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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죄 씻음과 회개 (행 02:3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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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2:37을 보고 우리는 베드로가 복음을 전했고 그 복음을 들은 자들이 회개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복음의 한 전도형태이다. 복음과 그 복음을 전하는 형태를 할 때마다 우리가 늘 익숙하게 듣는 것은 ‘회개하고 구원을 얻으라’,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으라’는 식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베드로의 설교에는 초청이나 설득의 의사가 없어 보인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셨다는 선언일 뿐이지 회개하고 믿으라는 말은 없다.
그런 의미에서 37절 이하의 말씀은 의아스럽다. 베드로는 그렇게 전하지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사 회개하고 구원얻게 하신 것이다. 그것이 사실임을 본문에서 살펴볼 수 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이 말씀이 원문에는 달리 표현되었다. 우리말 번역에는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고 되어 있어 마치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면 그 결과로 죄 사함을 얻는 것으로 문맥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갖고 있는 구원 얻는 방법에 대한 등식이다.
오늘 우리가 본 본문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이다. 뭣 때문에 그런가 죄 사함을 얻기 위함이냐, 죄 사함을 얻었기 때문에 회개하라는 것이냐는 문제이다.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마12:41)”
원어를 보면 ‘요나의 복음을 듣고’란 뜻이다. 마 12:41을 원문대로 해석해보면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설교를 듣기 위하여 회개하였느니라. 회개하라 그리하면 요나의 설교를 들을 수 있으리라”이다.
우리가 복음에 대해서 가장 오해하고 있는 것은 회개마저도, 예수를 믿는다는 믿음마저도 구원을 얻어내는 우리의 방법이라는 발상을 버려야 한다. 지금 여기 본문을 정확하게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 “회개하라”는 것은 구원을 얻었으니 회개하라는 것이다.
회개에 대해 ‘회개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등식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알고 있는 회개가 잘못 되었다는 ‘회심’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의 회개는 감정적인 요소가 전혀 없다. 그 단어는 감정적인 단어가 아니라 행동이다. 네가 가는 길이 틀렸으니 돌아서라는 것이다. 울고불고 땅을 치고 가슴을 찢지 말라. 그것은 회개가 아니라 애통이다. 회개는 내가 가는 길이 틀렸기 때문에 딴 길로 돌이키는 것이다.
우리는 울고불고가 아니라 우선 나와야 한다. 우리는 회개 자체가 구원의 조건이기 때문에 누가 많이 울었느냐의 싸움을 한다. 회개란 누가 더 자기의 잘못에 대하여 애통하며 아파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죄 씻음은 우리가 한 일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의 피로 씻어지지 우리의 회개로 씻어지지 않는다. 회개가 죄를 씻는 조건도 방법도 아니다. 주님이 씻는 것이다. 구원이란 우리가 생각할 때 말이 안되는 방법으로 되어 있다.
“하나님이여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리오며 사람이 서원을 주께 이행하리이다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 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니 우리의 죄과를 주께서 사하시리이다(시 65:1-3)”
3절을 주목하여 보자. ‘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니 우리의 죄과를 주께서 사하시리이다’ 이 말이 무슨 말인가 ‘나는 죄 짓고 왔다. 그러나 주께서 사하여 주실 것이다’ 거기에 무슨 회개가 있는가 죄 사함을 얻을 조건이 진술되어 있지 않다. 나는 죄를 짓고 돌아왔으니 주께서 씻어 주셔야‘한다는 이야기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이실직고하면 용서받는다. 세상에서는 바른대로 말하면 매를 맞지만 하나님 앞에는 용서받는다. 여기에 바로 기독교 신앙의 진수가 숨겨져 있다. 죄 씻음은 우리의 소관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소관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사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해내시고 씻어내신 것이다.
베드로가 ‘우리가 어찌할꼬’라는 반응을 보인 청중들에게 하는 이야기는 죄를 씻어라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 죄를 씻어 이제 우리들을 하나님을 자녀를 삼았으니 회개하라는 것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행전 26장에 나오는 바울의 회심 사건은 회개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준다.
“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 중에와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태를 유대인이 다 아는 바라 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저희가 증거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좇아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 이제도 여기 서서 심문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이 약속은 우리 열 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왕이여 이 소망을 인하여 내가 유대인들에게 송사를 받는 것이니이다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세를 얻어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가편 투표를 하였고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저희를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까지도 가서 핍박하였고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세와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왕이여 때가 정오나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서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방언으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아그립바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리지 아니하고 먼저 다메섹에와 또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 선전하므로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나를 잡아 죽이고자 하였으나(행 26:4-21)”
여기서 보면 사도 바울이 처음에 뭘 하겠다고 했는가 하면 9절에 있는 것같이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였다. 그런데 그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이다.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14절 하반절부터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16절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아서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증인으로 보내어 너를 증인으로 삼고 그 사람들을 구원하는 데 너를 보내겠다” 그래서 19절에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리지 아니하고 내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말한다.
사도 바울이 어디에서 회개한 것인가 그 음성을 듣고 회개한 것이다. 그러니까 회개 전에 이미 구원얻었고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회개라는 것은 대 사면령과 같다. 돌아오는 자는 사하고 안 돌아오는 자는 죽이겠다는 뜻이 아니다. 대 사면령이 내렸으니 돌아오라. 더 이상 악한 길에 서 있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로 불렀으니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라는 것이다.
‘이제는 너희가 죄 씻음을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얻었으니 빛의 아들들답게 살아야 될 게 아니냐.’ 이것이 회개하라는 것이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 2:1-6)”
이것이 회개이다. 회개란 죄인인 것을 인정하고 주께서 나를 구원해 주신 것을 감격해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죄인으로 죄의 종이 되어 살았었는데 하나님이 나를 자녀 삼으셔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참다운 의로운 길로 걷는 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회개는 구원을 결실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의미에서 구원된 우리에게 결실된 구원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구원은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갈 3:1-2)”
믿음이라는 말이 쓰일 때에는 들음이란 단어가 늘 쫓아다닌다. 듣고 믿음인 것이다. 믿음이란 것을 이렇게 생각하지 말라. 회개가 용서의 조건이 아니듯이 믿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 아니다. 회개는 용서받아야 할 조건이 아니라 용서받았기 때문에 돌이켜야 하는 요구요, 믿었다는 것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고 구원을 시켜준 하나님의 방법일 뿐이다. 그래서 믿음은 행위와 반대되는 입장에 서고 들음이라는 단어가 붙어 다닌다.
믿음이 자생적으로 출발하고 발전된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꼭 들었다는 말을 쓴다. 들었다는 것은 내가 믿음 것이 내 안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전해진 것을 믿었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 로마서 10장을 보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0-14)”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 그러나 믿음은 무엇인가 그의 이름을 부르려면 믿음이 있어야 한다. 믿음이 있으므로 주님이라고 부른다. 그 다음에 들어야 믿는다고 강조한다. 스스로 만들 수 없는 내용이라고 한다. 그 다음에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누군가 전했으므로 듣는다. 그 다음에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그래서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이 가서 대 사면령을 선포하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듣고 보니 옳은 말이었다. 이때 듣던 자들이 ‘어떻게 해야 옳습니까’ 그러니까 베드로가 말하기를 이제부터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는 인생을 살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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