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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하용조 목사를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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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용조 목사를 추모하며

- 황성주 국제사랑의봉사단 국제대표
 

영적 거목을 추억하며…

하용조 목사님은 CCC 선배라서 그런지 내게는 형님과도 같은 분이셨다. 온누리교회에서 사역할 때나 그 이후 파송을 받아 독자적으로 사역을 할 때에도 필요한 조언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그 때마다 핵심을 찌르는 통찰력과 선견력으로 나의 영안이 열리도록 도움을 주셨다. '거목 사이를 걷다 보니 키가 커졌다'는 말처럼 그 분을 뵙고 나면 키가 석자나 커버린 느낌이었다.

하 목사님 자체가 성령님의 작품이기에, 혹여 드러날 수 있는 인간적인 약점에도 불구하고 목사님에게는 항상 영적 거목의 풍모가 있었다. 나를 만날 때면 항상 하시던 말씀, '자신과 기질이 같은 멀티 플레이어'라고 하시며 좋아하시던 모습도 잊을 수 없다. 목사님이야 말로 교회뿐 아니라 두란노사역, 해외선교사역, 그리고 CGN-TV를 통한 미디어사역까지 복음을 위해 모든 영역에서 모든 도구를 다 활용하신 '진정한 멀티 플레이어'이셨다.

간암 수술을 받기 이전에는 사도행전적 비전의 영성을, 수술 이후에는 수년 간의 투병생활을 통해 체득하신 연약함에의 영성을 깨닫게 해 주셨다. '아프고 보니 삶의 군더더기가 다 없어지더라'라는 말씀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는 말씀이 실감나도록 말씀사역은 깊이가 더해지셨다. 또한 성령사역을 통해 폭풍처럼, 바람처럼 엄청난 영적 영향력을 남기셨다.

국제사랑의봉사단을 시작하면서 조언을 구했더니, '교회는 1차 산업이요, 사역은 2차 산업이요, 선교는 3차 산업이다. 모든 교회, 모든 사역은 궁극적으로 선교를 지향한다.'며 확고한 선교관과 선교적 교회론을 피력하셨다.

1993년 1월, 방글라데시 찔마리로 제1기 사랑의 봉사단 의료봉사를 떠날 때 일이었다. 내 손을 꼭 잡고 5,000불을 쥐어 주시면서 '하나님께서 황 박사에게 남이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눈과 남이 들을 수 없는 것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주셨다'며 기도해 주시던 목사님의 자상함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1999년 교회 개척을 위해 온누리교회를 떠날 때 2,000/10,000 사역자로 하 목사님과 모든 교역자들의 축복을 받으며 파송을 받은 감격도 아직 생생하다. 기쁨으로 파송해 주시던 목사님의 스케일과 포용력에 감탄했고 그 때 주셨던 파송패는 많은 기념패 중에서 유일하게 간직하고 있는 기념패이다.

2004년 분당에서 꿈이있는교회를 창립하며 감사 예배를 드렸었는데, 온누리교회 설교를 뒤로 하시고 꿈이있는교회 주일 11시 예배에 오셔서 '꿈꾸는 교회, 춤추는 교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선포하시며 격려해 주시던 사랑을 잊을 수 없다.

2006년 KWMA와 같이 백만 자비량선교사 파송운동을 시작할 때 조언을 구했을 때에는 서로의 바쁜 스케쥴로 인해 중국 베이징 공항 대합실에서 만났었다. 더욱이 목사님은 불편하신 몸인데도 그 만남을 기뻐해 주시며 '어떤 교회든, 어떤 단체든 먼저 치고 나가는 모델이 있어야 이 운동은 성공할 수 있다'며 지혜를 빌려 주셨다.

마지막으로 목사님을 뵌 것은 작년 일본 도쿄에서 '에든버러 선교대회 100주년 기념 포럼'에서였는데 안식년 이후 변화된 삶과 당시 하고 있는 사역들과 비즈니스를 소개해 드렸더니 자기 일처럼 기뻐하시면서 격려해 주시고 기도해 주셨다.

목사님을 추억하며, 목사님을 칭송하거나 그분의 삶을 미화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오직 모든 영광을 주님께만 돌린다. 연약한 한 인간을 위대하게 들어 쓰신 주님을 찬양할 뿐이다. 그리고 목사님을 통해 크리스천의 삶이 얼마나 풍성하고 아름다운지를 계시해 주신 주님께 감사드린다. 그 동안 이렇게 귀한 분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주님께 영광을 돌린다. 할렐루야!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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