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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이 주는 소망 (고전 1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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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대지방에서는 봄은 자연의 부활을 가져오는 계절입니다. 겨우내 꽁꽁 얼어붙은 대지가, 앙상하고 샛노랗게 말라버린 나무가지나 풀이, 봄의 따스한 햇살이 비취면 파아란 싹을 내어밀고, 순식간에 천지가 푸른 생명, 아름다운 꽃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충만한 부활의 장면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사상은 인간의 생각 속에는 원래부터 없었습니다.
어느 종교에서도 인간의 사후 영혼 불멸은 믿었지만 죽은 자가 다시 부활한다는 것은 믿지 않았습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사상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히브리 민족을 통해서 계시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 께서는 고린도 교회에 편지할 때 예수님의 부활을 본 5백여 형제들이 바울 생존 당시 태반이나 아직 살아 있었고, 바울 선생 자신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전15:3-8).

그러면 과연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삶에 어떠한 의미를 주는 것일까요

먼저

1. 절망에서 소망을 부활시킨 예수님이십니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생존은 완전히 절망에 빠져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와 그 자손들의 영혼이 즉시 죽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영혼이 죽어서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지게 되었으니 절망에 빠지게 되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육체가 병들고 노쇠돼서 죽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말씀 하셨으니 인간의 생명은 한정되어 살다가 병들고 노쇠해서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죽음의 절망에 떨어지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환경적인 절망에 부딪쳤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이 땅을 저주했습니다. 그래서 이 땅은 가시와 엉겅퀴가 나고 너희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살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저주와 절망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자들도 인간의 상황을 절망으로 평가했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인간은 죄책과 정죄의 절망에 놓여 있는데, 그것을 결코 인간의 힘으로는 이겨낼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허무와 무의미의 절망에 빠져 있어서 이 세상에서 아무리 영화롭더라도 그 삶의 의미와 가치는 알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또 이렇듯 '인간은 허무와 무의미의 절망에 빠졌으며 또 죽어서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니 죽음과 무의 절망에 빠진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정서적으로나 철학적으로 보아서도 절망적인 존재인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적인 절망을, 어떠한 사람도, 어떠한 문명도, 과학도, 어떠한 사회개혁도 건져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모든 절망을 당신의 몸에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박혀 몸찢고 피흘려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모든 사망과 절망의 세력을 다 정복하고 부활하심으로 소망의 부활을 이루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것은 죄악을 청산하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용서로써 살려주시고 하나님과 교통하게 하셨으니 영혼 부활의 소망을 채워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육체로 부활하심으로 인간 부활의 소망을 주셨습니다.
또한 저주를 청산하고 부활하심으로 축복의 소망을 우리에게 주셨으며, 용서와 의, 삶의 목적과 의를 부활시켜 주셨고, 영생의 부활을 가져다 주신 것입니다.

인간의 원래 절망적인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내일은 오늘보다, 다음달은 금번달보다, 명년은 금년보다, 영원한 미래는 현재보다 더 나아진다는 소망을 가지고 살수 있는 존재로 변화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부활을 통하여 인간의 가슴속에 영원히 소망을 부활시키신 것입니다.

2. 예수님은 미움에서 사랑을 부활시키셨습니다.
마귀는 아담을 꾀어 타락시킴으로 하나님과 인간이 원수가 되게 하였습니다.
그 결과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쫓겨나고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마귀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미움을 심어 주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 앞에서 하와를 원망했습니다.
'당신이 내게 죄를 짓게 했소'
하와는 또 뱀을 원망했습니다.
여기서부터 부부의 갈등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때부터 오늘날까지 어느 가정이나 부부의 갈등이 없는 가정이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함으로 마귀가 심어놓은 갈등인 것입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의 가정에는 비극이 다가왔습니다.
첫 아들 가인이 둘째 아들 아벨을 시기하고 질투해서 밭에서 돌로 쳐죽인 것입니다.
친족살상의 비극의 시작입니다.
형이 아우를 죽인 비극이 일어난 이후로 인류 속에는 미움이 꽉 들어차게 되었습니다.

이래서 오늘날까지 인간의 역사는 오로지 전쟁의 역사입니다.
민족과 민족사이, 부족과 부족사이의 전쟁으로 이어진 것이 인간의 역사인 것입니다.
인간은 전쟁을 하기 위해서 평화했고 또 평화할 동안에는 전쟁준비를 하고, 그후에는 또 다시 전쟁을 했습니다.
그때문에 이 세상이 생겨난 이후로 전쟁이 없는 때가 한번도 없었습니다.

