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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출 17:8-16, 마 10:4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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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백년 동안 종살이를 하다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탈출하게 되었는데 이때에 영웅은 누가 무어라 해도 모세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바로 왕 앞에서 열 가지 재앙을 내리므로 바로를 혼내 주었고, 홍해 앞에서 당황할 때 홍해를 가르고 그 민족으로 건너가게 한 사람은 모세입니다. 물론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되었지만 모세를 통하여 나타났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그를 우러러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출애굽을 이야기할 때 모세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고 모세 이외의 사람들은 잘 생각나지도 않습니다.

오늘 읽어 드린 구약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날 때 아말렉족속이 나와 그 길을 막았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를 대장으로 삼고 군대를 조직하여 이들과 싸우게 되었습니다. 그때 모세는 산꼭대기에 올라가 관전을 하였는데 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겼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손을 내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금방 끝나는 것이 아니고 하루종일 계속되었는데, 나이 많은 모세의 팔이 아프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같이 따라 올라갔던 아론과 훌이 모세를 돌 위에 앉게 하고 양쪽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습니다. 그렇게 해가 질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이 대승리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승리를 가져온 사람은 앞장서 나가 싸운 여호수아와 산에서 손을 들고 있었던 모세일 것입니다.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한다면 분명히 이 두 사람이 가장 큰 상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여호수아나 모세가 아니라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봉사한 아론과 훌에 대해서입니다. 그들이 한 일이란 기껏 모세의 팔을 붙잡아 주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영화에 있어서 주연이 아니라 조역 내지는 엑스트라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있음으로 해서 모세의 팔이 하루종일 내려오지 않고 들려질 수가 있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표면에 뚜렷하게 나타나는 사람들은 아니지만 그러나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사람들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가 한편의 영화를 볼 때 거기에 등장하는 주연에 주목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주연을 돋보이게 해주는 것은 역시 조연들이나 엑스트라들인 것입니다.

달나라에 날아가는 우주 로켓트는 약 5백만 개의 부속품으로 되어 있다고 하는데 그 중에는 로켓트의 심장 부분에 해당하는 중요한 부속도 있겠지만 한 구석에 박혀 있는 지극히 작은 나사도 있을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나사라고 등한히 하다가는 언제 어느 때 사고를 만날는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나사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사 하나는 값으로 따지면 몇 푼 안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소홀히 하면 몇백만달라가 나가는 로켓트 전체가 못쓰게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조그마한 나사 하나는 로켓트와 맞먹는 매우 값비싼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언제나 주연에만 관심을 갖고 그 이름들을 자기 집안 식구처럼 잘 외우는 것입니다. 로켓트의 심장부는 굉장히 중요하게 다루면서도 나사 하나 정도는 우습게 여기는 것이 보통입니다. 사람들은 많은 것을 존중하게 되면서부터 그 많은 것을 이루는 하나 하나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게 되었습니다. 수백억 달라 수출한 것은 굉장하게 여겨져도 최저 임금도 받지 못하고 땀흘리는 한 여공의 인권은 아무도 관심을 가지려 하지 않는 것이 오늘 우리의 사고방식입니다. 수출을 많이 했다고 큰 회사 사장님들이 나가서 금탑 산업 훈장을 받지만 사실은 그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무명의 여공들이 아니었더라면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겠습니까 물론 사장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못지 않게 말단 여공도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나사 한 개가 로켓트 하나와 맞먹는 이치입니다.

그러나 이치가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누구나 다 사장이 되고 싶어합니다. 기왕에 영화에 나가려면 누구나 다 주연이 되고 싶어합니다. 사실 모든 풍토가 또한 그것을 조장하고 있습니다. 모든 영광은 주인에게 돌아가게끔 사회제도가 되어 있습니다. 엑스트라가 아무리 연기를 잘해도 무슨 상을 주는 법이 없습니다. 단체 게임인 축구를 봐도 그렇습니다. 언제나 신문에 이름이 크게 나는 사람은 최종적으로 골을 넣은 사람입니다. 골을 넣기까지 뒤를 받쳐 준 사람은 영광을 얻지 못하고 우연이라도 골 앞에 있다가 재수 좋게 집어넣은 사람이 그날의 영웅이 되는 것입니다.

