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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은혜로 사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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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년 전 금식하며 기도하든 때를 떠올려 본다. 나는 막다른 골목에 서 있었고 뭔가 돌출구가 필요했다.  사흘을 금식했다. 그러나 상황이 사흘 만에 달라질리가 있겠는가. 다시 닷새를 하였다. 아직도 실마리가 보이지를 않는다. 그래서 아예 기도원으로 들어갔다. 3주간을 작정하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열흘쯤 지나면서 회개가 터지기 시작하였다. 그 동안 금식하며 기도하면 뭔가 어떻게 되겠지 하고 막연히 기대하는 상태였다. 그러나 실상 문제는 내 자신에게 있었다. 하지만 나는 변화되기를 원치 않고 있었다. 상황은 내가 바라는 대로 해결되고 내 자신은 달라지기를 원치않는 모순 속에 갇혀 싸우고 있었다. 그렇게 씨름하다가 터진 것이 회개였다. 내가 회개하였다기보다 성령께서 나를 회개시키셨다고 함이 옳을 것이다. 지나온 내 모습을 활동사진처럼 떠올리면서 하나하나 통회하기 시작했다. 그 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거나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일로부터, 알면서도 인정하지 않거나 버리기 싫었던 일에 이르기까지 감추어진 나의 추함과 거짓됨이 드러날 때마다 고통으로 몸을 떨었다. 노트에 하나하나 써내려갔다. 내 모습이 너무나 참담하여 실로 가슴이 쪼개지는 아픔을 싸안고 자복하며 몸부림하였다. 막연히 탈출구를 찾으려고 시작했던 기도는 나의 부끄러운 모습을 처절히 발견하는 것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이 과정을 통해 나는 몇가지 사실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첫째는 나를 알기가 쉽지않다는 사실이다. 지극히 거짓되고 추함에도 불구하고 평상시 그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며 살고 있다. 작은 거짓말 하나에 얼마나 깊은 교만과 이기심이 숨어 있는 지를 보는 것이 그리 쉽지 않다. 엄청난 잘못을 범하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을 합리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둘째로  ‘죄’는 실체라는 사실이다. 죄는 나를 사로잡고 움직이는 힘이었다. 삶을 내 의지대로가 아니라 죄에 끌려 다니며 살고 있었다. 성경에서 바울선생은,“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 도다...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라고 고백하신다.
셋째 죄는 무서운 것이라는 사실이다. 죄의 실상을 온 몸과 영혼으로 실감한다는 것은 참으로 끔찍하고 두려운 체험이다. 죄된 마음이 곧 지옥임을 확연히 보았다. 바울사도의 부르짖음 떠올랐다.“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너무 놀라고 두려워서 죽기를 간청하였다. “하나님 저에게 용서하신다는 말씀 한 마디만 해 주옵소서 그리고 저를 지금 불러 가 주소서 ”

이제 오늘 내가 이처럼 살수 있는 것은 어인 일인가. 오직 한마디 “은혜”일 뿐이다. 누군가의 말 그대로 덤으로 사는 인생이다. 죄됨을 참으로 깨달은 날이  다시 나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해산의 고통이 있듯, 다시 태어남의 고통 또한 죽음처럼 깊고 큰 것이었다.
죽음 같은 죄를 실감한 자는 또한 그처럼 큰 자비를 비는 것 외에 다른 필요를 느낄 여유가 없다. 그리고 이 때에 다가오는 용서의 음성은 도저히 형언할 수 없는 환희요 감격이다. 그야말로 “은혜”다. 나는 죽었다. 그리고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 내 인생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다. 덤으로 주어진 하루하루를 살 뿐이다. 그러나 이 덤으로 주어지는 하루하루가 이전의 천날보다도 귀한 것이 아닌가.
때로 내 자신의 분수를 모르는 둣 살다가도 정신을 가다듬고 보면  나는 또 다시 그분의 은혜로 살고 있음밖에 달리 확인할 것이 없다. 그리고 아직도 내 속에 뿌리 깊이 남아 변화되기 어려운 속성들이 있음을 실감할수록 더욱 그러하다.
요즈음 한국은 썩은 부조리들을 있는대로 들춰내어 척결하느라 여념이 없다. 정가에서는 의원들, 장관들이 옷 벗김을 당하고 군가에서는 별 떨어지는 소리가 대지를 놀라게 하고 있다. 과거의 수치들이 드러나는 고통이다. 국민들은 속이 시원하도록 펼쳐지는 개혁의 물결에 갈채를 보내고 있다. 이런 마당에 자신을 돌아 봄이 마땅하리라. 예나 지금이나 나는 별반 가진 것도 없는 사람이요 그런 유명한 이들처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만한 자도 아니다. 그러나 나 홀로 통회의 눈물을 흘리며 그분 앞에 섰을 때 나의 모습은 사람들 앞에 벗겨진 저 분들의 수치나 고통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추함과 부끄러움이었다.
비록 사람에게 벗김을 당하여 드러나는 개혁의 대상은 아니라 할지라도 나를 지으시고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께서 나를 벗기시고 계시다. 아니 내 스스로 벗은 모습으로 그 분앞에 나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눈 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고 깨우친다.
남의 수치를 벗겨내는 일에 발이 빠른 세태속에서 조용히 그 분 앞으로 돌아가 나의 오만과 죄됨을 내놓고 용서받을 사람임을 인정해 보자. 그리고 새로운 삶의 자리를 부여받기를 여쭘이 마땅치 않겠는가. 바울선생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 하셨다.
“회개하라.천국이 가까왔느니라” 예수님의 첫 메시지였다. 물질욕과 명예욕 뒤에 숨어 우리를 조종하는 ‘죄’로부터, 빼앗긴 영혼을 되찾고  삶을 저 속 깊은데서부터 새로이 하기 위해 그분 앞에 서보자. 때묻은 나를 보는 아픔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유의 길이다. 그리고 만날 것이다. 그분의 넓으신 품, 우리를 새로이 만들어 내시는 사랑의 손을 그리고 용서의 음성을 -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1993년 5월 호주 "한국신문"에 실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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