인류는 제

1.2차 세계대전을 통해서 세상을 오염시키고 수많은 인명을 파멸시켰습니다.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사상 대결로 말미암아 5대양 6대주가 모두 다 전쟁터가 되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이 피흘림이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미움이 온 세상에 가득했는데 미움을 청산할 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미움을, 예수님이 오셔서 짊어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로마인, 유대종교지도자들, 일반 군중들의 미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께로 부터도 미움을 받고 버림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것은 온 인류의 미움을 주님이 대신 짊어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혀 이 미움을 멸하시고, 위대한 사랑의 화신으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을 보고 '주여 저들을 용서하옵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아무와도 대결하지 않고, 크신 사랑으로 이 모든 것을 감사하고 극복하며, 사랑으로 부활하신 위대한 사랑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예수님은 바로 사랑의 원천이되는 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인생속에, 구주로 모셔들일 때 하나님과 인간은 사랑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원수된 담은 허물어지고, 미움은 사라지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햇빛과 같이 비춰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으로 우리 마움속에 부은 바 됨으로, 우리의 영혼이 사랑 가운데서 기쁨으로 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사랑을 연결하는 가교가 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믿고 나오는 사람을 지극한 사랑으로 사랑해 주시고, 넘치는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분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인간과 인간 사이도 사랑으로 연결시키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속에 들어와서,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 주시면 받은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을, 부모는 자식을, 자식들은 부모를 사랑하게 됩니다.
친구를 사랑하게 됩니다.

성경에는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했지만 사람들이 행하기에는 도저히 불가능한 명령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으로는 할 수 없지만, 모든 미움을 극복하신 예수께서, 우리 속에 들어와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심으로, 원수조차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지해서, 우리의 삶 속에 사랑의 운동을 전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 이외에 우리의 운명을 변화시킬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율법과 칼로서는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구약 4천년 동안 하나님께서 준엄한 율법의 심판을 행했지만 결국 무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친히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은 수천만, 수억의 의인들을 만들어내고 있는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만이 우리를 변화시키고 새 사람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인간과 자연을 사랑으로 연결시킵니다.
오늘날 우리는 대지와 환경의 오염을 통해 스스로의 생명을 자멸로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저는 미국이나 캐나다, 유럽에 갈 때마다 부러운것이 있습니다.
도시가 완전히 푸른 동산입니다.
도시에 나무가 많고 공원이 많아 도시인지 산인지 모르는
그런 도시계획인 것입니다.
나무 한그루를 살리기 위해서 그 주위의 도시계획을 바꿔서 집을 짓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도시계획을 세우면 수십년, 수백년된 나무도 파헤치고 그곳을 벽돌의 숲으로 만들어버리고 맙니다.
이러고도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에덴을 벽돌동산으로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수풀이 우거지고 나무가 울창한 곳에 아담의 거처를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나라들은 에덴동산의 개념을 살려서 건축을 할때 자연환경이 좋은 도시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셨으니 자연과 화해하고 자연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새 한마리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연을 죽이면 우리도 죽습니다.
공장을 많이 세우고 돈을 많이 번다고 한들 그 폐수로 인해 물을 마실 수 없게 되고, 마신 사람이 중금속 병이 들어 생명이 단축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자연에 대한 사랑이 충만해져야 되고, 그리스도의 부활은 바로 이것을 이루어주시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참된 믿음을 부활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후 인간 구원에 대한 믿음이 다 사라졌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 불신앙의 포로가 되어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고백한 것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하나님께 인정받고 기사와 이적을 행하던 나사렛 예수가 우리를 구원할 줄 알았는데 빌라도에게 심판받고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었으니 우리의 구원의 소망은 사라졌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모든 인간의 마음 속에 구원의 소망을 다 빼앗아버리고 믿음을 파괴해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은 이런 인간 구원에 대한 궁극적인 믿음을 다시 부활시켰던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그리스도의 모든 가르침은 십자가에서 종말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죽은지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십자가는 재해석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실패도, 패배도, 절망도 아니요, 우리를 구원하는 위대한 대속의 근원이 되었다는 것으로 재해석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서 죄사함의 믿음이 부활했습니다.
성령 충만의 믿음이 부활했습니다.
치료의 믿음이 부활했습니다.
그리고 영생 천국의 믿음이 부활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심으로 십자가 고난을 통해 대속하신 은혜의 보증이 되셔서 모든 믿는 자의 가슴속에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부활시키셨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당신의 십자가에서 몸찢고 피흘려 값주고 사신 은혜가 반드시 계속 되도록 지금 보장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령이 그것을 보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야 말로 우리의 깨어진 믿음을 다시 부활시켜 주시고, 우리의 마음속에 흔들리던 믿음을 다시 확고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4. 예수님의 부활은 천국의 부활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고 가르치셨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가는 곳마다 죄를 용서받게 하시고, 성령의 감동으로 영의 세계를 깨닫게 하시고 이것이 바로 천국임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가는곳마다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내쫓으시고, 배고픈 자를 먹이심으로 천국의 역사와 속성을 가르치셨습니다.
천국에는 가난이나 저주가 있을 수 없고 배고픔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주님께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면서 죽음은 오직 이 세상의 산물이며 천국에는 죽음이 없다는 것을 확증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풍랑을 잠잠케 하심으로 천국에는 마음의 풍랑, 가정의 풍랑등, 풍랑은 있을 수가 없고 오직 주님의 의와 평강과 희락만이 꽉 들어차 있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백성들에게 천국의 속성을 보여주셨고, 예수님께서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인산인해로 주님을 따랐던 것입니다.
세상에서 고난당한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들어가는 천국의 영광을 바라보고, 맛보고, 체험하고, 새 삶을 얻었기 때문에 너무나 기뻐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천국의 나타남도 사라져 버리고 만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장사된 후 40일 동안에 한 사람의 죄인도 용서받지 못했습니다.
한 사람의 병자도 낫지 않았고 귀신도 쫓겨나지 않았습니다.
죽은 자가 산 적도 없습니다.
바로 모든 것은 어둡고 깜깜하고 절망이었습니다.
완전한 어두움과 절망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날이 이르자 다락방에 성령이 강림하셨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모든 사람 마음속에, 천국의 역사가, 또다시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천국의 나타남의 부활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부터 천국복음이 만국에 전파되었으며, 천국의 역사가 부활한 것입니다.

