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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한국교회 첫 선교지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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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첫 선교지의 추억

- 전정희 종교부장(국민일보)           


6년 전 중국 산둥성 웨이하이시에 체류한 적이 있습니다. 웨이하이는 우리나라로 치자면 제주도보다 조금 더 큰 행정자치 규모입니다. 

저는 그곳 선교사로 파송된 한국인 목사님의 사역지를 따라 원덩이란 지역 교회를 방문하게 됐습니다. 조선족이 주를 이룬 가정교회였습니다. 가정교회는 중국 공산당이 인정하는 소위 삼자교회와 다르지요. 비인가교회라고 보시면 됩니다. 기독교의 복음 확산을 우려한 종교정책의 결과로 일제강점기 우리 교회 상황과 비슷합니다. 

30∼40명이 모였던 그곳 가정교회 신앙생활은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148㎡(45평) 아파트교회. 교인 대개는 산둥반도에 한국 기업이 진출하면서 일자리가 생기자 멀리 동북3성에서 오신 분들입니다. 옌지를 중심으로 한 지린성 일대 말입니다. 

그분들은 월 10만∼15만원 정도의 급여를 받고 고된 노동을 했습니다. 자녀 대개는 고향에 두고 왔고요. 또 그들보다 더 고달픈 탈북자도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교회는 안식처였습니다. 예배, 찬양, 교제가 이뤄졌고 일자리 정보도 나누었습니다. 목사님은 이들을 위해 멀리 떨어진 면 단위 폐극장을 얻어 자립형 회사를 추진하기도 했습니다. 폐극장에선 임시로 탈북자와 환자 등이 생활했습니다. 

당시 한족 한 분이 폐병에 걸린 아들을 위해 그곳에서 기도원식 요양을 했습니다. 그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을 위해 모든 교인이 기도하는 모습에 놀라 예수를 영접했습니다. 핏기조차 없던 17세 아들은 어느 정도 회복됐고요. 그러자 그 아버지는 목사님의 만류에도 아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고향에서 병이 악화되어 부랴부랴 폐극장에 다시 왔으나 끝내 숨지고 말았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었죠. 

그 지역, 원덩이 100년 전 한국교회의 첫 선교사 파송지였다니… 지난 2주간 연재한 ‘한국선교 100년’을 통해 알았습니다. 이 얘기 다음 주에 한 번 더 하겠습니다.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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