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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가 쓰시겠다 (눅 19:2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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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도 예수님께서 여러 번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적이 있습니다.(① 아기 때 2:23절, ② 12살 때 2:42절, ③시험 때 4:9절, ④ 부림절 때 5:1절 ⑤장막절 때 7:10절 등)
그러나 오늘은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로 보통 이를 가리켜 <승리의 입성>이라고 부릅니다. 도 이 때 예루살렘의 사람들이 종려 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펴며 환영했기 때문에 <종려 주일>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날에서부터 이 한 주간을 고난 주간(the passion week)이라고 합니다. 또, 이 한 주간에 너무 중요한 사건들이 지나감으로 이 주간을 <큰 주>(the great week)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입성하실 때 헌신한 분들을 중심 하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먼저는 예수님께서 헌신하심에 대하여, 둘째는 나귀 주인의 헌신에 대하여, 셋째는 제자들의 헌신에 대하여, 넷째는 바리새인들의 비헌신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Ⅰ.예수님의 헌신

2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므나 비유911-27)를 말씀하신 후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셨습니다.
저 구약의 대영도자 모세가 죽음을 앞에 두고 느브산을 향하여 올라간 기사가 나옵니다. 신명기 32:48-52절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느브산에 오르게 하시고 저 멀리 가나안 땅을 바라보게만 하시고는 들어가지 못하게 하시고 그를 데려 가시기 위해 느브산을 오르라고 합니다. 이는 신광야 가데스의 므리바 물가에서 범죄한 까닭이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모세를 데려 가기 위해 느보산을 오르게 하실 때 모세는 말없이 느보산을 향하셔 올라간 모습을 봅니다.(신34:1-3)
그러나 예수님도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었습니다. 마가복음 10:32절에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저희가 놀라고 쫓는 자는 두려워하더라 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앞서서 가시었습니다. 그리고 또,
예수님은 제자들과 예루살렘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도착했습니다.(29)
여기 감람원이란 산은 감람 나무가 많아서 이 이름이 생겨졌고 예루살렘 동편 기드론 시내 건너 편에 있는 산으로 안식일에 가기에 알맞은 거리(약 2km 행1:12)로 해발 약 800m의 높은 산입니다. 이 산에 오르면 예루살렘 시가지가 한 눈에 내려다보입니다. 이 산에서 예수님은 늘 기도하셨고, 이 산에서 멸망해 갈 예루살렘을 내려다보시면서 우시며 기도하신 곳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예루살렘 시가지를 내려다보시면서 입성(入城)준비를 하셨습니다.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너희 맞은 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안은 나귀 새끼의 메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코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스가랴 9:9절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새끼 나귀니라” 한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 제자 둘을 보내 나귀를 끌고 와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들어오시고 성 가까이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 제자 둘을 보내 나귀를 끌고 와 타시고 입성하심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또 오늘 본문 바로 뒤 절 41절을 보면 “성 가까이 오시며 우셨습니다”
이는 멸망해 갈 도성을 보시고 목자의 상한 심령에서 우신 것이겠습니다. 이렇게 멸망해 갈 인류를 구원코자 예수 그리스도는 스가랴(9:9)가 예언한 것처럼 예언을 성취시키시려고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시어 그 주 금요일 날 인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십니다.
예수님은 성경을 이루려고 사셨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몸을 온전히 드려 헌신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마가복음 10;45절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증거한 것처럼 세상 죄를 지고 가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십니다.

