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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신앙 (요 1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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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인 요한복음17장은 예수님의 기도문 내용들로서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행한 기 도입니다. 이 기도들은 주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과 나누신 가장 깊은 내용들 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제자들에게 알게 하기 원해서 제자들 앞에서 했으며 기록까지 남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마치고 십자가의 대속의 사역을 완성시키시고 아버지 께로 되돌아 가시면 이 복음이 이제는 이스라엘의 테두리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 라 이방의 만민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게 하실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명을 감당 할 자들이 바로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하시고자 하 는 말씀의 핵심들을 뽑아 정리시키는 마무리 단계에 이르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기도를 중심으로 제자들을 향한 핵심적인 신앙의 강조점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론>

첫째,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신앙을 지녀야 합니다.

신자의 신앙의 핵심을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즉, 신적 기원의 신앙을 그 기초로 삼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7-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 금 저희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께로서 온 것인줄 알았나이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 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 다" 이 말씀은 곧, 인간의 사상이나 철학, 윤리나 도덕성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신앙의 핵심 으로 붙잡고 있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둘째, 일을 이루시고 완성시키기 위하여 지금도 일하고 계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 시라는 신앙을 지녀야 합니다.

8절 하반절에 나오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로 믿었사옵니다"라는 말씀이 바 로 그러합니다. 일을 시작하고 성취시키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우리 인생 의 근원적인 슬픔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계획하시고 아들 예 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로 완성시키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앙의 핵심은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계신 것 과 그 아버지께서 우리가 믿는 신앙의 근거자이시고 창시자이시고 주권자 이시라는 것을 아는 것이며, 또 하나는, 모든 일을 진행시키시고 이루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 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에 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얼마나 모르고 있는 지 모릅니다. 오랜 신앙 생활로 제법 깊은 경지에까지 와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분들 중에서 이 두 가지 문제 앞에서 걸려 넘어지는 경우가 의외로 많습니다.

예를들면, 죄 문제만 해도 죄라는 것을 윤리적 도덕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면 착한 일 나쁜 일로 대별되지만, 하나님을 근거로 죄를 정의하면 그것은 하나님과 상관없 는 일을 하는 모든 것이 죄입니다. 얼마나 엄청난 차이가 납니까 결국 진정한 의미 에서의 죄란 하나님 편을 들지 않는 모든 것이며 하나님을 위하지 않는 모든 것이 며 하나님과 관계없이 홀로 하는 모든 일이 죄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란 그가 하는 어떤 일에 있어서도 하나님과 연결되지 않는 것이 없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모 르는 것이 죄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 모든 것이 죄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이렇게 신앙이 정리되어 있습니까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죄에 대한 정의입니다.