오늘날 천국은 이제 죽은 천국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부활하심으로 천국의 역사를 우리 가운데 이루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역사는 지금도 우리 가운데 계속 나타나고 있는것입니다.
죄사함의 역사, 회개를 통한 구원의 역사, 성령의 충만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영혼육간의 치료의 역사, 축복의 역사도 일어나고 있는것입니다.

우리가 성수주일하고, 십일조를 도둑질하지 않고, 주님을 공경할 때, 저주의 세상일을 멸하고, 아브라함에게 내린 축복의 역사를 우리 가운데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영생 소망의 역사도 일어납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가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 영생 소망의 역사가 우리 마음 속에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또 예수를 믿음으로 의의 역사가 일어나서, 의로운 천국 역사가 우리 가운데 가득하며, 평강과 희락이 마음 속에 넘쳐나서 말씀을 듣고 기도할 때,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셨다는 것은 분명한 역사적, 객관적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조작이다, 십자가에서 기절한 것을 무덤에 두었다가 살아난 것을 부활했다고 하는 것이다', 혹은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가고 부활했다고 한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사실 예수가 살아나지 못했는데 너무나 사모하던 제자들이 모두 다 히스테리에 걸려 환상을 보았다고도 합니다.

여러분,
12명의 제자와 500여명의 사람이 동시에 히스테리에 걸려서 환상을 본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거짓말을 통해 사탄은 오늘날도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려고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것은, 부활하신 후 세운 교회 가운데에 성령께서 오셔서, 부활의 역사로 천국이 우리 가운데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지금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고, 성령받고 방언하고, 성령의은사가 나타나고, 하나님의 축복이 아브라함의 축복으로 임하고, 마음에 죄 대신 의, 불안 대신 평안, 슬픔 대신 기쁨을 부어주는 천국 체험이 우리 가운데 능력있게 나타나고 있기때문에 사탄의 모든 말은 거짓으로 드러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받아들이는 자는 엄청난 삶의 변화와 소망과 사랑과 믿음과 천국의 부활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결코 과거의 역사적인 사건이나, 성경 속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건은 현실적인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으로 우리 가운데 계시는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를 모셔들일 때, 그 부활의 역동적인 역사가 여러분의 생활 속에 나타나는 것임니다.
여러분의 생애 속에 모든 사망의 세력은 물러가고 영광의 천국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소망의 부활을 여러분의 것으로 만드시는 부활절이 되시기르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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