Ⅱ.나귀 주인의 헌신

예수님께서 감람원이라는 산의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왔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너희 맞은 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하시매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나귀를 만났습니다. 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하므로 대답하기를 <주께서 쓰시겠다>하였습니다. 그러자 나귀의 임자는 아무 일언의 반구도 없이 가져가도록 합니다. <주께서 쓰시겠다>고 할 때 이들은 기쁘게 내 놓았습니다. 기쁘게 헌신했습니다. 여기서 “주”란 말은 정관사 붙어 있어서 곧 나귀의 주인을 가리키며 예수님 당신 자신을 가리킵니다. 또 주(the lord)란 말은 성경에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이러므로 “주가 쓰시겠다”는 것은 진정한 나귀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귀의 참 주인이시고, 이 사람은 사람이 한 번도 타 보지 않은 나귀를 기른 청지기에 불과합니다. 청지기는 나귀를 기르다가 주인이 쓰고자 하면 언제든지 내어 주는 것이 당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요 하나님이십니다.(요1:1-3) 그리고 저와 여러분의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은 만유의 주가 되십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의 주인이 되십니다. 우리의 생명도, 물질도,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도 다 주님의 것이요 내 것이 아니고 참 주인이신 하나님의 것, 예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께서 맡기신 생명과 모든 재능과 소유를 청지기의 자세로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거기에 진정한 행복과 신앙의 아름다움이 있겠습니다.
주께서 내게 있는 건강을 쓰시겠다
주께서 내게 있는 재능을 쓰시겠다
주께서 내게 있는 시간을 쓰시겠다
주께서 내게 있는 돈을 쓰시겠다
주께서 내게 맡겨 주신 자녀를 쓰시겠다 하실 때 나귀 주인처럼 내놓아야 할 것입니다. 진짜 주인이 쓰시겠다고 할 때 내게 있는 모든 것을 나귀 주인처럼 그대로 바치는, 아무런 불평 없이 그대로 드리는, 그대로 헌신하는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앞선 11-27절에 예수님께서 <므나> 비유를 의미심장하게 말씀하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습니다. 앞선 비유의 내용과 입성이 대단한 연관이 있다고 봅니다.
어떤 귀인이 <예수님을 가리키겠습니다.>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가면서 그 종 열을 불러 각각 한 므나씩 주며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도록 맡겼습니다. 귀인은 <자기의 돈>을 종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자유로이 마음대로 쓸 수 있도록 재량권을 주었습니다. 주인은 자기의 돈을 일단 맡기고 이래라 저래라 일체 간섭도 하지 않고, 감시도 없었습니다. 그것을 임으로 쓰고 활용하도록 전적으로 그들의 재량에 맡기고 떠나갔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일단 주인의 돈이지 내 것은 아닙니다. 주인의 배려로 맡겨진 것입니다. 다만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 쓰고 활용하는 것은 우리에게 자유로 하도록 임으로 맡겨 주셨습니다. 이렇게 쓸 수도 있고, 저렇게 쓸 수도 있고 드릴 수도 있고 드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내 임으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맡겨 둔 것 “주인이 쓰자”고 할 때 어떻게 하겠습니까
<주께서 쓰시겠다>할 때 머뭇머뭇할 것입니까
여기 나귀 주인은 일체 머뭇거리지 않고 생각해 보겠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주가 쓰시겠다>했을 때 오직 “예” 뿐이었습니다.

요사이 교회를 짓고 교회 비품이 필요하여서 그마그마한 분에게 부탁을 하면 두 가지 현상이 있습니다. ‘예,목사님 주께서 쓰시겠다면, 교회가 필요하다면, 해야지요’하면서 두말하지 않고 드리는 이가 있는가 하면, ‘생각해 보지요, 집에 가서 의논해 보고요’ 해 놓고 아직도 생각하며 아직도 의논 중인지 소식이 없습니다. 또 농촌 교회나, 선교사님들의 생활비나 교육비가 필요하다 해서 이야기를 했더니 ‘그거 제가하지요, 이것 내것입니까 주께서 내게 맡겨 주셨다가 주인이 되신 주께서 쓰시겠다면 언제든지 드려야지요’하는 성도를 만났습니다. 나귀 주인은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니 그대로 드렸습니다.

아마도 큰 나귀를 몇 해 동안 길러서 거기서 새끼를 얻어 한 수입을 보려고 할 때 주가 쓰시겠다고 할 때 드리려니 아깝지요. 그러나 그대로 드립니다. 사람이 탈 정도면 일 년 동안 애쓰고 수고하며 길렀을 것입니다. 그것을 그대로 드립니다.
Ⅲ.제자들의 헌신

예수님이 감람산이라는 산의 벳바게와 베다니에 왔을 때 제자 중 둘을 보내며 너희 맞은 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그 말씀하신 대로 했습니다.
이 때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가 매우 힘이 듭니다. 그 나귀 주인이 가만히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남의 나귀 말뚝에 메여 있는 것을 풀어 몰고 오다가는 도적으로 몰릴 가능성도 있고 따귀를 맞을 우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였을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제자들은 임자에게 물어 보지도 않고 무조건 풀어 끌고 오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임자가 뛰어나와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던 대로 <주께서 쓰시겠다> 하니 두 말 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여기서 한 진리를 깊이 깨닫은 줄로 압니다. 주의 말씀에 순종하면 괜찮다 아마 그것을 배웠을 것 같습니다. 주의 말씀대로만 하면 굉장한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을 체험했을 것입니다.

