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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라크마 1367 명상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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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모든 것을 일단 멈추고
가만히 자리를 해봅니다.

모든 변화는 일단 정지에서 시작이 됩니다.
우리는 그동안 허둥지둥 헐레벌떡 허겁지겁...
삶을 깊게 음미 한번 하지 못한채
바쁘게 밀리고 쫒기면서 살아온 것은 아닐런지요.

먼저 몸을 가만히 두어 봅니다.
주변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반응하지 않고
손가락 하나 눈동자도 음직이지 않습니다.
이렇게 처음 시작 할 때는
명상으로 안내하는 차분한 기운을 가진
음악을 작게 틀어도 좋겠습니다.

가부좌 자세도 좋고 반가부좌 자세도 좋습니다.
의자에 앉는 것도 좋습니다.
쇼파는요.
예, 다 좋습니다.
어디에 앉더간에 허리는 곧추세웁니다.

숨을 길게 여리게 일곱번 정도를
내 쉬고 들이 마십니다.
이젠 들숨과 날숨을 계속 알아차립니다.

그리고나서 자기 몸을 알아차립니다.
먼저 몸의 구석구석을
입으로 머리--- 하고  알아차립니다.
이어서 목--- 하고 잠시동안 알아차립니다.
이어서 등---
이어서 허리---
이어서 엉치---
이어서 허벅지---
이어서 장단지---
이어서 발---
이어서 배---
이어서 가슴---
이어서 턱---
이어서 입---
이어서 코---
이어서 눈---
이어서 귀---

이어서 몸 전체를 알아차립니다.
이어서 방 전체를 알아차립니다.
이어서 세상, 지구 전체를 알아차립니다.

알아차림으로 숨이 들어 오는 들숨과
숨이 나가는 날숨을 지켜 봅니다.
들어오는 들숨에 하나, 나가는 날숨에 하나
들숨에 둘, 날숨에 둘
들숨에 셋, 날숨에 .....
들숨에 열, 날숨에 열.
다시 들숨에 하나, 날숨에 하나
들숨에 둘, 날숨에 둘
열을 헤아리면
다시 하나로 돌아 옵니다.

뭐 이렇게 해서 무슨 깨달음이
마음의 평화가
내지는 몸이 건강 해지겠냐
하는 의심이 올라올 것입니다.

예, 그러면 그런 의심들도 그냥 바라봅니다.
의심이라고 이름 붙이지 말고
왜 이러지 하고 판단하지도 말고
단지 바라 보기만 합니다.

공중에 나는 새를 보면
들에 핀 꽃들을 보면
보면
그다음에 오는 것은 근심 걱정하지 않는
삶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랍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지 않고, 관하지 않고
그동안 그것에 대해 생각을 해 온 것입니다.

느티나무를 느티나무라고 이름 붙이고
보는 순간에
이미 느티나무는 제대로 만날 수 없답니다.
그 나무는 느티나무가 아니기때문입니다.
느티나무는 단지 이름이지요.
그 이름은 느티나무 자체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단지 내 머리 속에서 생각하는 것이지요.
생각에 불과한데 그것을 사실로 알고 말입니다.

이런 거짓들로 부터 깨어 나오고 싶지 않으세요.
삶이 이런 비 본질들로 꽉 차있는데
그것도 모른채 평생
그런 생각세계에만 빠져 허우적 거리다가
생을 마감하는 것은 정말 억울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깨어나십시요.
깨어나면 내가 그것들을 마음대로 하지만
깨어나지 못하면 그것들이 나를 마음대로 합니다.
그러니 깨어나십시요.

깨어나는 것이 무엇이냐구요.
깨어나기는 깨어나기지요.
깨어나 보면 깨어나기를 압니다.

그 깨어남의 시작이자 완성인 호흡 관찰.
들숨과 날숨을 지켜 봅니다.
이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나가
할 수 있는 수련 방법입니다.

약간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하면
훨씬 부드럽게 잘 된답니다.

하루에 한 두번은 의도적으로
장소와 시간을 정해서
30분정도는 해 나아갑니다.

일상 생활을 하면서도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려 갑니다.
그렇게 호흡을 알아차려가게 되면
이제껏 만나지 못했던
마음의 평화와 침묵을
삶의 풍성함과 신비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이 숨은 누가 쉬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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