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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자유’라는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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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라는 선물 

- 백소영 교수(이화여대)
 

살성(殺性)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라 했다. 평생 피를 부를 팔자란다. 하여 아비는 그 일을 막겠다고 갓난 아들을 제 손으로 죽이려 했다. 그러다 아기 앞을 막아서는 제 아내를 죽이고 말았다. “네가 첫 살인을 하는구나!” 어찌 아이의 잘못일까? 

그러나 그것이 타고난 운명이라 믿은 아비는 아이의 살성 때문에 어미가 죽었다 그리 믿었다. 드라마 ‘무사 백동수’의 등장인물 ‘여운’의 이야기다. 하긴 살다 보니 사람마다 타고난 성향이 다르긴 한 것 같다. 그걸 오래 보고 많이 본 사람들이 나름 통계학적인 주장을 할 만도 하다 싶었다. 하여 사람의 사주팔자를 잘 본다는 ‘여운’의 아비도 제 아들의 타고난 성향인 살성을 알아본 모양이다. 

아이가 자라는 내내 “넌 살성을 지닌 아이야”라고 계속해서 말하고 그런 시선으로 보아온 아비. 아니라고 아무리 부정해도 아비는 그게 운명이라고 자꾸 주입한다. 어느 날 비밀암살조직인 ‘흑사초롱’의 살수가 되어 돌아온 아들이 차마 자신을 찌르지 못하는 것을 보며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아니구나! 아니었구나! 다행이다. 다시는, 다시는 네 칼로 생명을 죽이지 말거라.” 

다른 이의 표창에 등을 찔려 죽어가면서도 자신의 아이가 운명적인 살인자가 아님을 감사하며 죽어간 아비의 마지막을 보며 안타까움이 참으로 컸다. 정확하지도 않은 정보로 아이에게 부정적인 조기교육을 시킨 실수를 말함이 아니다. 어찌 사람이, 자꾸 자라는 생명이 제 인생을 스스로 변화시키고 선택할 ‘자유’가 없다고 믿었나 싶어서였다. 

여운이 살성을 갖고 태어난 아이인가 아닌가는 근본문제가 아니다. 그가 가진 성향이 무엇인가와 관계없이, 주체적 생명으로, 독립적 자아로서 그가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며 판단하고 선택할 자유혼을 가진 아이임을 몰라 본 아비의 지혜 없음이 더 큰 문제였다. 

상당수의 기독교인들이 고백하는바 예수는 탄생 때부터 십자가가 이미 운명적으로 정해진 것이었다고 말한다. 하여 예수의 인생에 다른 선택이나 다른 가능성은 없었다고 말이다. 하지만 “내 뜻이 아니고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그리 절절히 고백한 예수는 그게 운명이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것이었을까? 나서부터 자라는 동안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내 팔자야, 운명이야’ 그리 믿고 수동적으로 살아간 인생일까? 예수의 십자가는 운명의 결과라기보다는, 하나님의 큰 뜻을 알고 헤아렸기에 그 우주사적 계획에 동참하기로 스스로 결단한 자유혼의 증거였다. 

내게 예수는 인간이 가진 자유혼을 가르쳐 준 분이다. 스스로 선택하고 결단하는 삶의 힘을, 그 결과를 몸소 보여준 분이다. 저 좋은 대로 마음껏 노는 그런 ‘방종’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인 보다 큰 생명의 회복을 위해 스스로 죽는 선택을 한 자유의 인간이다. 

타고나는 성향이 전무하다고는 말할 수 없겠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자유’라는 선물이 함께 주어졌다.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는 일에 동참하기로 선택할 자유, 하나님의 뜻에 반(反)하는 상황을 그치는 일에 참여하기로 결단할 자유 말이다. 종종 우리에게 주어진 커다란 선물인 자유를 잊고 팔자타령으로 현실을 받아들이려는 비겁함이 생길 때마다 잊지 말아야겠다. 내 삶의 선택을 가능케 하는 자유의 힘은 타고난 성향보다 크다는 것을.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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