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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봉사의 의미 (요 06: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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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이 오병이어의 사건을 통하여 살펴보고자 하는 점은 '한 아이'를 중심으로 하여 그 의미와 뜻을 파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이루실 때에 과연 우리로부터 최소한의 헌신과 성의를 요구 하시는가 하는 점을 점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에는 남자만 오천명이 먹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외에 기록에 나타나지 않은 여자와 어린아이들의 숫자까지 합하면 약 만 오천명 내지 이만명은 족히 되었 을 것입니다. 이 많은 무리들을 배불리 먹이고도 열 두 광주리가 넘치도록 부스러 기를 거둔 이 사건에서, 그 사건이 있게끔 한 것이 한 아이가 내놓은 오병이어, 즉 물고기 두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였느냐 하는 점이 오늘의 쟁점입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과연, 예수님께서 이 어린아이가 내놓은 오병이어가 없었더라면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지 못하셨을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론>

물론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없어도 능력을 행하실 수 있으신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무었때문에 이 어린아이의 오병 어를 등장시키셨는가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그래서 결론을 내리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는 종종 이러한 결론을 내리기에 익숙해 있습니다. 무슨 결론입니까 하나님 께서는 아무리 적은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즐겨 내는 것을 근거로 하여 동시에 기적을 이루시며 당신의 사역을 이루어 나가신다는 결론입니다. 이와같은 결론도 상당히 근거가 있는 결론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이야기 할 때에 우리의 신앙의 기 초가 잘못 놓여지게 되고 그로인해 잘못된 신앙을 쌓아가게 하고 마는 결과를 빚어 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본문을 다른 각도에서 보어야 합니다.

성경은 참으로 풍성합니다만 그 본문에서 나타내고자 하는 바가 무었이냐를 단 하나의 기준으로만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 편인가 아닌가 하는 기준입니다. 말하는 사람이 비록 말이 안되게 말을 했을지라도 하나님의 편이면 일 단은 맞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한 본문이 우리에게 생각 이상으 로 풍성한 것을 말해 줍니다. 예를들면, 성경에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이 강도를 만난 사람을 나귀에 태우고 여관에 투숙시켜 치료를 한 다음 동전 두 닢을 두면서 뒷 일 을 잘 부탁합니다고 여관 주인에게 당부하고 떠나갑니다. 그런데 옛날에 어떤 목사 님이 이 말씀을 전하시면서 그 동전 두닢은 바로 신약과 구약이라고 말씀하시는 것 입니다. 이 말씀이 그 때는 참으로 그럴 듯하게 은혜스럽게 들렸는데, 신학교에 와 서 공부를 하고 보니 그것만큼 우스운 일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을 웃지 않고 오히려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본 문이 비록 그런 뜻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 분이 얼마나 하나님의 편에 섰으면 그렇 게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셨을까 하고 존경을 가지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 론 저도 그렇게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사역자로서 그전에는 누가 얼마나 더 정확히 알고 제대로 가르치 나에 대하여 꽤나 신경을 썼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것은 정말 좁은 소견이었다고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편이라면 검은 것을 희 다고 말해도 옳고, 있는 것을 없다고 해도 그래도 일단은 옳은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추적해 보고자 하는 것이 그런 의미에서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오병이어의 사건을 이해할 때에 우리가 '자! 우리가 각자의 오병이 어를 꺼내 놓아 하나님의 일을 이룹시다.'라는 결론에 동의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결론 때문에 우리의 신앙의 기초에 있어서 중요한 실수를 초래하 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해서 꼭 짚고 넘어 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설명 에 대하여 반대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면 이 아이가 예수님 앞으로 가지고 나온 이 오병이어가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최소한의 헌신, 혹은 우리의 감사로서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면 무었이겠는가 하는 점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또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꺼내 놓을 필요가 없느냐 하는 점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쉽게 말해 헌금은 왜 하느냐 하는 말로 풀어서 물어볼 수 있습니다 또한 더 광범위하게 이렇게 굳이 주일날 모여서 법썩을 떨 필요가 있느냐 하는 광 범위한 질문도 포함되는 질문일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좀 더 상세히 표현된 다른 성경을 찾 아 보도록 하십시다. 고전1:18-21절을 찾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은 우리들에게는 하 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새의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 님께서는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바로 전도입니다. 여기서 전도가 과연 방법 이냐 하는 에부터 이 문제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시말해 전도라는 '방법 '을 사용하면 반드시 어떤 결과가 나타나느냐 고 물을 수 있습니다.

