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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물고기 뱃속에서 드린 기도 (욘 0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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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는 주전 790년 북왕국 이스라엘을 무대로 활동했던 선지자였습니다. 그의 활동상황은 요나서 이외에는 별로 기록된 것이 없습니다.
요나서의 특징은 하나님의 보편성입니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도 사랑하시고 구원하지마는 다른 민족도 사랑하시고 구원하신다는 것이 본서의 특징입니다.
어느 날 요나는 그 당시 최대 강국인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로 들어가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그곳으로 갈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길이 멀기 때문입니다. 육로로 걸어가는 것도 아니고 배를 타고 가야 합니다.
둘째 감정문제입니다.
앗수르는 그 당시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적대국가였습니다.
셋째 선민사상과 우월감 때문입니다.
요나를 포함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기네만을 선택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앗수르 서울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일 뿐만 아니라 요나의 신앙이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전혀 다른 곳으로 도망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타고 가던 배가 풍랑을 만나게 되었고 마침내 그 원인이 요나에게 있음을 발견한 선원들이 그를 바다에 던졌으며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 들오가게 되었다는 것이 본서의 줄거리입니다.

1.물고기 뱃속에 들어간 이유를 살펴봅시다.1)하나님의 낯을 피해 도망쳤기 때문입니다.
1:3을 보면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하여”라고 했습니다.
바로 여기에 요나의 신학적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 있다는 그 발상과 도망칠 수 있다는 생각은 요나의 신관에 문제가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시편 139편에 나타난 시인 다윗의 고백을 들어봅시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서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 하시오며”라고 했고,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내가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가서 거할찌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그것을 몰랐습니다. 피하면 피해지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오산이었습니다. 사람의 낯을 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2)하나님이 던지셨기 때문입니다.
1:4을 보면 “여호와께서 태풍을 바다위에 내리셨다”고 했고 1:17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미 큰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라고 했습니다.
왜 하나님이 요나를 물고기 뱃속에 던져 삼키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요나가 가는 길과 하려는 일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요나를 선지자로 부르신 이유는 구원의 복음을 전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요나는 어디든지 누구에게든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요나는 그것을 기피하려 해습니다.
우린 여기서 기피자의 불안한 삶과 사망자의 떳떳한 삶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나의 기피행각은 그가 목적지로 정했던 다시스로 가기도 전에 들통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명하시고 요구하시는 일을 회피하고 외면하는 사람들이 어떤 대우를 받는가를 본 사건이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다시스로 가다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게 됐는데 그 물고기 뱃속을 [스올]이라고 했습니다. 스올은 음부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복음명령을 거역한 사람이 들어갈 곳은 스올이라는 것입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을 [스올]로 표현한 데는 다음과 같은 뜻이 있습니다.
첫째 음부처럼 답답하고 고통스럽다는 것이고
둘째 하나님의 버림을 받는 것은 스올과 같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음부의 고통을 겪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나의 경우 앗수르의 국법을 어긴 일이 없습니다. 돈을 내지 않고 몰래 배를 탄 것도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설정법을 어기고 도피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그가 스올의 고통속에서 떨어진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뭡니까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구원을 외치라는 것이었습니다. 요나는 그 명령을 거역한 것입니다. 요나로서는 그 명령을 거역할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우상숭배하는 나라, 이스라엘을 호시탐탐 노리며 침략하려는 나라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불복했던 요나는 스올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물고기 뱃속에 있는 동안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기도의 내용이 요나서 2장에 기술되어 있습니다.

2. 요나의 기도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1-2절을 보면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 하나님께 기도하여 가로되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기도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1)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고 했습니다.
4절을 보면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 보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잘못으로 물고기 뱃속에 갇혀 있지만 신령한 눈을 들어 성전에 계시는 주님을 바라보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보겠다는 것은 회개를 뜻합니다. 세상을 보고, 물질을 보고, 사람만 바라보며 살던 사람이 하나님을 바라보겠다는 것은 회개하고 삶의 방식을 바꾸겠다는 것입니다.
