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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친백성 (딛 02: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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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본문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이라는 말을 아주 특별한 단어를 써서 특별하게 표현했습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 속(救贖)하시고 우리를 깨끗케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 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14절).

 친백성. 저는 이 단어가 그렇게도 좋을 수가 없습니다. 어쩐지 친숙하 게 느껴집니다.

 친백성의 원어는 『페리』와 『우시우스』라는 두 헬라어가 결합한 『 페리 우시우스』입니다. 『페리』는 영어로 round, 즉 둘러싼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우시우스』는 나는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둘러싸인 한복판에 내가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 와 관심과 긍휼과 돌보심과 사랑으로 둘러싸여 그 가운데 살고 있는 사람들 이 바로 그분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친백성으로 삼아 주신 목적과 우리가 그분의 친백성이 되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친백성으로 삼으신 목적 우리는 14절에서 그 대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 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 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왜 우리를 친백성이 되게 하셨습니까 그것은 우리로 선한 일을 열심히 하 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런데 선한 일이라는 것은 어 느 한 가지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선한 일들을 말합니다. 복수 형입니다. 성경에 언급된 선하다가 언제나 거의 예외없이, 하나님이 기 뻐하시는 모든 일들을 말하듯이 본문에서도 어느 특정한 사역을 두고 이야 기한 것은 아닙니다.

 열심이라는 말도 재미있는 말입니다. 이 말에는 다른 사람들이 샘나 도록, 시새움을 느끼도록, 투기(妬忌)를 느끼도록이라는 뜻이 들 어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부러움과 질투의 대상이 될 정도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든 일에 헌신하게 하려고 그분은 우리를 그 분의 특별한 백성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친백성이라는 말은 우리 말로도 영어로도 그 의미를 나타내지 못합니 다. 하나님의 특별히 친한 백성이라 해서 친백성이라고 번역을 했 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쨌든 이미 서론 부분에서 설명한 것처럼, 이 말의 뜻은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과 은혜와 보호 속에 살고 있는 백성들입니 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리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현주소입니 다.

 친백성이 되는 과정

하나님의 친백성이 되는 길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 나님의 친백성이 되는 과정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특별 한 백성이 되는 것은 끊임없는 하나의 과정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친백성 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되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이 되어가는 과정을 설명하는 두 가지 중요한 사건이 본문에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사건은 나타난다라는 한 단어 속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본문에는 나타난다라는 단어가 두 번 언급됩 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여기에 맨 처음 나타납니다. 그 다음에는 13절을 보십시오.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 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런데 이 단어는 다 역사적(historical) 사건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저는 historical이라는 말을 들으면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 떤 남자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내 마누라는 부부 싸움 할 때마다 얼마나 `historical' 한지 모른다.

그러자 옆에서 듣던 사람이 가만 있지 못하고 『그럴 때에는 `historical' 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hysterical'이라고 하는 것이오』라고 거들었답 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다시 말했습니다.

아, 이 사람이... 내가 영어를 모르는 줄 아시오 나도 아는데 우리 마누 라는 너무나 `historical' 하다구.

무슨 뜻이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우리 마누라는 싸울 때마다 늘 과거를 들추기 때문에 `historical'이라 한 거요.

어쨌든, 나타나다라는 단어는 두 가지 중요한 역사적 사건과 관련 되 어 있습니다.

 첫째/구속사적 사건 이것은 이미 과거에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들에게 하나님 의 은혜는 십자가에서 이미 나타났습니다. 그 은혜가 나타나서 어떤 사건이 저와 당신의 삶 가운데 이루어졌습니까 11절을 다시 보십시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 시되(11,12절).

무엇을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났습니까 바로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 였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십자가 사건이야말로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은혜가 극명하게 나타난 사건이 었습니다.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들을 향해서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자 비와 긍휼과 사랑이 십자가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 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 라(롬 5:8).

 하나님의 사랑이 확증된 십자가. 그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큰 은혜가 나타났습니다. 그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었던 우리 가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이 구원의 사건은 곧 하나님 의 은혜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로 말미암아 그분을 믿어 구원 함을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친백성이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관심과 사랑과 보호와 애정과 그 모든 축복 안에 거하는 친백성이 될 수가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십자가에 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내가 하나님의 친백성이 되는 작업이 끝난 것이 아닙니 다. 시작일 뿐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하나님의 친백성이 되어가고 있습니 다. 계속적인 과정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친백성이 되어갈 수 있을까요 하나님 은 그것을 위해서 또 한번 우리에게 은혜를 나타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 다.

