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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간의 한계와 하나님의 인도 (왕상 19: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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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본문개요 엘리야는 선지자로서의 자신의 임무에 매우 충실한 사람이다.왕상 18장에는 그의 가장 뛰어난 활동상이 소개되어 있다.그러나 19장에는 전혀 상반된 모습으 로 상황이 역전된다.그러므로 본문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깊은 묵상과 해석 이 필요하다.분명히 19장만을 본다면 틀림없는 엘리야의 실패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전후의 문맥을 살필 때 분명한 하나님의 의도가 전제된 인도하심 이었다.

개역성경에는 9-14절 까지를 하나의 문맥으로 제시했으나 내용중심으로 사고단위 를 정할 때 8-18절 까지로 잡는 것이 해석과 의미파악에 훨씬 용이하다.

 2.주제 인간의 한계와 하나님의 인도

3.설교개요 9절 부터 14절 까지의 말씀은 15-18절 까지의 말씀을 위한 전제과정이었다.

이세벨의 종교탄압에 대항한 엘리야가 갈멜산의 승리이후 최대의 상승무드를 타 면서 스스로의 자아도취에 빠져들었다.그것이 10절과 14절에 증명되었다."왜 여 기있느냐"에 대한 엘리야의 대답은 "내가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히 일했습니다" 라는 것이었다.설교자가 어떠한 신관을 갖느냐에 따라 엘리야에 대한 평은 달라 질수 있다.엘리야를 순간적으로 교만해졌던 하나의 인간으로 볼 것인가아니면 그의 자부심과 고백 그대로 열성적인 하나님의 종으로 볼 것인가 18장에서의 엘리야의 당당한 모습에 비출 때 19장에서 보여준 엘리야의 태도 는 너무나 상반된 모습이다.엘리야는 4절에서 "나의 목숨을 거두워 주십시오"라 고 간구했다.그러나 하나님은 천사를 통해 "일어나 먹고 마셔라.아직도 너의 갈 길이 멀다"라고 하면서 그의 사명이 아직 끝나지 않으셨음을 일깨우셨다.이 말씀 에 엘리야는 힘을 얻어 8절에서 "일어나 먹고 마신 후 계속"남쪽으로 걸어서 드 디어 하나님의 산인 호렙산에 도착을 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시기 위해 매우 의도적인 질문을 던졌 다."네가 무슨 일로 여기에 와 있느냐"하나님은 거듭 반복해서 동일한 질문을 던졌다.그러나 엘리야는 하나님의 정확한 의도를 몰랐다."왜 그런 질문을 하실까 "를 생각하기 보다 그의 맺힌 한을 호소하였다.물론 엘리야의 사정을 하나님이 모르실리 없다.그래서 하나님은 18절에서 "바알에게 무릎 꿇거나 절하지 아니한 자 칠천명을 남겨 두었다"는 매우 충격적인 사실을 알려준다.

갈멜산에서 850명의 우상 선지자를 상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증거한 엘리야였 음에도 그의 심신은 이토록 상처받고 처절하게 파괴되어 있었다.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이 무엇 때문인지를 알려고 하는 여유가 없었다.그만큼 현실세계는 고통이 동반한다.그리고 인간은 누구나 약하다.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를 물리친 것은 그가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붙들어 주시고 도구로 사 용해 주었기 때문이다.엘리야의 하나님은 엘리야가 이 사실 모르기를 원치 않으 셔서 그에게 다짐을 받고 새로운 사실을 안내해 주셨다.

엘리야는 똑같은 내용의 음성을 하나님으로 부터 두번 반복해서 듣는다."네 가 무슨 일로 여기에 와 있느냐네가 왠일로 여기에 와 있느냐" 앞의 질문을 받고난 다음 엘리야는 11절에서 산이 갈라지고 바윗돌이 산산조각나 는 이적을 체험하게 된다.그리고 이어서 지진이 발생했다.그다음에는 불길이 지 나갔다.그래서 저자는 12절에서 이러한 방법들이 하나님께서 출애굽시에 쓰셨던 방법이라고 소개했다.

하나님의 의도는 "엘리야야 너는 누구를 믿느냐네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 이냐"하는 것이었다.제아무리 강한 사람일 지라도 피곤하면 약해진다.인간은 인 간일 뿐이다.인간은 절대로 하나님이 될 수 없다.그래서 바울은 이 사실을 너무 나 잘 알았다.바울은 자신이 강해질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 하다고 고백했다.성도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만 강해진다.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보내 주셨다.예수는 우리의 약함을 극복하는 승리의 비결을 제시해 주셨다.그러나 지금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것을 믿지 아니함으로 사용 치 못하고 있다.

왜 하나님께서 동일한 질문을 반복하셧을까에 대하여 깊이 묵상하자.그리고 하나님의 의도를 깨닫자.엘리야는 하나님의 능력이 지나간 다음 "고요히 속삭이 는"음성을 들었다.그래서 13절에 "여호와께서 오신줄을 깨닫고"그는 겉옷으로 얼 굴을 가리고 굴 밖으로 나왔다.하나님은 엘리야에게 한번 더 질문하신 후 그에게 새로운 사명을 부여 하셨다."다시 되돌아가"라는 것이었다.혼비백산해서 도망쳐 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야만 했다.감정으로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없다.오직 진리로서만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다.사람의 방법으로는 역사를 변화시키지 못한다.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방법을 소유할 때 성도는 역사를 변화시 키는 주역이 될 수 있다.

 엘리야는 하나님을 오해하였다.자기 자신이 "하나님을 위하여"살아왔다는 자 부심을 가졌다.실제로 엘리야의 행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온 인생임이 틀림없다.하지만 그는 매사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깨닫지 못했다.하나님을 위하 여 열심히 일하고자 하는 의욕은 분명히 있었다.그러나 진정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그는 하나님을 향한 열정만으로 살아왔다.