깜깜한 스올의 뱃속에서 요나는 하나님을 바라보겠다고 기도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고 삽니까
딸만 넷을 낳은 어떤 사람이 42세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너무 귀한 아들이라며 이름을 귀인(貴人)이라고 지었습니다. 날마다 귀인이 바라보는 재미로 산다면 즐거워 했습니다. 그 아이가 유치원에 들어갔습니다. 어느 날, 귀인이가 잘못한 일이 있어서 야단을 쳤습니다. 그날 밤 가족들이 둘러 앉아 이런 저런 얘기들을 나누다가 귀인이한데 물었습니다. “얘 귀인아 넌 엄마가 좋으니 아빠가 더 좋으니”라고. 귀인이 대답은 당당하고 또렷했습니다. “난 엄마가 더 좋아. 아빤 싫어 보기도 싫단 말이야. 난 아빠하고 안 놀거야” 낮에 야단 맞은 후유증이 남은 셈입니다.
그러나 귀인이 아빠가 그 순간 많은 것을 생각했다고 합니다. 야단 한번 맞고 싫어졌다는 그 감정표현을 긍정적으로 보면 진솔하다는 느낌이 듭니다만 그러나 자식만을 바라보는 재미로 인생을 살고 있다는 사람에게는 경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지난 주간 우리를 가장 놀라게 했던 슬픈 사건은 유산때문에 부모를 살해한 어떤 아들의 이야기였습니다.
부모가 그 아들을 낳아서 키우는 동안 기대와 꿈이 컸을 것입니다. 어쩌면 유명한 교수나 의사 아니면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나갈 한약사가 되어 주는 것이 소망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휘두른 흉기에 부모는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대학축제에 참석한 대학생이 마음이 허전해 어느 집에 들어가 이유도 없이 흉기를 휘두른 사건도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시대의 파행성, 고질병을 어떻게 고칠 수 있다고 보십니까 수입 오렌지족들은 한달에 600만원에서 800만원을 용돈으로 쓴다고 합니다.
우리 시대의 중병을 무엇으로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요나는 고백했습니다. ‘나는 성전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겠습니다“라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만이 우리 시대와 병든 역사와 정치와 사람들을 고칠 수 있습니다.
예수를 전해야 합니다.
2)영혼이 피곤할 때 여호와를 생각하였다고 했습니다.
6절 끝을 보면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다”고 했고, 7절을 보면 “내 영혼이 피곤할 때 여호와를 생각하였다”고 했습니다.
요나는 해결의 방법을 올바로 찾았습니다. 내 영혼이 피곤할 때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져 내시는 주님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피곤할 때, 고통스러울 때, 괴럽고 답답할 때 무엇을, 누구를 생각하십니까 파도가 철석거리는 동해안의 백사장을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안개꽃 펼쳐진 들녁을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나를 도와 주리라고 기대하는 그 누군가를 생각하십니까
요나의 고백은 다릅니다. “그때 나는 하나님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9절 끝에서 다시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라는 것이 요나의 고백인 것입니다.
친구란 가장 필요할 때 생각나는 사람이며, 그때 곁에 있어주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친구들은 내가 꼭 필요할 때 내 곁에 있어줄 수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부부도, 자식도 타인인 셈입니다. 어린 자식과 아내를 남겨둔 채 어느 날 남편 혼자 훌쩍 세상을 떠나버립니다.
그런가하면 자식이 노부모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 버립니다.
그래서 요나는 고백합니다. “나는 피곤할 때 여호와
를 생각하노라”고, “나의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는다”고.
이 고백은 오늘 나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인생 삶이 피곤할 때 주님을 생각한다”, “나는 절망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믿는다.” 이 고백이 곧 나의 간증이 되어야 합니다.
요나서의 결론은 요나가 니느웨로 들어가 하나님의 구원을 외치는 것으로 끝납니다. 요나의 외침을 듣고 니느웨에 살고 있던 왕과 대신들과 신하들과 백성들이 옷을 찟고 재를 무릅쓰며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최근 잇달아 터지는 대형 사건들과 패륜을 지켜 보면서 니느웨의 회개운동이 일어나야 한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6월 12일은 요나운동과 그리고 니느웨 운동이 일어나는 날입니다.
예수가 진실로 그 역사 속에 들어가고 가정 속에 들어가고 부모 속에 자식 속에 들어가면 패륜이나 죄악이 자리잡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저는 젊은이들이 교회 마당을 가득 매운 채 이야기의 꽃을 피우고 있는 것을 볼 때면 행복하고 가슴이 벅찹니다.
예수를 전합시다.
예수를 말합시다.
예수를 이야기 합시다.
병든 역사, 무너진 도덕, 망가진 정신이 다시 살려면 예수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전도합시다.
하면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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