'전도'라는 방법을 쓰면 구원이라는 결과가 초래됩니다. 그렇다면 전도가 구원을 얻게하는 방법이냐 하면 그렇지를 않습니다. 물론 전도를 하면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나 전도가 구원을 얻게 하는 방법은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방금 우리가 읽은 고전 1:18절 이하에 나타난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 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우리에게 있어 대단히 중요합니다. 전도라는 방법을 사용하면 한 생명이 구원을 얻게 되는 방법이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도를 요구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이란 인간의 지혜나 방법으로 되어지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허락된 것이 전도입니다.

그러므로 전도란 한 사람을 영적인 사람으로 중생시키는데 있어서 설득할 방법도 없고, 이해시킬 능력도 없다는 것을 반증하고 표현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 게 요구하신 것이 전도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전도란 방법이 아니라, 구원이 우리 로 말미암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멧세지로서 우리에게 전도라는 방법을 행하 라는 것입니다. 한 불신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신자가 되는데 있어서 우리 의 지혜나 지식이나 능력이나 노력이 아무런 가능성도 나타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굳이 전도라는 방법을 사용케 하시는 것입니다. 왜 전도가 구원 을 위한 방법이 못됩니까 그것은 전도는 설득으로 되어지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 다.

전도는 어디까지나 선포입니다. 전도는 언제나 '주 예수를 믿으라!'는 선포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이렇게 선포하는 것 이 전도입니다. 그러므로 전도할 때에 논쟁을 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에 전도 받는 사람이 우리에게 묻기를 '당신은 정말로 하나님이 있으시다고 믿으십니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그렇다고 대답하면, '그러면, 한번 증명해 보이시오!' 하면서 다그칠 것입니다. 이럴 때에 증명하려고 하면 지고 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의 말 재주나 능력으로 증명 되어지시는 분이 아니 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증명하려고 덤벼들면 전도에 실패하고 맙니다 그런데, 그 상대방이 이미 신자로서 들어와 있는 경우라면 문제는 다릅니다. 하나 님을 믿으면서도 납득이 되지 않아서 설명을 요구하는 것과 불신자로서 나를 납득 시켜 달라고 설명을 요구하는 것은 다릅니다.

기독교를 어떤 방법으로든 불신자들에게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면 서도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을 안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그렇다면 왜 전도는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전도의 미련한 방 법을 사용하심으로 이 구원의 문제가 우리의 이해나 지식의 범주를 벗어난 것임을 증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전도입니다. 그러므로 전도를 자꾸만 기술 적인 방법으로 기능화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여서 '예수 믿으시요!'라고 한마디 던져놓고 획 가버린다면 좀 경망스 러울 것입니다. 나에게 하나님을 믿는 진심이 있다면 상대방이 내 말을 못 알아 듣 기 때문에 설명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한 넘치는 확신 때문 에 상대가 납득하는 지의 여부에 상관이 없이 전도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전도라는 것이 결코 방법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도 를 요구하셨다는 것이 힌트입니다. 예를들면, 하나님께서 우링게 헌금을 요구하시는 것은, 이것으로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하실 최소한의 조건으로서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성취하실 때에 한번도 우리의 손이나 우리의 지식이나 우리의 권세나 우리의 돈으로 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당신이 가지신 고유한 능력으로 으로 하시고, 고유한 지식과 지혜로 하실 뿐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의 힘과 지식과 지혜와 돈이 동원됩니까 라고 반문할 수 밖에 없 습니다. 그 해답은 저금 전에 읽은 말씀과 똑같습니다. 고전1:26-29절을 보시면 좀 더 분명해 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 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 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에 우리를 끌려 들이시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일, 하나 남의 지혜, 하나님의 생명에 관한 진리들을 이해하거나 홀로 깨우쳐 아는 자는 아 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 특별히 하나님의 계 획과 하나님의 말씀을 맡길 때, 그 맡길 사람을 절대 세상적으로 훌륭한 사람을 쓰 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다니면서 가장 우습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 아닙니까 교회 에서 큰 소리치는 사람치고 밖에서 괜 찮은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별로 없습니다.