성경이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무엇을 행하고 저지르는 것으로 증명하기 보다 훨 신 근원적인 의미로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어 있다는 것 자체 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지역 전기 사고로 3일 동안만이라도 집에 전기가 들 어오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 생기겠습니까 온갖 불편함이 생길 것입니다. 그 중에서 특히 전기가 없으면 냉장고 속에 들어 있는 모든 것이 쓸모없는 것으로 바뀌어 버립 니다. 쓸데없이 자리만 차지하며 섞어 냄새를 풍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성경은 인간이 타락한 것을 묘사할 때에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것처럼 도 덕성이 없다든가, 윤리성을 잃었다든가, 착한 일을 하지 않으려 하는 것으로 설명하 지 않고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으로 설명 하고 있습니다. 집에 전기가 나갔을 때에 가장 아름답고 가장 보호되어야 할 것부터 섞는 것처럼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에서 떨저져 나갔을 때에 성적인 부패가 맨 먼저 찾아 온 것입니다. 구약 성경을 읽으면 이와같은 지적들이 끔찍한 대목으로 기록되 어 있습니다. 롯이 두 딸과 관계하며, 유다는 자기 며느리와 관계를 가집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경이 어떻게 그런 지저분한 이야기를 기록할 수 있느냐고 반문합 니다. 그리고 또 무슨 사람이 구백 살 팔 백살을 살며, 홍해를 가르고 요단강을 가 르냐 말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있었던 일을 사실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롯이 자기 두 딸과 관계 한 그 부끄러운 이야기를 쓴 기록이 홍해를 가르고 육지 같이 건넌 사실도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도 그와같은 죄인이기 때문 에 가장 아름다워야 할 것을 보존하지 못하며 아름답게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것을 지적받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위할 줄도 모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으며 그에게 감 사치도 않고 자기를 의지하여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무지한 벌레같은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이같은 우리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우리 안에 우리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고 거룩을 지향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 때문에 우리는 죄인일 것이라고는 상상을 안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자가당착이요 자기올무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 므로 스스로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독교는 우리에게 선을 묻고 말하기 전에 우리 가 하나님을 아는가, 하나님 만이 참 신인지를 아는가, 그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 드셨으며 나를 만드셨음을 아는가 하는 사실을 묻습니다. 처음부터 오늘 얼마나 착 하게 살고 있느냐를 묻지는 않습니다. 그건 훨신 나중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약하게 만드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온갖 유 혹과 사이비와 시험 속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쉽게 자기를 의지하도록 만들고 쉽게 믿으려고 지금 하나님께서 나를 향하여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지금 어떻게 간 섭하고 계시는가에 대하여 자꾸만 신경을 쓰지 않으려 하는 시험들이 있는 것입니 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같은 문제들에 대하여 결단코 적당히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문제가 무엇이며 벗고 나와야 할 껍질이 무엇인지를 알고 넘어가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자를 향한 뜻과 계획들을 반드시 이루시고 마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맡기실 나머지 일이 있어서 훈련시키시고 준비시키시는 것이 라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 제자들을 보면은 잘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지금 예수 님께서 맡기실 그 일이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그 일들을 세상에 나가서 전 하는 일로서 그 중요성이란 말로서는 표현이 불가능할 정도로 크고 중요한 일이었 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지금 하나같이 뛰어나지도 않고 훌륭하지도 않는 것입니 다. 오히려 예수님을 배반하고 떠나며 부인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을 과연 훈련 시키셨다면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더라도 흩어지지 않을 것을 훈련시키시지 않고 어떻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라는 이상한 것 만 준비를 시켰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고도 `저들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을 다 믿었고 내가 저들에게 알게 한 말씀이 아버지가 내게 주신 말씀인 줄을 이제 알고 아버지가 나를 보내신 줄을 믿었습니다.'하면서 이런 것만을 하시느 냐고 반문 할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부활한 주님을 만나보고서도 `나는 고기 잡으러 가노라'하며 고기 잡으러 갔다가 예 수님을 거기서 만나 얼마나 여지없이 깨어졌습니까 제자들이 그런 식으로는 쓰이지 않았다는 것을 아십니까 세상의 호구지책이나 활동을 위해서 준비된 자들이 아니었 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맡기신 것은 전 인류와 전 역사를 맡기신 것입 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생활에서 어떤 능력이나 힘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전 인류에게 십자가의 복음을 전파하는 이 사명을 주셨던 것입니다. 다시말해 `저들 은 아버지께서 주신 말씀을 알았고, 아버지가 나를 보내신 것을 믿었습니다'라는 두 가지를 기지고 전 세계와 역사를 새롭게 뒤짚어 엎는 근거로 삼도록 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의 놀라운 점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신앙은 양적이지 않고 생명적입니다. 얼마나 많은 양의 시간과 예배와 헌금을 드렸는가를 따지기 전에 과 연 살아있고 진정과 신령이 베어있는 생명이 있었던가를 정검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신앙을 잘 정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뭔가 하나님께 미안한 일을 하면 마이너스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떼우기 위하여 주일날 아침에 교회를 찾 지는 않습니까 주일날 한 번 땡땡이 놓으면 다음 주일에는 저녁 예배까지 나옵니다 또, 몇 주 빠지면 삼일 저녁 예배도 한 번 나오고 그리고 뭔가 미안한 일이 생기면 새벽기도 같은 것도 나오고 해서 대차 대조표를 맞아 떨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 러분 신앙이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주고 받고, 오고 가는 거래가 아닌 것 입니다. 그건 아주 큰일날 생각입니다. 신앙은 거래가 아니라, 생명입니다. 간절한 중심과 정성이 들어가며 삶 전체로 드려져 생명이 불살라지는 것이 신앙입니다.

