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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과의 동행 (요 11:4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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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썩은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살리기 전에 예수 님께서 하신 말씀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깨우치게 하시려고 하신 말씀 인지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서 우리들이 하나 기억해야 되는 것이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기적도 결코 독자적으로 일으키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충분 한 신적인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부 하나님과의 관계를 중요시 한 것은 예수 님께서 신성을 가지신 것과 동시에 인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인성을 가 지셨다는 것은 우리의 신앙의 모형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예수님 께서 우리 신자들의 모형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보셔야 하는 것입니다.

 <본론>

예수님께서 한번은 바다를 꾸짖어 잠잠케 하신 일이 있습니다. 그런 때에는 분명 히 하나님을 요청하지 않고 혼자서 기적을 행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는 항상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일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단지 단독으로 기적 을 행하시는 것 같지만 오늘 본분처럼 하나님과의 관계가 항상 전제되어 있다는 것 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천지 만물을 지으신 분이요, 천지를 주관하시는 분이 십니다. 바로 그러한 분이심을 표출하기 위하여 기적을 행하십니다만 오늘 본문 처 럼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하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요구해서 행하는 것으로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결국 이같은 말씀들은 모든 신자들이 따를 수 있는 완벽한 모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감사라는 조건 속에서 신자들이 누릴 수 있는 특권과 허락이라는 차원에서 이 사건을 보면 참으로 놀라운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 니다.

여기서 나사로를 살려 놓고 나서 '감사합니다!'가 아니라, 무덤 문을 열어 놓고서 '감사합니다!'입니다. 참으로 다른 상황이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나사로야! 나오 너라!'고 말씀하신 후, 나사로가 나온 것을 보고서 '역시 아버지는 내 말을 들으시 는군요!'라는 말이 아니라, 그러기 전 상황이 가장 나쁠 때입니다. 나사로가 병들 어 죽어 간다는 소식을 듣고도 지체하여 오셨기에 이미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썩 어 냄새가 나고 있습니다. 그 주변에는 마르다와 마리아를 위로하러 왔던 많은 유 대인들도 있었습니다. 상황이 많은 사람들의 시선과 관심을 집중시키도록 유도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에 먼저 예수님께서 무덤의 돌을 치울 것을 명하십니다.(39절) 그러자 마르다 가 이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이미 죽은 지 나흘이라 썩어서 냄새가 납니다' 그러 자 예수님께서는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않더냐'하시면서 꾸 짖으시고 다시 돌을 옮겨 놓으라고 명하십니다. 41절을 보면 "돌을 옮겨 놓으니"라 고 되어 있습니다. 원문에 있던 말 중에 하나를 더 집어 넣는다면 영어로 then 이 빠져 있습니다. 우리 말로 하자면 그제서야 '이렇게 하면 좋겠습니까'라는 뜻입니 다. 다시말해 예수님의 처음 말씀으로 무덤 문을 열지 않았던 사람들이 예수님께 서 마르다를 꾸짖으신 이후에야 옮겨 놓았다는 뜻입니다. 이제 돌을 옮겨 놓았으며 무덤 문은 열렸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를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 때에 '나사로야 나오너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여 감사합니다!'였습니다.

