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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산소망 죽은 소망 (벧전 0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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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는 바야흐로 로마 황제중 가장 악명 높은 폭군 네로가 집정하던 시기에 그 핍박의 강도가 날이 갈 수록 더해가던 시기에 핍박받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이 편지를 씁니다. 핍박하는 주인공은 악명 높은 네로황제 입니다. 그는 어머니와 스승 세네카의 도음을 받아 로마의 황제가 되었지만 자신의 권력을 확장시키기 위해 자신의 어머니와 아내를 살해하고 마침내는 스승 세네카 마져 차례로 죽인 비 인간 적인 인물입니다. 아직 이방세계에서 연약한 교회는 여러면에서 로마의 눈에 거슬리는 존재였습니다. 황제 숭배 놀음에 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습니다. 신분의 질서도 무시하고 함께 모이는 것이 이상하게 보였습니다. 자기네 끼리 매주일 뭔가 먹으면서 이것은 내 살이니.. 이것은 내 피이니... 라고 합니다. 그래서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의 살과 피를 마시는 식인종이라는 모함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기분 나쁜 것은 그들의 삶이 자기들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물귀신과 같은 심보가 있습니다. 자기 혼자 더러우면 견디지 못합니다. 그래서 범죄를 하는데도 친구를 청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르게 사는 사람을 보면 괜스리 배가 아픕니다.
[카타곰의 순교자]라는 책을 보면 로마에 카타콤이라는 지하 동굴이 있는데 핍박을 피해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거기서 살았다고 합니다. 미친 네로의 광기가 점점 더해갈 때 배교하는 사람들이 늘어갔습니다.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압박을 가해옵니다. 그러한 시기에 사도 베드로는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럼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여 크게 기뻐하라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로 입문할 때 시험도 안치르고 재수, 삼수도 안해보셨으니 그런말하시지 어떻게 오늘 시험점수가 시들시들, 비틀비틀한데 기뻐하란 말씀입니까 베드로, 당신이 부부싸움 해보았나요 사업에 실패해 보았나요 빚쟁이들에게 정신없이 시달려 보았나요 사랑하는 아내가 나보다 먼저 죽는 아픔을 겪어보셨나요 멀정한 젊은 아들을 잃고 가슴에 피멍이 들도록 애통해 보았나요 육체의 질병으로 말할 수 없는 절망과 무기력감을 경험해 보셨나요 그렇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시련중에 크게 기뻐하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항의 한다면 베드로는 별 할 말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스승의 죽음을 앞에 놓고 겁에 질려 예수를 부인하고 도망 쳤던 사람이니까요. 그러나 이 말은 그의 말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임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2:18절에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시험당할 때 크게 기뻐하라는 말씀은 예수께서 친히 저와 여러분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고통중에 기뻐할 수 있습니까
-> 3절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단테의 신곡 이라는 유명한 책에 보면 지옥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큰 글자로 쓰여있다고 합니다.
"너희들 이곳에 들어가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지옥이야 말로 아무런 희망이 없는 세게입니다. 희망이 없는 세계가 지옥이라는 말도 되겠지요. 살아 있는 사람은 크건 작건 간에 누구든지 희망을 가지고 살갑니다. 오늘 보다는 내일이 더 나을 것이라는 희망이 없이는 인간은 한 순간도 살아가기 어렵습니다. 생명의 세계는 반드시 희망이 있습니다. 희망이 없는 세계는 죽음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전도서 9장에는

모든 산자중에 참여한 자가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나음이니라 (4)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죽어버린 시체한테는 더이상 희망을 걸 것이 없습니다. 등신이라도 살아있는 사람에게 희망이 있고 희망을 걸어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소망은 죽은 소망이 아니라 산 소망입니다. [산 소망]이라는데 주의를 기울입시다.
산 소망( )이란 살아있는 소망 그 이상의 것이다. 즉 단순한 묘사가 아니라 소망 자체가 행동하며 움직인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 소망은 활력을 불어주는 원리이며, 나타나게 되며, 흘러 넘치며, 우리의 기분을 고양시킨다. 그것은 전망이 밝은 것이며, 낙관주의 기질이며, 계속해서 사물의 밝은 면을 보는 것이며, 좋은 것만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도 많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공포와 반대되는 말이다. 이 그리스도인의 낙관주의 , 이 흘러 넘치는 소망는 두려움에 대한 여지를 허락 않는다. 이 소망은 그리스도인의 마음의 일상적인 상태가 되어야한다.