마17:14-20절을 보십시다. "저희가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가로되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저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 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다 이 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때부터 나으니라 이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가라사대 너 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 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여기서 예수님께서 믿음이 적다는 이야기를 하시면서 겨자씨 비유를 말합니다. 소 량을 들기 위해서 겨자씨 비유를 든 것인데 소량이지만 그것이 생명이기 때문에 가 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소량이라도 그것이 생명이 아닌 것이면 불가능합니다. 그것 은 신앙이 아닙니다. 생명은 영생이고 영생은 아버지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최고의 핵심입니다. 이것은 아무리 소량 이라도 괜챦습니다. 생명이 있다면 씨가 작아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 무리 커도 돌이면 소용이 없습니다. 돌을 심어 놓고 거기다 물을 주어 뭐가 되나 보 십시오. 금덩어리로 바뀔 수 있다고 하더라도 거기서 생명이 나올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생명을 제자들에게 심어 놓으셨던 것입니다. 다른 것은 해 놓지 않았습니다. 그 생명만 심어 놓으면 마침내 크기 때문입니다. 싹이 나고 무성 해지고 꽃이 피고 열매 맺는 법입니다. 이 생명이 곧 영생이요, 믿음입니다. 이 생 명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이 생명이 완성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책임지 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생명을 심기 위하여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그리고 그 제자들에게 심었으며, 마침내 우리들에게도 그 생명을 심으셨습니다. 할렐루야! 여 러분, 땅에 씨가 심기워졌을 때에 땅이 씨를 잡아 놓는 것을 보았습니까 그 딱딱한 땅을 헤치고 나오는 법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생명이 이깁니다. 세상의 법칙은 사망이 이깁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사망 앞에서는 꼼짝을 못하고 당합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사망을 이기는 부활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의 씨 가 사장되는 예가 없는 법입니다.

이제 창28:10-15절을 찾아 보십시다. 이제부터 우리가 싸워야 할 신앙의 싸움이 무 었인지가 나타납니다. 우리는 이 신앙을 소유해야 합니다.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 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한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 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찐대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이루기까지 너를 떠나 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놀라운 축복을 약속합니다. 그러나 이 대목은 참으 의외의 말씀들입니다. 왜냐하면 야곱이 이 축복들을 받을 아무런 자격을 갖고 있지 않을 때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시점은 형 에서를 속여서 장자의 명분을 빼고 그 다음에는 아버지를 속이고 형이 받아야 할 축복을 자기가 대신 가서 훔쳐냅니다. 그 래서 형이 죽이려고 해서 도망가는 시점입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볼때에 하나님께 서 야곱을 제대로 보셨다면 그 간사한 죄악들을 꾸짖어야 마땅합니다. `야곱아 너의 그 꼴이 무엇이냐 넌 무슨 신앙이 그 모양이냐 너 언제 철이 나겠느냐'그래야 마 땅한 때입니다.