사실은 우리는 이런 부분의 말씀 앞에서 충격을 받아야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런 데서 놀라지 않습니다. 왜 놀라지 않느냐 하면 우리는 이미 익숙해져 있기 때 문입니다. 즉, 성경의 기록과 현실적인 나의 생활과의 거리를 더 이상 갈등으로 느 끼지 않을 만큼 익숙해져 있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성경은 성경이고 내 삶은 삶이 다' 하는 식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생활에서 가장 아픈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 은 놀랍게도 아픈것이 없다는 것이 아픈 것입니다. 왜 아픈 것이 없습니까 그것 은 기대하지 않아서 입니다. 우리는 대개 신앙 생활에 대해서 실망할 일이 있어도 별로 실망하지 않는 데 익숙해져 버렸습니다. 영적인 감각이 흐려져 가고 있는 것 입니다. 분명히 이것은 나쁜 병입니다. 분명히 통증을 느끼고 가슴아파 해야 되는 대목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건 심각한 병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감사할 수 있었고, 우리는 왜 감사가 있지를 못한가 하 는 문제들을 이제는 비교하지 않기로 한 자들인 것입니다. 그렇게 복잡하게 느끼고 생각하고 아파해야 할 필요성을 점점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왜 이렇게 되어버렸 습니까 이것은 분명히 우리의 잘못입니다. 우리는 우리 멋대로 공상을 하고 상상 을 했지 성경의 약속에 대해서 진지하고도 정확하게 이해하는 일들에 대해서는 실 패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가장 큰 불행 중의 불행이요 이 시대와 우리 교 계의 병입니다. 하나님의 부요하심과 하나님의 풍성하심과, 동시 에 하나님의 진리 되심과 성실하심에 대해서 우리는 사실 잘 모릅니다. 우리의 욕심과 간절함이 커진 것에 비례하여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따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좋아하시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무 엇을 좋아하시는지에 대한 관심보다도 온통 지금 나의 처절하고 절실한 요구에 대 한 관심에 쉽게 빠져서는 나오질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압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가장 강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무 리 나를 사랑할지라도 그분께서는 불의할 수 없으며, 타협하고 대강 넘어가시는 분 이 아니라는 부분에 대해서 만은 우리는 정말 무지한 자가 되어 버릴 때가 많습니 다. 우리는 저마다 멋대로 공상하고 멋대로 고집을 피워 놓고서는 모든 책임을 성 경에 다 덮어 씌워버립니다. 다시말해 자기 공상과 고집을 타당화시키는 작업을 성 경을 끌어와서 적당한 해석을 붙이기 까지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꺼내 주시되 당신의 아 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기 까지 우리를 건져 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사랑을 이야기 할 수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어떠한 집념을 가지고 계시며, 우리를 향하여 어떠한 일도 하실 수 있으신 분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면 이제 신앙이 다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아직도 멀었습니다. 우리는 무덤 앞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그 분께서 감사하 고 있습니다. 왜요 그 분은 하나님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는 하 나님은 이런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를 사랑하시며, 그를 구원하기를 원하시며, 그래서 자신을 보내셨다는 것을 압니다. 바로 이것을 감사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관심사는 어떻습니까 주변적인 것들에만 잔득 관심을 쏟을 뿐입니 다. 우리가 예수님의 감사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무덤 문 앞에서 그것도 냄새나는 시체 앞에서 감사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예수님께 서 나사로를 행하여 나오라고 명하셨을 때에 나사로가 베를 동인 채로 걸어 나왔으 니 같은 값이면 베를 뚫고서 온전한 모습 그대로 나왔으면 더욱 더 좋았을 텐데 어 떻게 베로 동인 채로 보내시는 지...하는 식으로 밖에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최대 약점입니다. 우리의 감사는 어디서 나옵니까 쌀독에 쌀이 가득해야 나오며, 통장에 현금이 넘 치게 들어 있어야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그런 조건의 수준 이상의 감사를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이 부분이 우리의 믿음과 신앙 생활의 최고의 약점인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기대해야 되며, 무엇을 감사해야 되며, 어떤 일에 확신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그 기준과 근거가 분명치 않는 것입니다. 단지 우리에게 있다면 지금 의 목마른 갈증이 대부분일 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얼마나 목이 마르고 갈증을 느끼면서 요구하고 있다는 그것이 기회요 축복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것 자 체가 하나님을 가장 잘 믿고 있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다시말해 내가 지금 목이 말라서 죽게 되었나이다 하는 그것이 하나님을 가장 소 중히 여긴다는 뜻은 아닙니다. 단지 목이 마르다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물이 필요 하다는 이야기이지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까지는 안 갔다는 것입니다. 그 하 나님께서 물을 만들어 내시는 것은 인정하지만, 하나님이 필요한 자리에 까지는 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지 갈증을 해소하는 문제가 시급히 필요하다는 것일 뿐 입니다. 얼마나 우리의 신앙이 이런 수준으로 밖에는 나타나고 있는 않는 지를 성 경은 말씀으로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마6:25-26절을 보십시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먀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 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 냐" 이 말씀에서 중요한 대목은 '너희 천부께서 기르신다'는 사실입니다. 공중의 새나 들의 백합화들에게는 하나님이 아버지가 아닙니다. 단지 창조주이실 뿐입니다. 그 런데도 먹이시고 입히시고 키워주시는 것입니다.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너희에게는 하나님이 아버지시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는 이런 투의 말씀에 상 당히 많이 익숙하게 알고 있어야 됩니다. '공중의 나는 새를 보라!'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 즉 보고 생각하라는 뜻입니 다. '너희 천부께서 이것들을 기르신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너희 일까보냐 이 믿 음이 적은 자들아! 왜 의심하느냐' 그러니 믿어야 할 것이 아닌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생각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감각적이지 않습니다. 생각도 없 이 펄펄 뛰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생각하는 것입니다. 공중의 나는 새를 보고, 들에 핀 백합화를 보고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아버지께서 그의 자녀들에 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아비가 떡을 달라고 그러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 라고 그러면 뱀을 주겠느냐 한번 생각해 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이야 기들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도대체 어디서 막혀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기대 자체입니다. 우 리 신앙의 좌절은 기대 자체가 틀려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신앙 생활과 신자의 존 재 가치와 의미와 방향이 전혀 엇갈려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이라는 단 어를 써놓고서 하나님 앞에 구하고 받은 줄로 믿으라는 이야기 때문에 훨씬 자기를 부추기는 식의 훈련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믿습니다.' '구한 것을 받은 줄로 여기 라' '예 믿습니다.' 그러나, 받은 것은 없습니다. 바로 이 부분이 우리가 무섭게 지적 받아야 되는 믿음이라는 단어입니다. 꾸준하고도 성실한 믿음과 기도로 기다 리며 훈련하는 기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기적이란 어떤 것인지를 요한복음 11 장의 나사로 사건을 통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적으로 살아난 나사로가 베를 동 인 채로 나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풀어서 놓아 다니게 하라!'고 말씀하십니 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베푸신 기적이 있고 그리고 우리의 할 일이 있었습니다. 일 을 분담하여 기적을 이룬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 기적은 하나님께 허락하시는 것이 요, 하나님의 하시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거의 내 방식대로 구하고 있습니다. 즉 나는 아무 수고도 고생도 하기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편안한 기적을 요구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 러나 이같은 소행은 우리의 신앙이 무엇인지를 한번 자세히 따져본 적이 없어서 그 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에서 우리가 가야 할 인생 길을 다 걷기를 원하시는 것 입니다. 얼른 우리가 여기서 제대하기 만을 원하시지는 않는 것입니다. 이 땅에 있 을 동안에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엡4:21-24 절에 그것이 나타나 있습니다.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 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 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여기서 두가지 신앙의 무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를 알며 진리를 소 유함으로 구원의 진리의 자리로 초대 받는 일이며, 두 번째 무대는 구원의 자리에 온전히 들어 갔다면, 거기에 머무르지 말고 그 다음의 차원으로 부르고 있는 것입 니다. 즉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개 예수를 믿으면 바로 새 사람이 완성되어 나오는 것으로 여기 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 자연히 신앙이 혼동에 빠지고 좌절과 벽에 부딪 치고 마는 것입니다.

