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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하용조 목사가 남긴 족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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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용조 목사가 남긴 족적

- 박용규 교수(총신대)


한국의 복음주의운동의 선구자였던 하용조 목사가 65세의 일기로 지난 8월 3일 소천했다. 

2009년 김준곤 목사, 지난해 옥한흠 목사의 소천에 이어 한국교회는 또 한명의 복음주의 거목을 잃었다. 하용조 목사는 7번이나 암수술을 받는 등 병약한 가운데서도 수많은 사역을 감당하며 근대 복음주의운동을 선도했던 대표적 복음주의 지도자였다. 

옥한흠, 홍정길, 이동원과 더불어 복음주의 4인방으로 통했던 하용조는 그 중에서도 문화를 읽는 안목이 탁월했으며, 천부적인 비즈니스적 재능을 타고 났다. 

1946년 해방 이듬해 태어나 2011년 8월 3일 소천하기까지 65년의 짧은 생애 동안 그렇게 많은 족적을 남긴 한국교회 지도자도 드물 것이다. 

연예인교회, 두란노서원, 온누리교회, CGNTV, 대학과 신학교, 제자훈련과 성령운동의 접목, 일본선교와 러브 소나타, 강해설교 등을 통해 하용조 목사는 복음주의 문화운동을 한국교회에 저변확대 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복음주의 이상을 잘 다듬어 대중들에게 전달하는 일에 있어서 그를 능가할 사람이 없었다. 그가 찬사와 비판을 동시에 받았던 이유도 거기 있다. 다음 몇 가지 점에서 지난 30년 동안 그가 한국교회사에 남긴 족적은 뚜렷하다. 

첫째, 하용조 목사는 기독교문화운동을 한국교회에 저변확대시킨 기독교문화운동의 개척자, 선구자, 창달자였다. 그는 복음의 사각 지대일 수 있는 연예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복음사역에 동참시켰으며, 수많은 책을 출판하여 대중들에게 다가갔다. 



영미의 기독교 문화 동향을 한국에 소개하고 교회 사역에 과감하게 접목시킨 인물도 그였다. 또한 영상과 선교를 접목시킨 위성방송 CGNTV는 다양한 컨텐츠를 통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 전 세계에 흩어져 사역하는 수많은 선교사들에게 다가갔다. 최근 일본 선교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한 러브 소타나 역시 그가 남긴 기독교문화운동의 결실이었다. 

둘째, 하용조 목사가 남긴 또 하나의 족적은 온누리교회 설립과 성장이다. 1985년 설립된 온누리교회는 짧은 기간 동안 규모에 있어서 세계적인 교회로 성장했다. 온누리교회가 폭발적인 성장을 이룩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제자훈련을 도입했지만 그것만을 고집하지 않았다. 성령운동에 대해서도 하용조 목사만큼 열린 사람도 드물었다. 시카고 윌로우크릭 커뮤니티 교회의 구도자예배를 도입해 국내에 열린 예배를 처음 도입한 사람도 그였다. 

그는 CCM이라는 현대기독교음악을 교회 예배에 도입하고 이를 한국교회 안에 저변확대 시켰다. 현대 대중들의 심성을 정확히 파악하고 이 시대 문화의 코드를 가지고 대중에게 다가갔다. 그는 교회의 문턱을 낮추고 대중들에게 교회의 문을 활짝 열어 제 쳤다. 그 결과 온누리교회는 폭발적인 성장을 이룩하며 한국근대 기독교 역사에 또 하나의 성장신화를 이룩했다. 

셋째, 출판문화를 통해 복음주의운동을 저변확대시켰다. 그가 간행한 정기 간행물 <생명의 삶>, <빛과 소금>, 그리고 <목회와 신학>, <그 말씀>은 한국 복음주의 기독교출판문화의 새장을 열며 복음주의운동의 창구역할을 했다. 



1980년대 어느 출판사도 감히 엄두를 낼 수 없었던 그 시절에 두란노서원은 QT 책자 <생명의삶>을 출간해 경건훈련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었고, <빛과 소금>을 출간해 한국교회 평신도들에게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를, <목회와 신학>을 통해서는 목회 현장과 신학을 연결해 신학과 동떨어진 목회현장, 목회현장과 무관한 신학이 존재하지 않도록, 그리고 <그 말씀>이라는 책자를 통해서는 일선 목회자들에게 복음주의 설교가 무엇인가를 일깨워주어, 한국교회 그리스도인들과 목회자들이 가정과 직장과 교회와 사회 속에서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주었다. 

마치 미국의 복음주의 운동이 신학적으로는 몇몇 출판사와 JETS(Journal of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를 통해, 그리고 교회 지도자들에게는 지를 통해 다듬어지고 정리되어 널리 확대될 수 있었던 것처럼, 한국 복음주의 운동은 신학적으로는 <성경과 신학>을 통해, 평신도들에게는 <빛과 소금>을 통해, 그리고 일선 목회자들에게는 <목회와 신학>을 통해 더 다듬어지고 정리되어 나갔다. <빛과 소금>이 평신도들에게, <목회와 신학>은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에게 복음주의운동의 창구가 되었다.



넷째, 하용조 목사가 한국교회사에 남긴 또 하나의 족적은 강해설교였다. 그는 제목설교에 익숙했던 한국교회에 현대 복음주의 설교가로 널리 알려진 데니스 레인 목사를 초청해 강해 설교세미나를 열어 한국교회 목회자들에게 본문에 기초한 강해설교를 소개하고 널리 보급시키는 일에 앞장섰다. 그러면서 강단에서 본문에 충실한 강해설교를 선포했다. 변하는 세상(changing world)에 변하지 않는 말씀(unchanging Word)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기독교의 사명이라면 하용조는 이 일에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 

마지막으로 하용조 목사가 남긴 한국교회사적 족적은 기독교학교운동이었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까지 지난 20년간 혼신을 다해 기독교학교를 세우는 일에도 앞장섰다. 횃불 트리니티 신학교 총장, 신동아학원 이사장을 맡으며 전주대학교, 한동대학교, 횃불트리니티 신학교 운영에 직 간접으로 참여하며 한국교회에 기독교학교운동을 저변확대 시켰다. 특별히 신흥 명문대학으로 부상한 한동대학교 발전에 하용조 목사는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와 온누리교회의 전폭적인 지원이 없었다면 한동대학교의 오늘의 영광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놀라운 사역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비판도 없지 않았다. 세계 여러 곳에 설립한 온누리교회, 조웰 오스틴의 <긍정의 힘> 출간으로 대변되는 지나친 마켓팅도입, 열린 예배, 은사운동과 성령운동의 지평확대, 최근 교회 건축문제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하용조 목사 목회 철학에 동의하든 하지 않던 그가 이 땅에 남긴 족적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기독교 문화의 불모지 한국에 복음주의 문화운동을 저변확대시킨 하용조, 그는 미국에 잭슨 시대를 열었던 잭슨 대통령처럼 시대를 앞서가며 한 시대를 선도했던 대표적 복음주의자였다. 

그런 면에서 하용조 목사는 한국교회에 한국 복음주의운동의 신화와 과제를 동시에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한국의 복음주의 지도자들은 복음주의 이상이 변하지 않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사회와 세상에 끊임없이 접근할 수 있는 신앙인, 그런 평신도 지도자들을 육성해 기독교의 대 사회적인 책임과 영향력을 확대해 하나님 나라를 세상 속에 건설하는 것임을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교회는 복음전파와 복음의 순수성 계승, 무엇보다 높은 윤리의식을 가지고 복음의 대 사회적 민족적 책임을 충실히 감당해야 할 것이다.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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