그러나 야곱의 잘못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없으시며 붙잡아 놓고 하시는 말씀이 앞으 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무엇을 하실 것이며 무엇을 약속하셨는가 하는 이야기만 합니 다. 그리고 반드시 그 일을 해내시고야 말겠다는 얘기밖에 하는 것이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그 말씀들 속에는 `너는 왜 내 약속과 계획에 대하여 이다지도 무지하며 이렇게도 신앙이 없느냐'하는 구짖음도 포함되지만, 그의 잘못에 관계없이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약속하신 것을 이루시고야 말 것을 다시 선언하십니다. 야곱은 과연 그렇 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이라는 것이 바로 그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압니다. 그리고 하나님 이 나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고 합니다. 나를 사랑하신 것이라고 말씀 하십니다. 우리의 무지와 완악함과 미련함과 실패와 절망마저도 하나님께서 계획하 신 사랑과 목적하신 것을 방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신앙을 가장 많 이 무너뜨리는 것이 죄책감입니다. `그래도 과연 사랑해 주실 것인가 이러고도 말 이 되는가'하는 자책감과 절망감이 우리를 뒤흔들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쩔어질 수 없으며 하나님의 계획에서 취소 될 수 없습니다.

바로 그 대표적인 예가 베드로를 포함한 예수님의 제자들인 것입니다. 그들은 예 수님과 삼년을 동해하였으면서도 실수와 허물의 연속이었습니다. 한 번은 주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이 점점 가까와져 오는데 제장 중에서 이런 요구를 주님께 하였던 것 입니다. `주여, 나중에 하늘나라에 가서 한 사람은 주님 우편에 한 사람은 주님 좌 편에 앉혀 주십시오!'라는 요구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했다가 그만 다른 제자들을 발끈하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아니 너희 둘이 우의정 좌의정 다 해먹으면 우리는 그럼 뭐냐'하면서 싸우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선 지금 목전의 죽음을 앞두고 계시 는데 소위 그 제자들이란 자들의 언행이 얼마나 한심한 겁니까 그러나 이같은 그들이었지만 주님께서는 꼭 한 가지 만은 해 놓았습니다. 그것은 `오직, 아버지로부터만 진리와 영원이 있으며,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그것을 허락하시기 위하여 주님을 보내셨으며, 이제 어떤 난관과 시험과 자포자기의 절망에 빠진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우리를 꺼내 주실 것이라'는 이 확신을 심어 놓은 것입니 다. 바로 이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사실은 이것을 강조하며 특별히 시편에 서 많이 그렇습니다.

우리들도 이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나올 때마다 잘못한 것이 생 각되어지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주님, 오늘도 주님 앞에서 할 말이 없습니다. 어제 도 잘못했고 그제도 잘못했고 그전에도 역시 잘못했습니다. 그저 셀 수 없는 날들을 잘못했습니다. 사실 지금도 나올 자격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감히 나아오는 것 은 주님께서 나에게 이러한 나를 용납하신다기에, 그리고 이러한 나를 위하여 주님 을 보내셨다는 말씀을 근거로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말씀이 아니라면 내가 설 근 거가 없군요' 여러분, 이것이 신앙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 신앙을 가지지 않았다 면 그 사람은 아직도 신앙인이 아닙니다. 이 신앙이 아니고는 기독교 신앙마저 그 사람에게는 하나의 치장거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들의 신앙이 얼 마나 자기의 의를 확인하며 자신의 우월감을 증명하려는 방향으로 나가려 하는지 모 릅니다. 교회에 나와서 다른 사람들의 신앙이 우스워 보이고 지적할 것이 있어 보이 거든 여러분은 아직도 신앙을 제대로 모르는 것입니다. 봄에 싹이 나는 나무들 중에서 싹 안 나는 나무가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제일 늦게 되는 나무는 대추나무입니다. 그것은 거의 유월이 가까워야 싹이 납니다. 이것을 잘 모르는 사람은 대추나무가 죽었는 줄로 오해하는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저 나무가 죽 었나 싶을 때에 싹이 나오는데 어느 나무가 제일 먼저 열매를 맺히는지 아십니까 그것 역시 대추나무입니다. 먼저 싹이 나는 것은 개나리와 진달래입니다. 꽃부터 피 고 그리고는 끝입니다. 나중에 개나리가 있는지 없는지 아무도 모를 정도입니다. 진 달래가 어느 것이지, 처음에 꽃부터 확 피기 때문에 아는 것입니다.