또 제자들은 35절을 보십시오.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놓고 예수님을 태웠습니다.
또 ”가실 때에 저희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폈습니다.“(36)
겉옷이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낮에는 사막의 뜨거운 태양을 가리우는 것으로 밤이면 사막의 추위에 이불 대신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자신들에게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것을 드려서 헌신한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제자들은 자신들의 겉옷을 벗어서 안장 대신에 나귀 새끼 위에 걸쳐놓고 예수님을 태웠고, 예수님께서 가시는 앞 길에 겉옷을 깔아 드렸습니다.
한편, 마태(마21:8)와 마가(막11:8)는 자기들의 겉옷뿐만 아니라 나뭇 가지를 베어 길에 펼쳤다고 했습니다. 요한 복음(12:13)에는 이 나뭇가지를 종려 나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 옛날에는 왕들이 행차할 때 왕에 대한 존경과 환영의 표시로 그러했습니다.(왕하9:13, 계7:9)만,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왕의 왕으로 알고 자기들의 있는 것으로 드려서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도록 하고 자기들에게 있는 것을 펴서 예수님이 지나가시도록 했습니다. 자기들에게 주어진 것으로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도록 했습니다. 자기들이 나뭇가지를 베어서 길에 펴고 흔들고 수고를 들여 예수님이 영광 받도록 했습니다.
우리는 종종 애인에게는 내 시간을 드리고, 시간을 내서 편지도 쓰고 선물도 사서 보내기도 합니다. 그이가 좋다면 뭐든지 하고자 합니다. 또 자식을 위해서라면 부모님들은 무슨 짓을 해서라도 그것을 해 주고자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우리의 생명의 주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만유의 주님께 우리의 온 정신과 생애를 드리는 헌신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제자들은 또 감람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자기의 본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찬송했습니다.
여기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이란 여리고에서 바디메오 소경을 고치신 일이나, 죽었던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일로 군중들은 충동했습니다.

이 당시 예루살렘 성과 길가에서는 마침 유월절을 지내려고 전국 각 처에서 몰려오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때 제자들은 저만큼 예루살렘 도성이 보이자 찬송을 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서는 영광이로다” 하며 찬송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예루살렘으로 오는 순례자들이 저 멀리 성전이 보이기 시작할 때 대 할례시 시편 113-118편에 있는 시를 외치며 찬송했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있는 겉옷을 펴며 또 마음 중심으로 예수님께 찬송하며 영광을 주님께 그대로 바치는 헌신을 했습니다. 이들은 순종을 통해 헌신을 했고, 이들은 자기들에게 있는 소중한 것을 드려 헌신을 했습니다. 이들은 온 마음을 다해 주를 찬송하고 영광을 소리 높여 주께 드리는 헌신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름 없는 나귀 주인이 드리는 나귀를 타시고, 제자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서 안장 대신에,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서 펴놓은 그 위로 나귀를 타고 지나실 때 찬양을 했습니다.
이렇게 찬양을 받으시며 입성하신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것은 자신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없애는데 있습니다. 이 예루살렘 입성을 두고 모두가 다 헌신하고 서로 섬기는데 거룩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나귀는 평화시에 이삿짐을 나르는 짐승입니다. 이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것은 예수님이 평화의 왕으로 오셨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면 진정한 평화를 선물로 주십니다. 세상 왕들이 다스리는 곳에는 권모술수가 있고 평화가 없습니다만,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 사람들은 항상 마음에 평안이 있습니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그 어디나 하늘나라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구원의 왕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은 죄인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철저히 당신 자신을 헌신하심으로서 죄와 사단의 권세 아래 신음하는 모든 인생들을 구원하러 오신 구원의 왕이십니다.

Ⅳ.비헌신하는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

39절을 보십시오.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했습니다.
지금 막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외치며 종려나무 가지를 베서 길에 펴며 손에 쥐고 흔들면서 기뻐 찬양하는 제자들을 못하도록 책망하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① 첫째, 그들은 예수님이 사람에 불과하기 때문에 메시아로 찬양함은 일종의 신성모독으로 여겼기 때문이요,
② 둘째, 군중들의 환호의 물결이 예루살렘에 주둔하고 있는 로마 군인들에게라도 알려지면 반란이라도 일어날까 봐서 오해를 받고 자기들의 자리가 흔드릴까봐 제자들을 자제시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종교 지도자들의 요청에 예수께서는 무엇이라 대답을 하셨습니까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박국 2:11 “담에서 부르짖고 집에서 들보가 응답하리라” 한 말씀을 예수님이 기억하시고 하신 말씀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범죄한 인류를 구속하시기 위한 것이므로 찬송하고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이를 저지한다면 돌 같은 자연계라도 소리를 지를 일입니다. 그러므로 인류를 구하려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온 마음과 뜻과 힘과 정성, 목숨까지 드려 헌신하고 호산나 찬양해야 할 것입니다.

199

4.

3. 2

7. 주일 낮 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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