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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사랑과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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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고통 
  
- 김교희 목사 (비손강교회)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다. 또한 고통의 종교다. 이 사랑과 고통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는 항상 기독교라는 세계 안에서 마치 하나인양 공존한다. 그래서 크리스천은 사랑하면 사는 방식을 알아야 하고, 고통과 친해지거나 인정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고통이란 어차피 이생을 사는 동안에는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 

세상의 많은 종교들에서는 착한 일 많이 하면 잘 살게 해주고, 못된 짓 많이 하면 벌을 준다. 자신만 잘하면 만사는 형통한다. 그런데 기독교는 그렇지 않다. 아무리 못된 짓을 해도 아무런 조건 없이 단번에 용서를 받는가하면, 어떤 사람은 아무리 그 인생을 아름답게 살아가도 그 삶에서 고난이 떠나지 않는다. 공식도 없고, 판례도 없다. 게다가 고난이 유익이란다. 괴로울 때 즐거워하란다. 
하나님께서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고통이라는 달갑지 않은 존재를 우리에게서 거두시지 않을까.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것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

인간이 신에게 득죄했다. 상식적인 해결법은 두 가지다. 죄를 지은 인간을 쓸어버리는 것, 죄에 대해 크게 보상을 하게 하는 것.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의 범죄에 대해 우리의 상식대로 움직이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죄를 지은 인간을 쓸어버리기는커녕 이들을 위해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을 죄를 해결하기 위한 제사의 제물로 내놓으셨다. 인류의 죄이므로 그쯤은 되어야 했나보다. 아무튼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아들을 죽게 하셨다. 그분이 느끼셨을 감정이 무엇이었을까. 충분히 짐작된다. 고통이었을 것이다. 

세상 어느 종교도 신이 인간을 위해 죽는 법은 없다. 신은 언제나 도도하고 고결하고 거룩하다. 하등한 인간과 같이 자리할 필요도, 인간을 사랑할 필요도, 따라서 인간에게 다정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언제나 먼저 행동하시고, 언제나 손해 보시고, 때로 미련해보이기까지 한다. 왜 그냥 용서해주면 되었을 일을 이렇게 어렵게 만드셨을까. 어차피 전능하시고 어차피 진리이시고 어차피 우주의 주인이신데, 그냥 용서해 주기가 무에 그리 어려웠겠는가.

도무지 무엇 때문에 그리 하셨을까. 너희가 천국에서 떠나서 죄인이 되어 고통을 받았으니, 그 고통을 나도 같이 받겠다는 것이다. 너희만 고난 중에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먼저 보이겠다시며 그리 하신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요한일서 4:8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만일 하나님께서 다른 신처럼 인간에게 그 지은 죄를 그대로 물었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 자체라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죄 지었다고 인간에게만 고통을 주고, 자신은 무사태평한 그런 하나님을 사랑이라 부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리하지 않으셨으니, 그래서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분을 도무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 하나님의 몸소 보이신 고통이 있었기에, 바로 그 고통으로 나를 살리신 것이기에 내가 당하는 인생의 고난 따위는 주님의 걸으신 그 길에 비해 감사하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당하는 고난에 오히려 감사할 수 있게 된다. 세상 사람들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도 안 되는 이 사건이 바로 우리가 주님을 예배하고 높다 찬양하는 이유인 것이다.
우리 인생의 삶이 고난 가운데 있는 이유는 또 있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그들의 사랑을 죽음으로 끝내 이루었다. 전쟁터에서 병사들은 전우를 위해 죽음을 마다하지 않는다. 왜 유독 이들에게는 죽음이라는 가장 두려운 일이 이리도 가볍게 느껴질 수 있는가. 바로 이들은 고통을 함께 나누었기 때문이다. 

굳건한 ‘관계’를 맺게 하는 가장 단단한 끈은 고통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가장 단단하고 밀접한 관계를 맺으시기 위해 스스로도 고통을 받으셨고, 인간에게도 고통을 쉽게 거두시지 않은 것이다. 이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고난과 고통의 의미다. 끈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우리 삶에서 그치지 않는 고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은 그 고통은 반드시 끝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온전하게 회복된 그 때의 그 곳에서 우리는 고통이 배제된 온전한 사랑 안에 거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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