언제나 교회에서 말이 쎈 사람은 다른 데서는 별로 큰 소리를 못 치기 때문에 교회 에 와서 큰 소리를 치대는 사람이 많은 것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그것은 만일에 우리가 세상적으로 똑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하는 모든 하나님의 일에 나의 지혜와 지식과 인 간적인 능력이 크게 기여되고 있다고 생각할까봐서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여러모로 볼때에 부족한 사람을 들어서 쓰신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좋은 대학을 나와서 목사가 된 사람이 얼마나 있습니까 그런데도 세상에서 목사 만큼 마음으로 대접을 받는 사람도 드뭅니다.

목사님들은 대부분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그 입술에 하나님 의 말씀을 허락하심으로써 그 능력이 목사 자신의 인간적인 능력으로 만든 것이 아 니라는 것을 분명케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보이는 보잘 것 없는 사람을 출발점으로 하여 그리스도에게까 지 연결시키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기에는 그런 방법으로 하실 바에야 차라리 우리가 없는 편이 훨 씬 더 낫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우리가 전도를 하지 않더라도 주님께서는 구원시킬 자를 능히 구원시키실 수 있으 십니다. 우리의 전도로 구원시키시나 우리의 전도 없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역사로 구원시키시나 그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왜 주님께서는 굳이 우리를 이 일에 끌여 들이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전도 없이 믿게 된 사람은 스스로 깨달아 각성했다고, 다른 사람들처럼 누 군가가 불러서 온 사람들과는 자기가 무언가 다르다고 여기면서 뽐낼까봐서 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라도 구원 얻을 때에는 스스로 교회에 나아 오는 자가 없게 하시 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전도라는 방법을 사용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전도를 사 용하는 자도 하나님께 항복시키고, 전도를 받은 자도 항복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무 었때문에 그렇게 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가진 그 어떤 것으로도 이 구원 과 축복이 말미암지 않았다는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이제 본문으로 돌아가 보십시다. 요한복음 6장에 있는 오병이어의 사건에서 재미있는 것이 어린아이가 등장해 놓고서는 뒤에가서 전혀 아무런 평가도 없이 뭍 혀 버린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아이의 증장은 상당히 조심스럽게 준비되었다 가 등장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아이의 등장을 그냥 지나쳐 버릴 이야기로 보아 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의도적으로 끝에가서는 전혀 평가가 나와 있지 않 는 것입니다. 본문 5-7절을 보시십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 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여기서 빌립의 대답 다음에 예수님의 말씀이 계셔야 할 것 같은데 그 사이에 한 어린아이가 등장합니다. 다시 본문 8-9절을 보시겠습니다.

"제장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여기서 비록 안드레가 나놨지만 실제로는 등장 인물이 안드레가 아니라, 어린아이 입니다.

여기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으로도 부족한 이 엄청난 필요성을 확인 시켜 놓고서는 어린아이를 등장시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여기서 없는 것보다 도 훨씬 더 선명하게 그 필요성을 강조해 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천만 원이 필요한데 이십원 밖에 없는 것과 아예 한 푼도 없는 것 중에서 어느 쪽이 그 필요 성을 절실하게 와 닿게 만들어 줍니까 그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 이십원 밖에 없다는 것이 훨씬 그 필요성을 절감하게 만들어 줍니다. 이렇게 여기서 오병이어가 등장 되는 것은 아예 아무것도 없는 편보다 이것이라도 있어서 훨씬 더 그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확인이나 하 려는 듯이 안드레가 말하기를 9절 하반절에서 "....그러나, 이것이 이 많은 사람들 에게 얼마나 되겠삽니이까" 이렇게 주님께서는 굳이 그 필요성에 비해 도무지 비 교도 할 수 없는 이 적은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서도 아무런 말씀 없으신 채로 친히 행동으로 옮기셨습니다. 본문 10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이런 식으로 하여 사건이 전개되어 나갑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여기서 어 린아이가 가져온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바로 우리들의 모습일 것입니 다. 다시말해,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열심을 내어서 꺼내 놓는 것일지라도 그것 은 하나님께서 필요로 하시는 것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사용해 주셨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것이 우리 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도 꺼내 놓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쓰신다는 뜻이 아 닙니다. 우리가 여기서 바로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면 여기에 있습니다. 즉, 우리 가 주님께 다만 꺼 내 놓음으로써 출발점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우리같이 부 족하고 형편없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부름을 받음으로써 그것이 출발점이되어 그 시 선이 골인 지점인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연결되게 하는 데에 그 의미가 있는 것입니 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속에 등장한 이 어린아이는 그 시선을 예수님께로 연장키 기 위한 중간 디딤돌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부름을 받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바치는 어떤 헌신이나 봉사나 진심어린 마음들이 있다면 하나님 께서는 그것 때문에, 또한 그것을 이용하여서 부풀려 사용한다는 생각은 틀린 생각 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내 놓은 것이 보잘 것 없기 때문에 시선이 예수 그리스도에 게로 연결되어 지는 방식을 취하신다는 이해가 바른 생각입니다.

