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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전 03: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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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지난 연말에 제 주위에 대학입시를 치른 젊은이들이 몇 있었습니다. 제사촌동생들까지 초함해서 모두 여섯 명이 시험을 치렀는데, 그 가운데 단한 명만이 합격했고 나머지 다섯 명은 모두 낙방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저희가 종가라 지난 1월 1일에는 친척들이 모두 모이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가운데 한 집 식구들은 모두 빠졌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교우 여러분, 그까닭을 다 아시겠죠 그 집엔 아들만 넷입니다. 그런데 위로 둘은 쌍동이인데 형만 작년에 대학을 졸업했고 동생과 그 아래 둘, 도합 셋이 이번 대학입시를 치렀는데 모두 떨어졌기 때문이죠. 제 고종사촌 여동생 하나만 달랑합격했는데, 이거 붙었다고 내놓고 자랑하거나 기뻐하지도 못하게 되어 버려서 이번 신정엔 정말 가족들 분위기가 썰렁했습니다.
올해에는 그래도 별탈없이 지나가는 것 같지만 해마다 입시가 끝나면 낙방한 젊은이들 몇몇이 자살해 버리는 슬픔을 겪게 됩니다. 물론 자살하는이유는 갖가지입니다만, 어쨌건간에 저는 자살을 반대합니다. 지난 해에도시국문제로 몇 명의 젊은이가 자살했습니다. 전국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유가협이라고 하는 단체에서 제게 연락이 왔습니다. 장례를 치러야 하는데도와달라고... 이한열열사의 장례에 동참했다가 그 추모사업회 일을 맡게된 후로 제게는 "장례목사"라는 별명까지 붙어서 일만 터지면 제게 제일 먼저 연락해오곤 했습니다. 그러나 한 번은 제가 그 요청을 거절했죠. 유가협간사가 묻더군요. "목사님, 왜 그러세요"라고.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죽은 분들 앞에선 할 말이 없지만, 어쨌건 나는 자살은 반대다"라고.

물론 이 사회의 입시경쟁이나 정치적 문제들, 경제적 불의 등 구조적인문제들을 간과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얼마나 살기 어려웠으면 자기 새끼들을 죽이고 자살할까 하며 자살한 가장들의 안타까움을 되새겨 보기도 합니다. 자살은 하지 않았어도 입술이 갈라지고 퉁퉁부어 밥도 먹지 못하는 낙방생들의 심정도 이해해 보고자 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의 사전에는 "절망"이라는 단어는 없습니다.

2. 본론

키에르케고오르(S.Kierkegaard)라는 철학자는 절망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말했습니다. 신앙적으로 말한다면 절망은 믿음없음의 증거입니다.
자살 역시 하나님을 향한 최후의 반역인 것입니다. 저도 고등학교 입학시험에 떨어졌던 경험이 있습니다만, 만약 그때 제가 좌절하고 절망해 한숨만짓고 있었다거나 자살해 버렸다면 과연 오늘의 제가 있겠습니까여기가 끝이 아닙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덤비는데, 이루지 못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오늘 전도서 본문을 보면, 기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때가 있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있다..."(전3:1-8). 과연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때가 있습니다. 다만 지금할 일은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산상수훈 가운데 무어라 말씀하셨습니까 흔히 팔복이라고말하는 내용들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의에주리고 목마른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 이런 사람들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마5:3-10). 돈을 많이 벌고, 자식 많이 낳아 여생을 편히 보내고, 높은 지위를 누리며 떵떵거리고 사는 것이 복이라고 설교하는 경우도많이 봅니다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복있는 사람은 그런 사람들이 아닌 것입니다. 아마 우리가 그런 처지였다면 하나님이 어디 계신가 원망하고 저주하며 한을 품고 세상을 하직해야 옳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자들이복있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이르매 거두리라"(갈6:9)고 말씀하셨습니다. 피곤하다는 것은 앞의 낙심하다라는 말과 상통합니다. 즉 절망하지 말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신앙적 낙관론"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낙관론이야말로 참으로 우리 신앙인들에게 없어서는 아니될 필수불가결의 요소입니다. 어떤 절망적 상황에서도 샘솟아오르는 희망, 그 근원이 바로 진실한믿음입니다. 쉽게 달구어졌다가 금방 식어버리는 것, 금방 웃다가 또 금방울고, 뭔가 잘돼간다고 큰소리치며 장담하다가 또 안되겠다고 안절부절하는것. 이 모두가 우리의 믿음이 약하다는 증거입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은 세리 레위를 부르시는 기사로부터 시작됩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조롱하며 말합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눅5:30) 이렇게 말하는 그들은 과거로사람을 판단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들의 종교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랑하는 종교입니다. 과거의 자신을 현재의 자기, 나아가 미래의 자기와 동일시합니다. 더구나 그들은 가리키는 달은 보지 못하고 손가락만 보면서 나는의로운 사람이다-라고 떠벌일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회개시키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5:32). 예수님께는 과거에 그가 어떤사람이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의 미래상, 구원의 요구와그 가능성만이 중요한 것이지요. 그 다음 하나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오늘 말씀의 제목도 거기서 따온 것입니다. "새 옷에서 한 조각을찢어 낡은 옷에 붙이겠느냐" 또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겠느냐" 라는 말씀입니다. 흔히 39절 말씀을 보고 이것이 새 포도주보다 묵은포도주가 좋다는 말씀인가 하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핵심은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과거가 현재를지배한다고 보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시각에서 예수님의 교훈은 전혀새로운 것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과거에 그가 누구였느냐, 이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미래, 그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가 더욱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복음서기자 누가는 유대교를 낡은 옷, 또는 낡은 가죽부대와 대치시키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새 옷과 새 포도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며, 유대교라는 낡은 종교로부터 독립된 그리스도교를선언하는 것이 복음서 기자의 의도였으리라 보여집니다.