이 사회는 언제나 영웅만 대접하지 그 영웅을 있게 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가지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영웅 숭배론을 쓴 카알라일은 말하기를 "역사의 중심은 위대한 인물을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으며, 평범한 사람들은 영웅을 위해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이제까지 사람들이 생각하던 것과는 정반대로 가르치셨습니다. 그는 분명히 영웅이 역사의 중심이라고 보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목마르고 주린 자들이 앞으로 올 새 역사의 주인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린아이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양 백 마리 중 한 마리를 잃어버리면 그것을 찾으러 나가고, 찾으면 기뻐서 잔치를 한다고 하셨습니다. 두 렙돈 낸 과부가 많은 헌금을 바친 바리새인보다 더 많이 냈다고 하셨습니다. 그는 의인(다른 말로 바꾸면 영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는 것이 나으리라"는 극단적인 말씀을 예수님은 하실 정도로 세상의 영웅 밑에 짓눌린 사람들을 귀중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자기가 영웅이 되려고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음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그도 한 때는 사탄의 유혹을 받았습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면 단번에 영웅이 될 것이 아니냐는 강력한 유혹을 받으셨지만 그는 그 유혹을 잘 물리치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에 분명히 하고자만 했다면 유대인의 영웅, 메시아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영웅이 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려고 오셨다고 하였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마 20:28)

예수님은 그의 말씀대로 영웅의 길과는 정반대로 십자가의 길을 향하여 나가셨던 것입니다. 영웅이 받는 갈채 대신 멸시와 조롱을 받으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길 예수는 바로 십자가를 통하여 영웅이 되지 않았느냐고 할지 모르나 예수님은 분명 우리 가운데 영웅으로 존재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영웅은 언제나 다른 영웅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모든 가난한 자들 속에 계십니다. 다시 말해서 누구나 다 예수가 될 수 있게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카알라일도 이 사실을 알았던지 그의 영웅 숭배론에 마호멧은 썼으나 예수님에 대해서는 쓰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최후의 심판 비유가 나오는데 거기에 보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베푼 적은 일들이 곧 영원한 나라를 상속받는 선한 일이 되었습니다. 즉 임금님과 지극히 작은 자는 동일한 자로 나타납니다. 다시 말해서 지극히 작은 자를 대접한 것이 곧 임금님을 대접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영웅이 상을 받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작은 자를 대접한 자-어떤 면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들입니다-가 상급을 받는 것입니다.

여기서 '지극히 작은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물론 글자 그대로 불쌍한 자, 가난한 자, 헐벗은 자일 수 있으나 여기서는 단순히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마태복음 10장 42절을 보면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고 한 것을 보면, 지극히 작은 자는 제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전하느라고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며, 헐벗고, 병들고 감옥에 갇힌 제자들을 돌본 자들이 상급을 받는 것입니다.

10장 41절에 보면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직접 선교사가 되지는 못하였어도 그를 도와주고 뒷바라지하면 선교사와 같은 상급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오지에서 많은 고생을 하고있는 선교사처럼 우리가 그 현장에 가서 수고를 할수는 없지마는 똑같은 상급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이와 같은 선교사도 훌륭하지만 이를 위하여 기도하며 헌금하는 성도들도 선교사 못지않게 훌륭하고 똑같은 상급을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손"이라는 명화가 있습니다. 원래 제목은 "사도의 손"이라고 합니다.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종교 개혁 당시 독일에서 활동하던 알브레이트 듀러라고 하는 화가입니다.