우리는 주일에 모이기도 하고, 헌금을 하기도 하고, 직분을 맡아서 무슨 일을 하 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일들을 하면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하나님 앞 에서 부름을 받았다는 감사보다도,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무었을 할 수 있다는 보람보다도, 다만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자라 는 사실을 스스로 확인하고 제삼자에게도 증명하는 일일 것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부족하고 형편없으며 필요에 도무지 미치지 못하는 자임에도 우리 를 당신의 일에 등장시키시고 그것이 출발점으로 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일을 성취시키시는 것은 모든 시선을 다른데로 빼앗기지 않고 오직 능력이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는 귀결점으로 이끌어 들이시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자주 오해를 하는 지 모릅니다. 내가 낸 것 때문에 하나님 이 일을 하신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내는 헌금때문에 무슨 일을 하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꺼 내 놓으시는 것을 필요로 하시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단지 있다면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 우리가 꺼낸 그 보잘것 없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얼마나 큰 일을 하시 는가를 대조케 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작 요 구하시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항복되어 있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생각하기를 어차피 하나님의 일의 필요에 도무지 못미칠 바에야 적당히 해도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도 그리 간단히 생각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헌금을 많이 하든 적게 하든 하나님의 일에 필요에는 전혀 미치지 못하는 것은 당 연한 사실이지만, 헌금을 많이 하는 것이 그 사람의 진심이요, 사랑의 결정이냐하 는 문제는 전혀 또다른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꺼 내 놓을 것이냐를 우리의 중심과 사랑 과 정성의 문제로서 다루시는 것입니다.

과부가 낸 두 렙돈을 칭찬하시고 부자가 낸 천만금을 대접해 주지 않는 것이 성경 의 원리입니다. 왜냐하면 액수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그 마음의 진심과 하 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 관한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물질을 필요로 하셨다면 문제는 달랐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성경이 요구하는 바는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는 우리가 꺼내 놓 은 열심, 봉사, 사랑, 물질, 이런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신앙 생활은 생각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말씀이 있습니다. 왕하 5장을 찾아보면 거기에 아 람 나라가 나옵니다.

아람 나라는 이스라엘 주위에 있는 상당히 큰 나라입니다. 늘 전쟁이 그치지 않았 습니다. 이 아람 나라가 이스라엘을 쳐서 포로로 잡아가기도 하고 서로 티격태격 하던 중에, 나아만이라고 하는 아람의 군대 장관이 포로로 잡아간 사람 가운데 이 스라엘의 어린 소녀를 자기 부인의 수종드는 자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나아만은 문둥병자였습니다. 그 소년가 말하기를 우리나라 사마리아에 있는 선지자가 계신데 그 사람을 만나면 문병을 고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나오는 어린 소녀는 오늘 우리가 보는 어린 소년과 비슷한 입장에 있 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나아만 군대 장관은 즉시 이스라엘 나라로 가서 자신의 병을 고쳐 달라고 했습니다. 그 때에 이 소식을 들은 이스라엘 왕은 자기가 어찌 병을 고치느 냐고 자기 옷을 찢으며 몹시 당황해 합니다. 이 일을 이스라엘 왕은 다시 전쟁을 하려고 시비를 걸려는 행위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침내 선지자 엘리사가 나아만으로 하여금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목욕을 하라고 처방을 내립니다.

