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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처서(處署) 무렵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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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는 ‘입추’, ‘처서’ 이런 말들이 참 귀에 설었다.
나중에 ‘입추는 가을이 문을 열고 들어서는 것이고 처서는 가을이 본격적으로자리를 틀고 앉는 것’이라는 어머니의 설명을 들으며 가을이 그렇게 오는 거구나 싶었다. “처서가 오면 독 안의 곡식도 준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처서 무렵엔 여기저기 궁핍하기 마련이다. 그나마 풍성한 수확이 기다리고 있다는 희망이 그런 궁핍함을 견딜 만하게 해주었다. 그 무렵 일이다.
가을걷이를 풍성하게 해주려는 듯 곡식이 쑥쑥 자라고 있는 논에 한떼의 소들이 들이닥쳐 벼농사를 망쳐놓은 일이 있었다. 어머니는 누구보다 안타까워하며 망연자실해 계셨는데, 소 주인이 찾아왔다. 백배사죄하는 주인에게 어머니는 감정을 내보이지 않으시고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어쩌겠어요.” 한마디만 하시고 어쩔줄 몰라 하는 소 주인을 돌려보내셨다. 이것을 보고 있던 이웃집 아저씨가 펄펄 뛰면서 망쳐놓은 벼값을 돈으로 환산해 다 받아야 한다며, 우리 이웃들을 위해서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막무가내로 언성을 높이셨다. 어머니가 안 받아내면 당신이 대신 가서 달라고 하겠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이웃 아저씨에게 그러마고, 염려하지 마시라고 하면서 소 주인을 찾아가셨다. 저녁 때, 잘 다녀오셨냐고 묻는 내게 엄마는 고개를 저으셨다.
“그 아저씨 양말에 구멍이 많이 났더구나. 옷차림도 누추하고 … 처음부터 받을 마음이 없었다. 이웃 아저씨가 맘 상할까봐 그냥 다녀오는 척했어” 하신다. 우리 어머니, 그 너른 품을 나도 언제쯤이면 닮아갈 수 있을까. 어머니의 넉넉한 마음처럼 올 가을도 그렇게 다가오리라.
- 홍미옥, 전남 광양시 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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