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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내몽고 초원의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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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몽고 초원의 십자가

- 김덕균 교수(성산효대학원대학교)


언제부턴가 초원길의 주역 몽골리안이 남겨놓은 기독교 문화를 직접 답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세 차례나 내몽고 답사를 하였지만, 주로 드넓은 초원에서의 유쾌한 승마체험과 황폐한 사막화 현장에서의 자연환경 체험이 대부분이었고, 종교문화에 대한 체험은 많지 않았다.

그나마 가본 곳이라곤 몽골족의 라마불교와 이슬람문화 정도였다. 내몽고 어딘가에 남아있을 기독교 문화 찾기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유라시아대륙을 지배하며 세계 최대의 국가를 이루었던 몽골리안이 동유럽과 중앙아시아를 원정하면서 접한 기독교가 몽골 현장에 분명 남아 있을 것이란 생각은 하였지만, 막상 찾아볼 겨를은 없었다.

한 곳에 머무는 것을 고집하지 않는 그들만의 삶속에서 종교적 개방성과 그 가운데 온존하는 몽골 기독교의 흔적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작은 단서 하나하나를 소중히 여기며 차 한 대 빌려 내몽고 이곳저곳을 누볐다. 하지만 문헌 속의 현장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찾은 내몽고 박물관, 거기서 우리는 반가운 흔적을 발견했다. 몽골 최초의 기독교인들이 사용했던 십자가와 그 문양이 전시되어 있었다. 내몽고의 숨겨진 보배를 박물관에서 찾은 것이다.

황금색 동판으로 만든 십자가경교 특유의 십자가 문양. 경교 십자가 문양 아래 연꽃이 있고, 시리아 문자가 새겨져 있다.다양한 십자가 문양. 왼쪽과 가운데 십자가 문양 안에는 불교의 상징 卍자가 새겨져 있다. 오른쪽은 비둘기가 잎을 물고 있는 형상이다.

몽골인들의 기독교와의 만남은 13세기 칭기즈칸의 유럽원정 이후이지만, 그 이전에도 만남의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다.

1145년에 나온 문헌에 “페르시아와 아르메니아 너머 극동지방에 사는 요하네스라는 사제왕이 있는데, 그는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비록 네스토리우스 교도이기는 하지만, 기독교를 신봉했다.”(김호동, 동방기독교와 동서문명)는 내용이 있는데, 사제왕과 그 백성들이 바로 몽골인이다. ‘사제왕 요한’이라 불리는 몽골인 지도자와 그 백성들이 기독교를 믿었다는 서구 최초의 기록이다.

훗날 몽골의 ‘사제왕 요한’이 같은 기독교를 믿는 유럽사회에 친서를 보냈다는 전설도 있고, 십자군 전쟁에서 열세에 놓였던 유럽사회가 ‘사제왕 요한’을 찾아 구원요청을 하려고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몽골인들의 기독교 역사가 결코 만만치 않음을 보여준다.

한편 1204년에서 1221년 사이에는 ‘다윗왕’이라는 별칭을 가진 몽골리안 지도자가 칭기즈칸에 대항하다 고배를 마시고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진출하여 이슬람에 대항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바로 그 사람이 몽골초원 서부에서 활약하던 나이만족의 군주 타양 칸의 아들인데, 나이만족 대다수가 이슬람을 거부하고 기독교를 신봉했던 사람들이다.

몽골리안의 동유럽 원정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던 시절(1241년) 유럽은 이 가공할 기마군단을 막아낼 여력이 없었다. 성난 파도처럼 밀려오는 몽골의 침략에 유럽은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다가 1242년 몽골군대가 갑자기 작전을 중단하고 철수하게 되는데, 최고 지도자가 죽으면서 지도층 분열이 심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철수하면서 기독교 신앙이 함께 전달되었다는 점을 염두할 필요가 있다.

대원제국을 건설한 쿠빌라이는 불교신자였지만,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모친의 영향으로 기독교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1274년 이후 두 차례나 몽골 지배하에 있던 중국을 여행하고 쓴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에도 몽골의 기독교 영향에 대한 내용들이 소개되어 있다. 앞서 말한 나이만족이나 게레이트족이 모두 네스토리우스교(기독교)를 신봉하던 유목부족이었다는 것이다.

내몽고의 수도 후허하오터에서 서북방으로 19km 지점, 웅구트족의 왕성이 있던 올론 숨에 기독교 유적이 있음도 이를 증명한다. 십자가와 시리아 문자가 새겨진 비석이 발견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700여년 전 몽골 제국 시절 기독교를 신앙했던 웅구트족이 남긴 기독교관련 유물이다.

학자들은 이곳이 당시 기독교의 일파였던 네스토리우스교도의 유적임을 확인하였다. 네스토리우스교도들이 사용하던 특유의 십자가 문양과 형식이라는 것이다. 1280년에는 내몽골 지방에 네스토리우스 교단의 주교구가 설치되었다는 것은 내몽골 지역에 기독교도가 제법 많았다는 방증이다. 그리고 그들은 오늘날 내몽고 초원에 그들만의 십자가를 남겨 놓았다.

내몽고 지역의 기독교가 우리에게 남다르지 않게 다가오는 것은 고려사회와 몽고(원나라)의 특수한 관계 때문이다. 40년간이나 몽골의 지배를 받으며 고려사회에 전래된 기독교, 일명 야리가온교를 생각한다면 내몽고 초원의 십자가는 고려 기독교의 흔적일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면 너무 앞선, 빗나간 생각일까?




황금색 동판으로 만든 십자가, 경교 특유의 문양 십자가, 경교 십자가 문양 아래 연꽃이 있고, 시리아 문자가 새겨져 있다.(사진 위 왼쪽부터) 다양한 십자가 문양. 왼쪽과 가운데 십자가 문양 안에는 불교의 상징 卍자가 새겨져 있다. 오른쪽은 비둘기가 잎을 물고 있는 형상이다.


- 출처 : 뉴스미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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