신앙을 가지고 새사람의 길을 가는 것은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변화와 성숙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온갖 일들을 다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힘들 고 고통스러운 일이나 좋은 일이나 실패하고 부끄러운 일이나 그 어느 것이라도 하 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시지 않은 일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신자의 특권이자 훈련인 것입니다. 우리가 승리하고 기뻐하는 일보다 오히려 내게서 떼어 내어야 할 것이 무엇이며, 잘라내고 파 내어야 할 부분이 어디인가를 확인시켜 주심으로 '주 여, 내가 바로 이꼴입니다.'라고 스스로 보고서 확인하는 작업이 더 많은 것입니다 내가 잘 난 줄을 알았더니 아니라는 것을 드디어 혀를 깨물고 확인해야 되는 순간 순간들을 거쳐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신자들은 그 모든 것에서 우리를 잘 라내고 솎아내고 깍아 가는 작업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그래서 욥이 그의 인생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내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내가 이 길을 다 달려간 후에는 정금같이 나오리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고통스럽고 아프고 눈물이지만, 이 길을 다 달려간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되어 나오리라는 확신이 있 다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실패를 자초한 길이라고 할지라도 결국 이 길을 다 가고 나면 분명히 더 나은 자리로 가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신자의 행복입니다. 그래서 신자들에게는 절망이 없습니다. 고통은 있어도 절망은 없습니 다. 그러나 대다수의 신자들이 어디에만 관심이 있습니까 지금의 고통에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고통을 면하는 것이 행복이요, 고통을 당하는 것을 불행이라고 여 기는 세상적인 시각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계속하여 고통을 면하는 데로만 뛰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마약을 사 먹고서라도 고통을 면하려고만 하지, 사람이 바뀌 고 진전하고 성숙되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사탄의 소원대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감사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에게 어떤 어려움들이 있습니까 그 어려움들은 분명 하나님께 감사 할 조건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어떤 일들이라고 할지라도 우 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지혜로우심과 계획들에 반대되는 일들이 결코 내게는 있을 수 없다는 것 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성경의 선언입니다. 이 완전한 하나님의 간섭과 사 랑이 신자가 가지는 최고의 자랑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이런 고백을 합니다. '저 같은 것은 아직 예수 믿는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냥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던 사람이 그의 친구 중에서 교회에 대해서 안 좋은 말을 하고 나서면 쌍심지를 키고 덤벼듭니다. 그런 데 왜 그런 사람이 '나는 예수 믿는 사람 이 아니라'고 공언을 합니까 그것은 나 같은 것이 예수 믿는다고 말하면 하나님의 명예에 금이 갈까봐서인 것입니다. 아주 괜챦은 신자입니다. '어떻게 나 같은 것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가 내가 안믿는다는 것이 하나님께 이익이시 지 믿는다고 하면 손해시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면목이 없다는 말 입니다. 믿는 것은 믿는 것입니다. 다만 면목이 없을 뿐이지 하나님의 편인 것입니 다.