즉 산 소망이란 우리의 신념에서 나오는 심리적인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며 궁국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신이 소망의 본체이십니다.
죽은 소망은 우리가 환난 중에 기뻐할 수 있는 능력을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우리로터 참 기쁨과 평안을 앗아가버립니다. 죽은 소망이란 무엇입니까 세상의 썩어 없어질 죽은 것에 소망을 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소망이 아니라 자기가 만들어낸 환상도 죽은 소망입니다. 뿌리가 없기때문에 죽은 소망입니다.
예)석공의 소망

돌을 깨고 다듬는 자신의 일에 불만스러워하며 신세 한탄을 하며 지내는 석공이 있었다. "어떤 사람은 팔자가 좋아 대청마루에 모기장 치고 모시 홑이불 덮고 잠자는데 난 맨날 돌만 개고 있으니께 으이고 내신세야" 그 때 천사가 내려와 "그대의 소원이이루어지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석공은 순삭간에 큰 부자로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나라의 임금이 우아한 비단옷을 입고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지나갑니다. 석공은 생각합니다. "돈만 많으면 뭘해, 나도 저런 권력자가 된다면 졸부되었다고 놀리는 자들을 혼내줄 수 있을텐데 그러자 또 다시 천사가 내려와 "그대의 소원이 이루어지리라"했으며, 그는 일시에 권력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해에 비가 많이와 많은 백성들이 임금이 덕이 없는 탓이라고 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음 그는 뜨거운 햇볕이 되기를 원했고 그것 또한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곡식이 잘되도록 열심히 햇빛을 비추는데 석공이 밖에서 돌을 쪼면서 으이그, 저놈의 해는 낮잠도 안자나 연일 이렇게 내리 쪼이게.. 하고 욕을 하더랍니다.

세상의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참 평안을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환란을 이길 힘을 주지 못합니다. 우리가 산 소망을 곡 붙들때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환란을 [믿음의 시련]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그 시련을 크게 기뻐하라고 합니다. 그러한 고통스러운 환경을 제거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지 않은 점을 기억하십시다. 이 고통스러운 환경을 변화시켜달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그 환경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자세를 바꾸라는 것입니다.

환란을 보고 겁먹거나 절망하거나 원망하거나 또는 격분하지 말고 오히려 크게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사자굴에 들어갈지라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매어달릴지라도 크게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믿는다는 것 때문에 따돌림을 당하고 먹을 것 입을 것을 구하기 어려워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부부싸움 했어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사업에 실패했어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빚쟁이들에게 정신없이 시달리고 있어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배우자를 잃는 극한 슬픔속에서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멀정한 젊은 아들을 잃고 가슴에 피멍이 들도록 애통하면서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육체의 질병으로 말할 수 없는 절망과 무기력감을 경험하면서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산 소망을 주시기때문에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닥치는 환란 풍파가 아니고 우리가 참 소망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붙들었는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폭풍치는 갈릴리 다바를 걸어갔을 때 주님을 똑바로 바라보았을 때는 폭퐁이나 시퍼런 바다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능력이 그를 붙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주님께서 눈을 돌렸을 때 그를 둘러싼 환경이 두려움과 공포로 그에게 다가왔습니다. 풍랑에 이는 파도가 문제가 아니라 베드로의 믿음이 문제입니다. 우리의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주님을 온전히 바라보는 믿음이 문제입니다.
危 機

위기란 말은 위험이라는 말과 기회라는 말의 합성어입니다. 위험한 사건이나 환경은 객관적인 것입니다. 즉 환경 자체가 절망스럽다거나 슬픈 것이 아니라 그 환경에 대처하는 사람의 느낌이 절망스럽기도하고 소망스럽기도 한 것이입니다. 그래서 위기란 어떤 환경에 대해서 자신의 내적인 힘으로는 도저히 견디기 힘들때 발생하는 것입니다.

저는 광주 31사단에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입소하는 첫날 어떤 사람은 아이고 언제 21일이 지나가나. 죽을 맛이구나. 하는데 그중 한 친구가 입소한 첫날 한다는 말이 야 이제 20일 밖에 남지 않았다 라고 해서 모두 폭소를 터뜨린 적이 있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훈련소는 참으로 공포스러운 곳이었습니다. 저는 다시 훈련소에 끌려들어가 훈련 받고 있는 꿈을 꾸는 것이 가장 큰 악몽입니다. 3주동안 벌로 시작해서 벌로끝나는데 벌 받을 때마다 얼마나 두렵고 무서웠는지요. 그런데 어떤 친구는 벌 받으면서도 실실 웃는거 있죠! 나에게는 그 상황이 견디기 힘든 위기 였지만 그 사람에게는 오히려 병정 놀이 같았던 모양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산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꼭 붙드십시다. 그분은 우리의 힘이시요 우리의 방패시며 우리의 산성이십니다. 그분을 바라볼때 우리가 어떤 환란을 당하더라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내 지식을 붙들지 말고, 내 재산을 붙들지 말고, 내 알량한 재주 믿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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