듀러가 청년 시절 시골에서 살았는데, 같은 마을에 사는 뜻을 같이하는 친구와 함께 그림 공부를 위해 도시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돈 없이 나온 사람들은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일하면서 그림 공부하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루는 친구가 듀러에게 제안을 하였습니다.

"내가 일을 해서 돈을 벌 테니까 자네가 먼저 그림 공부를 하게. 그리고 자네가 그림 공부를 마치면 그 다음에 내가 그림 공부를 하겠네."

그 제안을 받아들여 듀러는 그림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 듀러가 친구에게 그림 공부할 것을 권유하자 그는 말하기를 "나는 이미 노동일로 해서 손이 굳어져 그림을 그릴 수 없으니 자네나 계속해서 그림을 그리게" 하고는 끝내 사양하고 계속 그를 위해 일하면서 밤이면 조용히 무릎꿇고 듀러가 훌륭한 화가가 될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였다는 것입니다. 듀러가 이에 감동을 받고 친구의 기도하는 울퉁불퉁한 손이 사도의 손처럼 거룩하게 여겨져 그것을 화폭에 그렸는데, 그것이 유명한 "사도의 손"이라는 명화가 되었습니다. 그 친구는 듀러를 위하여 기꺼이 자기 자신을 희생한 것입니다.

비슷한 이야기입니다만, 미국 어느 국민학교 미술 전시회에 한 학생이 자기 어머니 손을 이끌고 어느 그림 앞으로 데려가더랍니다. 어머니는 자기 아들이 그린 그림이라고 생각하여 좇아갔더니 거기에 붙어 있는 이름이 자기 아들의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그 아이가 자랑스럽게 하는 말이 "이 아이가 그림을 그릴 때 나는 물을 떠다 주며 그림 그리는 것을 도와주었어요"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사실이라면 미국의 교육은 위대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27절 이하에 보면 교회 안의 여러 직분을 이야기하는 중에 "남을 도와주는 사람"도 하나의 직분으로 열거되고 있습니다. 사도를 돕고, 예언자를 도우며, 교사를 보조하는 일도 바로 사도 못지 않게 중요한 일임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영웅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변변하지 않은 지체들을 더욱 귀하게 다루셔서 몸에 조화를 이루게 하셨다"(고전12:24)고 하였습니다.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되면 큰 일에도 충성된다고 하셨습니다. 지극히 작은 봉사에 관심하지 않는 사람은 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어린 아이 하나에게 사랑을 베풀지 못하면서 고아 사업을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기에 불과합니다.

인도네시아에는 정글이 많아 선교사들이 비행기를 이용하여 들어가는데 이 비행기만을 조정하는 선교사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 선교사는 비행기 조정만 하는 선교사라고 합니다. 무슨 비행기 조정이 선교냐고 하겠지만, 사실 그 사람이 없으면 아무도 깊은 정글에 들어가 선교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독교는 결코 영웅주의가 아닙니다. 대부분 말없이 이름없이 봉사하고 돕는 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선교는 이루어집니다. 다 선교사가 될 수는 없습니다. 다 목사나 전도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 목사이어야 합니다. 다 선교사이어야 합니다. 어떻게 될 수 있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지극히 작은 부분이라도 참여하면 곧 그는 목사요, 선교사요, 전도사와 같은 대우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헌금 얼마를 냄으로 하나님의 일을 다했다고 말하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뜻이 이 땅위에 이루어지도록 끊임없이 기도하여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섯 달란트를 받아서 다섯 달란트 남긴 사람이나 두 달란트를 받아서 두 달란트를 남긴 사람이나 똑같이 칭찬을 받습니다. 문제는 작은 일이라 하더라도 얼마나 충성스럽게 하느냐는 것이 중요합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겠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도 이름이 없을지라도 빛이 없을지라도 최선을 다하여 봉사하고 도우려는 바른 자세를 가진 신앙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지고 있으며, 하나님은 그들에게 큰 상급을 마련하고 계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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