신앙도 이렇게 꽃부터 확 피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보고 우스운 것입니다.

저 나무는 왜 꽃은 고사하고 싹도 안 나나 하지만, 다 순서가 있는 것입니다. 문 제는 생명이 있는가 그것을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우리를 비 교할 것이 없습니다. 대개는 신앙에 있어 생명 그 외의 것이 모두가 자기를 치장하 는 것에 사용하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에게는 남을 공격할 것도 없고 심판 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 속에는 남을 심판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 은 자기 치장된 것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라는 것을 이용해서 나는 저 사 람과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며 우월감을 확증하기 위한 것이라면 우리는 사실 생명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런 것을 신앙이라고 하지 않 습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이란 거의 넘어지는 생활의 연속입니다. 우리는 넘어지고 또 넘 어져서 좌절하며 절망하는 오합지졸과 같이 보일 수도 있습니다만, 주님께서는 이같 은 우리를 보장하시기 때문에 세상의 그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를 영원히 넘어 뜨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승리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의 사람들인 것입 니다. 그래서 롬8:29-30절에서는 이 일에 대하여 우리들에게 큰 힘을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 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여기서 전부가 과거형으로 쓰여졌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서 한 번 작정하신 것을 그 무었으로도 바꿀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부르신 그들을 영 화롭게 할 것이 아니라, 이미 영화롭게 하셨느니라입니다. 이것을 예언적 과거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작정을 아무도 취소하거나 바꿀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어서 롬8:31-32절에서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 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우리를 사랑하신 그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한 그 계획들을 하나라도 보류하시거나 취소하신 적이 없이 다 행하셨습니다. 주님이 이같은 열정은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시는 일까지 행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최고의 핵심입니다.

오늘의 우리의 모습을 볼 때에 참으로 볼잘 것 없으며 우리 같은 것들을 위하여 하 나님이 사랑해 주실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미 행하셨고 이미 시작하셨습니다. 이제 남은 일들은 성취한 것들에 비하면 쉬운 것들만 남았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사랑하시는 일을 방해하거나 취소하지 못한다는 것이 우리의 신앙의 최고의 근거입니다.

엡1:17절을 보십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이것은 지금 불신자를 향하여 쓴 글이 아닙니다. 엡1:15-16절을 보십시다. "이를 인하여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 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너희를 인하여 감사하기를 마지아니하고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 여기서 무엇을 들었다고 합니까 주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을 이미 소유하고 있음을 안다고 합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신자 임에도 불구하고 계시와 지혜의 정신을 가져 하나님 알기를 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 다. 다시말해 하나님의 그 깊이와 높이를 더 풍성하게 알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 니다.

엡1:18-19절을 보십시다.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 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 하노라"

<결론>

우리의 신앙은 이제 더 이상 이 세상에서 자기를 증명하는 차원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과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어야 됩니다. 그리고 그 말이 갖는 무게와 깊이와 넓이와 그 풍 성함을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제발 눈을 뜨서 보기를 원합니다. 알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의 부르심의 소망, 성도 안의 기 업의 영광의 풍성함들을 모르니까 이렇게 오늘날 신자들의 신앙이 영적으로 매말라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재미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저 엄 청난 것들이 바로 우리의 소유들이고 소망이라는 사실에 자다가도 뻘떡 일어나야 되 는 운명의 사람들이 우리들입니다. 아직도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시겠습니까 그러 면 더 많이 기도하시고 소유케 해달라고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것이 실감 이 날때까지 포기하지 말고 구하십시오. 그래서 보이고 들리며 느껴진다면 여러분들 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복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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