만일 그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하여 더 많이 촛점을 두었더라면 그는 결코 이세벨 에게 기지는 안았을 것이다.물론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휴식과 더불어 새로운 사명을 주시려 하였다.그리고 엘리야의 환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완전한 주권을 알려주시기를 원하셨다.

내 힘으로 하나님을 위할 수 있다.그러나 엘리야처럼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 다.그러나 하나님의 사람 스데반 집사는 반대자들의 핍박 앞에서 얼굴에 광채가 있었고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무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하기를 주여 저들의 죄를 저들이 알지 못합니다.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였다.하나님의 성령에 사로잡힌 스데반은 끝까지 하나님의 주권에 모든 것을 의탁하였다.그러나 자신의 의지로 하나님을 위한 엘리야는 계속되는 연단을 끝내 감당치 못했다.결 국 그에게는 하나님의 성령이 필요했다.우리가 자신의 의지로 제아무리 열심히 일한다 하여도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수없는 것이며 단 순히 흉내만 낼 뿐임을 알아야 한다.

내가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일하셔야 한다.하 나님은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 를 위해 일하시기를 원하신다.하나님은 모세에게 "너희 자신을 위하여"아무 것도 만들지 말라고 하셨다.그리고 그 이유를 바울을 통하여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시 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라고 하셨다(롬8:31).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일하시도록 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하나님의 사정을 알아야 한다.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아는 것이 하나님의 사정을 이해하는 것이다.사람의 사 정도 사람의 영 이외에는 모르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정은 오로지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만 알수있다.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성령은 사람이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깊은 것 까지도 통달한다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성도가 이 땅에서 하나님 창조하신 본래의 목적에 합당한 생활을 누리는 것이다.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여 생명의 법에 순종하 며 살아가기를 원하신다.각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모두 다르다.그것은 하 나의 공식으로 표현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분명한 사실은 죄의 권세와 싸워 이겨 야 한다는 사실이다.사탄의 권세는 우리를 약하게 만들고 병들게 만들고 사망에 이르게 한다.이세벨의 위협 앞에서 엘리야는 약해졌다.그리고 낙심하여 도망쳤다. 그러나 하나님은 엘리야를 한적한 곳,주님의 음성을 들을만한 장소로 인도한 것 이다.

하나님은 고요한 중에 엘리야에게 말씀하셨다.주님의 음성은 우리가 조용히 귀를 기울일 때 들을 수 있다.그러나 우리는 조용히 귀기울이지 못하기 때문에 들어야할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있다.하나님의 의도와 엘리야의 생각은 전 혀 달랐다.엘리야는 도망쳐 왓지만 하나님은 조용한 음성을 들려주시기 위해 그 를 인도하셨다.하나님을 위해 일해 왔지만 하나님의 사정을 이해하지 못했다.하 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오늘까지 우리는 어떻게 살아왔는가엘리야처럼 하나님을 위해 열심이 특출 나지는 않았을까봉사활동 때문에 마땅히 들어야할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마땅히 알아야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정을 헤아리지 못하 지는 않았는가를 조용히 점검해 보자.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내가 여호와를 위 하여"가 아니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이시라는 점이다."내가 여호와를 위하여"의 인생은 피곤한 인생이요,무거운 짐진 인생길이다.그 길에는 기쁨이 없다.오직 곤 고함과 의무감만이 있을 뿐이다.그래서 주님은 세상의 무거운 짐지고 율법의 무 거운 짐지고 의무감의 무거운 짐진 인생을 부르셨다.우리의 무거운 짐은 인생의 멍에가 되어 우리의 목을 조일 뿐이다.

엘리야는 하나님이 친히 구워주시는 떡과 물을 먹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 하 나님의 산 호렙을 찾았다.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났다.전에는 하나님 을 위해 일하는 자였으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는 역사로 바뀌었다.다 시 말해서 하나님께 쓰임받는 인생으로 변모되었다.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형편을 이해하는 자가 되었다.이제는 성령의 사람이 되었다."내가 하나 님을 위하여"에서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로 인생의 방향이 바뀌었다.

 강해설교는 반드시 청중의 결단을 유도하는 적용이 제시되야 한다.적용이 제시되지 않은 설교는 단순히 주해설교로 머물고 만다.그러나 문제는 적용제시를 어떻게 할것인가 하는 점이다.적용이란 생활에서의 결단촌구가 목적이다.그런데 생활결단 촌구가 자칫잘못하면 "율법주의"로 전락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이렇 게 되면 청중들은 오히려 설교에 부담을 느끼게 되고 설교자가 제아무리 명설교 를 할지라도 듣고 즐기는 설교로 전락하기 쉽다.이에 대한 해결책은 설교자 자신 이 성경의 영적원리를 발견하여 "진리가 주는 참자유"를 청중들에게 전달함으로 가능하다.그러기 위해서는 부단히 말씀을 묵상해야 하며 자신보다 먼저 진리를 깨달은 자들을 통하여 자신이 미처 깨닫지 못한 사실을 배워야 한다.아직도 율법 으로 구원받아야 된다고 가르치는 설교자가 있다.물론 말로는 "믿음으로"라고 하 지만 청중에게 윤리,도덕,교리만을 강조한다면 이는 틀림없는 율법설교다.이런 설교는 전혀 생명력이 없으며 영혼을 구하지 못한다.행동이 전환하기 위해서는 먼저 의식의 개혁이 선행되야 한다.신자의 의식개혁은 오직 진리에 대한 깨달음 만으로 가능하다.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려 하지말고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 하시도록"하는 원리를 깨달을 때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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