신학교 강단에서 주기철 목사의 순교적 신앙을 이어가고 있다. 

참으로 주광조 장로가 한국교회사에 남긴 족적이 뚜렷하다. 물론 아버지 주기철 목사에 이르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가 남긴 발자취는 한국교회사에 소중하게 간직되어야 할 것이다. 이 땅에 신앙과 삶이 일치했던 걸출한 지도자 주광조 장로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많은 결실을 한국교회에 남겨주셨다. 모세를 빛나게 해준 아론처럼 그는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진정한 섬김의 리더십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앞당기며 한국교회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만들어주었다.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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