그러나 잊지 마셔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편인데 분명히 믿고 있 는데 우리의 현실에 감사가 없고, 분명히 하나님의 편으로써 하나님을 놓지 않았는 데도 승리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는다는 것을 단지 내가 요구하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이란 내가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대개 무슨 기적을 요구 하 고 있는 겁니까 마약을 먹여서 모든 문제들을 한꺼번에 통채로 끌고 가시고 해결 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나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그저 완성된 해결책 만 을 원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는 어려운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자신 이 누구인지를 들여다 보게 하심으로 철저하게 스스로에게 절망시킵니다. 뜯어 고 쳐야 할 자신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길은 훨씬 충 격적이고 가슴아프고 절망적인 기분이 드는 길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이 모든 것을 좌절로 주저앉아 넉을 잃고 있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깍여지고 떼어내고 죽어 지는 긴긴 시간들을 거쳐서 마침내 새 사람으로 변화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아가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인 것입니다.

이제 이런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께 무엇을 요청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왜 기적 이 없고, 왜 이루어 지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을 요청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 왜 그토록 많은 기적과 응답이 있었는 줄 압니까 요8:29 절에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 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구해보십시오. 그러면 금방 다 이루어 질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기도를 합니까 '하나님 제가 교회를 위하여 봉사를 하고 싶 습니다. 제게 10억만 주시면 9억 9천만 원을 교회에 바치고 전 천만 원밖에 안 갖 겠습니다.' 이것은 봉사도 아니고 하나님의 뜻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빙자한 자랑 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그런 일에다 동원시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영적인 성 숙과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과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듬어져 가는 신자가 되어지기 를 위하여 더 많은 지혜를 구하고 지식을 구하는 데서부터 출발해 나가십시오. 하 나님의 뜻과 계획과 지식을 먼저 달라고 구하십시오. 그리고 그 자세의 올바른 사 랑을 달라고 그러십시오. 그러면 나머지 건강의 문제, 물질의 문제는 해결됩니다.

 <결론>

솔로몬이 무었을 구했습니까 지혜를 달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이 맡긴 자녀들을 데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양치는 목자이기 때문에 지혜를 구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혜를 받았다고 해서 다 안심할 문제는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 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느냐 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솔로몬의 나중을 잘 압니다. 그가 그 지혜를 가지고서도 나중에 어떻게 타락했었습니까 그의 지혜 에도 불구하고 부귀 영화 재물 앞에서 그 인생이 결국은 '헛되고 핫되니 헛되고 헛 되도다'로 끝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구해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 을 구하시고 거기에다 순종하는 마음,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그 복종하는 심정을 구 하십시오. 복종하는 심령이 되도록 성령의 충만함을 구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인생이 매 순간 하나님과 함께 걸으며 모험과 기적의 길을 걷게 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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