그런데 여기에 우리가 꼭 알아두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절망이나 그극단인 자살은 바로 과거, 엣날로 자신을 규정하는 데에서 비롯된다는 점입니다. 어제까지의 내가 오늘의 나요, 내일도 어쩔 수 없이 "그런 모습의나"이리라로 규정해 놓는 데에서 절망이 오는 것이죠. 아닙니까 낙심, 이것도 역시 비신앙, 아니 반신앙의 산물일 따름입니다.
지나간 일들에 얽매이지 마십시오. 레위는 자신이 세리였다는 사실에 연연하지 아니하고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했습니다. 조국을 팔아 식민지 앞잡이 노릇을 했었어도, 이제는 새로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그의 부르심에 응답함으로써 레위는 더 이상 세리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어엿한 제자 마태가 된 것입니다.

구민 공동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해 결산이 어떻고, 출석교인이얼마였고... 이런 과거에 더 이상 연연하지 맙시다. 오히려 우리 눈앞에 전개되는 "새로운 교회"의 모습을 바라봅시다. 물질주의, 황금만능주의의 노예가 되지 않는 교회. 세속주의, 권위주의에 물들지 않는 교회. 형식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진정으로 내실을 꾀하여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본분을 다하는 교회... 이러한 새 술을 담을 새 부대가 바로 우리 구민교회요, 또 교우 한 사람 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낙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조급한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대로 "때가 이르면 거두리라"는굳은 확신을 갖고 힘차게 전진합시다. 오히려 기뻐하며 선을 행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최상의 선물입니다(전3:12-13).

우리의 가정, 우리의 직장이나 학교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더 이상지난 일들에 얽매이지 말고 오히려 내일의 아름다움과 평화로움을 바라보며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삶에서 느끼는 기쁨과 누리는 보람이야말로 하나님 나라를 미리 맛보는 영광인 것입니다.
이러한 자세가 이 사회, 나아가 우리 온 겨레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전파될 때, 이 사회의 민주화와 조국의 자주화, 그리고 겨레의 통일은 더 이상소원이 아닌 현실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모두가 사람답게 사는 참세상이이룩되는 것입니다.

3. 결론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새해 첫 주일을 맞이하여 함께 예배드린 교우 여러분, 더 이상 과거의 나, 지난 날의 우리에 머무르지 맙시다. 1991년 이 새해에는 낙심, 절망, 이런 단어들은 멀리 내어던져 버립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을 불러서 당신의 제자로 삼으시고, 하나님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을 굳게 의지합시다. 때가이르매 거두리라는 희망 속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믿음과 희망이 오늘 새해 첫 주일을 맞이하여 함께 예배드리는 교우 여러분한 사람 한 사람의 가슴 속에 힘차게 솟아오르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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