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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환호하는 무리들 (마 2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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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나귀 위에 깔린 제자들의 겉옷
(마21:6) 제자들이 가서 예수의 명하신대로 하여 (마21: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A. 제자들의 순종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의 지시에 어떠한 반문도하지 않고 그대로 순종합니다. 자신들에게 주어진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순종’입니다. 제자들이 말없이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한 것은 성도들이 본받아야 할 자세입니다. 주를 믿고 따르는 모든 성도가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자질은 바로 순종의 마음가짐입니다.
B. 제자들의 믿음
여기서 제자들의 믿음을 보게 됩니다. 믿음이 없이는 이러한 순종이 나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믿음의 순종은 맡은 임무를 다 완수하는 지름길이었습니다. 믿음으로 하는 순종은 아름다운 결과를 낳습니다,
제자들의 순수한 믿음은 나귀 위에 자기들의 겉옷을 얹은 데서 절정에 달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합니다. 모든 성도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C. 제자들의 헌신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전적으로 순종했고 믿었습니다. 이들의 순수한 믿음과 순종은 나귀 위에 자신의 겉옷을 얹은 ‘헌신’의 정신에서 잘 나타납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귀한 소유물까지 다 바쳐서 예수님을 섬겼습니다.
그 당시 겉옷은 잘 때 이불로도 사용했습니다. 가난했던 제자들에게 있어서 겉옷은 전재산일수도 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표시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경의를 다 나타내었습니다. 비록 이들의 믿음이 불완전한 단계에 있었을지라도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습니다. 제자들의 헌신은 참으로 아름다운 마음가짐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직을 수행하는 모든 이에게 좋은 귀감이 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세상의 재물에 얽매여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제자들의 겉옷을 바치는 헌신의 정신이 이 시대 믿는 자들에게 필요합니다. 그리스도 대속의 사랑 앞에 우리의 섬김이 인색한지 반성하여 보고 온전한 헌신의 마음가짐을 취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헌신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튼튼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늘나라는 믿는 자들의 순수한 열정과 노력에 의하여 이루어집니다.

II. 길에 깔린 무리들의 겉옷
(마21:8) 무리의 대부분은 그 겉옷을 길에 펴며 다른이는 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A. 겉옷을 길에 폄
무리가 겉옷을 길에 펴고 예수님을 영접한 것은 주님을 왕으로 영접한다는 뜻입니다. 북이스라엘의 왕 예후도 그가 왕이 될 때 친구들에 의해 그러한 영접을 받았습니다.(왕하 9:13)
무리들의 대부분이 그 겉옷을 길에 편 것은 예수님이 행하신 많은 기적을 본 갈릴리 순례자들의 광적인 열렬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B. 나뭇가지를 길에 펴고 손에 들고 흔듦
무리들은 종려나무를 길에 펴거나 손에 들고 흔들었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는 승리의 상징으로 이 나뭇가지를 길에 펴거나 흔드는 행동도 역시 왕을 영접하는 의식 중의 하나로 주님을 환영하는 극진한 예우였습니다. 이처럼 예루살렘 거주민들은 예수님의 메시야성과 자신들의 왕되심을 기꺼이 인정하고 최대의 환영을 베풀었습니다.
성도들은 그 자신의 삶 중에서 왕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받들어야 합니다.
C. 예수님을 지상의 정치적 메시야로 영접함
오랜 메시야 대망 속에 살았던 유대인들은 메시야갸 지상의 왕으로 당장에 예루살렘에서 왕위에 오른다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하리라고 믿었습니다.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정치적 군주로만 생각했던 무리들은 주님께서 그들이 바라던 대로하시지 않자 실망하고 곧 예수님을 저주하고 조롱하는 파렴치함을 보였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대한 무리들의 환영은 열렬한 것이었으나 땅에 속한 영접이었습니다. 예수님께 대해 환호한 무리들의 잘못된 생각은 그 후 무서운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바리새인 서기관.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거절한 일은 악한 일입니다. 그러나 무리들 역시 주님을 지상의 정치적 메시야로 믿고 환호한 것 또한 잘못된 일입니다.
주를 믿는 모든 성도들도 자신의 인간적인 선입관 속에서 예수님의 신성을 논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지 않은지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은연 중에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실수를 범하기가 쉽습니다. 이를 위해 성도는 늘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III.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마21: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마21:10)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가로되 이는 누구뇨 하거늘(마21:11) 무리가 가로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A. 호산나
‘호산나’라는 말은 본래 ‘구하소서’라는 뜻의 히브리어를 음역한 것으로 여기서는 아마도 ‘메시야 만세’에 해당되는 의미를 가집니다.
원래는 초막절과 다른 행사 때 엄숙한 행렬을 지어 제단 주위에서 부르는 하나님께 대한 하나의 기원문이었습니다. 그 후 행사 때 감람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이 말을 사용했는데 그 뜻을 잃어버리고 점차 종교적인 환호를 의미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B. 다윗의 자손이여!
무리가 외친 다윗의 자손이란 말은 분명히 예수님을 메시야로 맞이하는 열렬한 환호의 소리입니다. ‘다윗의 자손’은 유대인에게는 메시야를 지칭하는 대표적인 대명사로 메시야가 담당하게 될 왕으로서의 역할을 강조합니다.
C. 무리의 환호하는 외침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는 말은 시편 118:26에서 유래된 말로 예루살렘 순례자들이 저 멀리 성전이 보이기 시작할 때 부른 노래였습니다. 이 말 역시 메시야를 환호하는 외침입니다.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는 말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라는 말과 상응하는 표현으로 메시야를 보내신 일에 대해 지극히 높으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의미를 지닙니다.
이러한 무리의 환호는 시편 118:25-26에 따른 것으로 메시야 대망에 대한 그들의 신앙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무리의 외침은 완전히 메시야적 고백으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승리의 입성으로 믿고 환호하는 외침이었습니다. 이 환호하는 무리의 찬송이 뒤에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라는 저주로 변하는 것을 볼 때 인간의 사악함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러나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는 것은 합당치 않습니다. 성도는 하나님 앞에 마음을 지켜 영원토록 찬송의 고백을 드려야만 합니다. 예수를 환영하는 환호성을 지르다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친 유대 백성처럼 우리는 실재 생활 속에서 이율 배반적인 태도를 가지고 생활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신뢰의 믿음으로 일관하지 못할 때 이러한 일은 발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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