그러자 나아만은 불평하기를 '우리나라의 다메섹강이 훨신 더 깨끗하고 나은데 왜 요단강으로 가라고 하느냐'고 분을 냅니다. 요단강은 다메섹 강보다도 훨씬 형편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진리를 소개하는데 있어서 하챦은 어린 소녀를 등장시킴으로서 성경은 오히려 가장 많이 알고 있을 듯한 사람들이 모른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 다. 한 나라의 왕의 신임을 받는 자라면 보통 왕의 시의를 보내는 법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 최고의 시의도 못 고치는, 그야말로 가장 똑똑하다고 하는 자들도 못 고치 는 병을 세상 물정을 모르는 소녀가 그것도 포로로 잡혀온 어린 소녀로 말을 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에 관한 진리와 이 복음의 진리가 얼마나 우리에게 생소하며 불가 능한 영역인가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을 위하여 이 어린 소녀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어린 소녀가 이야기 해서 이루어 졌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요단 강도 마찬기지 입니다. 선지자 앞에 가자 선지자는 나아만에게 다른 요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번 씻으라고 합니다. 만일에 요단강이 다른 강과 비교해 볼때에 좀 더 낫다면 오히려 그 강에 효험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 다. 그래서 나아만으로 하여금 그 강 때문에 효험을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고치신 줄을 알게 하기 위해서 였던 것입니다.

나아만이 뭐라고 화를 냈습니까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 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상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그런 데 깨끗치도 않은 요단강에 들어가 일곱 번씩아나 목욕을 하라고 하느냐 필요없다 ! 나는 간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속에서 그렇게 하여서는 병이 낳을 방법이 아니 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은 뒤짚으면 병이 낳는 것이 방법에 있지 않다는 것을 나아만 자신의 입으로 시인하고 있는 것이 되기도 합니다. 어린 소녀로 부터 출발 된 그 방법이 결국은 요단강에 일곱번 목욕이라는 도무지 그럴듯 하지 못한 것으로 밖에는 더 거기에는 다른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바 로 그와같은 도무지 방법이 되지 않을 것 같은 그 속에서, 오히려 우리의 지혜와 깨우침을 초월하는 분의 인도하심과 간섭이 더욱 더 강하게 드러나고야 마는 것입 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우리 신자들도 이와같이 어린 소녀같고, 필요 앞에서서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자와 같이 속수 무책의 존재들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종교적인 이름으로 자신이 마치 무슨 신통술이나 가 진 특별한 사람처럼 되어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예수 믿고 나면 이미 평범한 사람 이 아닌 어떤 능력을 소유한 자가 되어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무슨 단추를 누르면 하나님께서 즉시 와야 되는 것처럼 오해를 합니다.

결단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기도가 특별히 그렇습니다. 내가 기도를 하기만 하면 무조건 하나님께서는 할레벌떡 달려 나오셔야만 하는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마치 만병 통치약으로 주문만 하면 다 들어 주시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아닙니다.기도라는 것이 자신의 대단한 영통력을 꺼내 놓고 과시하는 것이 아닙니 다. 기도란 나의 힘과 나의 능력과 지혜로는 도무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 을 아는 자들이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문제의 해결해 주실 이는 오직 하나님 뿐 이라는 것을 아는 자들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란 '하나님 도와 주십시오! 이것은 제가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라는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고개를 빳빳이 들고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고개를 무 릎 사이에 넣고 단 한가지의 기본 조건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불쌍히여겨 주시 옵소서! 하나님이 외면하시면 저는 갈곳이 없사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얼마나 겸손한 가장한 교만한 자들인지 모릅니다. '보잘것 없 사오나 받아 주시옵소서!'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꺼내 놓은 것 중에서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향하여 그 분에게만 매달리는 것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울어도 하나님을 찾으면서 울고, 웃어도 그 분을 붙잡았기 때문에 웃고, 우리가 무었을 꺼내 놓았을지라도 그 분을 사랑한다는 표현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 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입니다.

그래서 누리를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보잘것 없음을 확인하며 우리가 그 렇게 보잘것 없는데도 불구하고 여유가 있고 늠름하고 기뻐하는 것을 보고 드디어 그 시선이 우리가 도대체 누구의 손에 잡혀 있기 때문인가에 연장이 되어 마침내 그리스도의 품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놀랍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시게 하고자 하신다는 것이 오늘 우리가 살펴본 본문의 멧세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하여 서게 되는 자인가 하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는 결단코 다른 어떤 사람들 보다도 어떤 조건에서 낫지를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보다 낫다고 잘난척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잘나지 못한 채 우리 에게 늘 무릎을 꿇는 것이 있으며, 감사가 있고, 눈물이 있으며, 기쁨이 있는, 이 해가 안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늘 확인하셔야 됩니다.

우리는 바로 어린 아이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에 불과한 줄을 알게 될 때에 비로소 모든 시선을 모아 오천명이 넘는 사람을 배불리는 기적의 현장에 등장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화살표와 이정표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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