 둘째/종말론적 사건 이것은 미래적인 사건입니다. 그것이 13절의 말씀입니다.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 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이것은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증명할 수 있는 유명한 구절 중에 하나입니 다. 하나님이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씀입니다.

 제가 여호와의 증인을 비판하면서 이 구절을 이야기했더니, 얼마전 여호와 의 증인과 이야기하고 오신 어느 분이 제게 와서 이런 이야기를 전했습니 다. 대표적인 여호와의 증인 한 분이 이렇게 이야기하더랍니다.

이동원 목사가 되게 무식한 모양이오. 영어 성경을 한번도 보지 않았는가 보오. 영어 성경을 보면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and'가 있 소.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 그래서 이것은 절대로 동격이 아니 라오. 그것도 모르고 말하다니.

그래서 저는 이야기를 전해 주신 분에게 『저도 영어 성경을 보아서 그것을 잘 압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헬라어에는 유명한 법칙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카이 법칙입니다. 『카 이』는 곧 and입니다. 이것으로 두 단어를 연결시키는 법칙 가운데 하나가 동격으로 연결하는 것입니다. 본문에도 이 법칙이 적용됩니다. 그래서 여기 에서는 and를 빼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의 크신 하나님 (곧 다시 말하면) 구주 예수 그리스도.

이것은 정확한 법칙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 법칙에 합당한 정확한 번역입 니다. 우리말 번역이 잘된 것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영광이 나타날 것이라고 성경은 예고합니다. 그리고 그 나타나심을 우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 미국 대통령이 한번 방문하면 온 나라가 얼마나 법석을 떨었 습니까 옛날에는 그랬습니다. 학생들이 총동원되어 새벽부터 나가서 깨끗 하게 길을 쓸고 또 가지고 있는 옷 중에서 가장 깨끗한 옷을 입고 도로변에 서서 태극기를 들고 흔들면서 미국 대통령이 지나가기만을 설레이면서 또 짜증을 내면서 기다리던 경험이 제 어린 시절에 있었습니다. 강제로 동원이 되었기 때문에 짜증과 설레임의 착잡한 감정이 교차되는 가운데 기다렸습니 다. 한 나라의 최고 수반(首班)이 온다고 하니까 온 나라가 법석대면서 준 비를 합니다. 기다리는 사람은 준비를 하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을 기다린다', `예수님의 영광이 나타날 그때를 기다린다'는 그 기 다림이 우리의 삶을 바꿉니다. 한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년 전에 영국에 갔다가 버킹검 궁전 바로 옆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때 마침 국왕의 행차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곳에 있던 관광객들이 다 멈추 어 서서 사진을 찍고 난리를 피웠습니다. 한 나라의 왕의 얼굴을 보기 위해 서, 그분이 나오는 광경을 포착하기 위해서 도시 전체가 술렁이는 모습을 보면서 주님이 나타나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 얼마나 놀라운 사건이 벌 어질 것인가를 생각해 본 일이 있습니다.

 주님의 영광이 나타남을 기다리는 것이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요 본문 12절에는 주님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친 백성다운 사람들이 되도록 우리의 삶의 성화(聖化)를 촉구하는 일련의 덕목 들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12절).

이렇게 살면서 그 영광의 나타나심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재림을 기다리는 삶은 소극적인 측면과 적극적인 측면에서 접근해 볼 수 있습니다.

 소극적 측면/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버림 경건치 않은 삶의 가장 정확한 정의(定義)는 하나님이 없는 삶입니다. 지적 으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만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하나님이 안 계신 사 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은 관념적인 하나의 신(神)은 될지언정 절대로 삶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분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사실 상 하나님과 무관한 삶인 것이며 이것이 곧 불경건한 삶입니다.

 이러한 삶의 자세에 관해서 바울 사도는 디도서 1장 16절에서 이미 지적했 습니다.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 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이 중요하지 않아도 입술로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예 배도 드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없이 사는 사람의 삶의 초점은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만 의식할 뿐 하나님을 의식하지도 알지도 못합니다. 이런 자세로 사는 것이 바로 불 경건한 삶입니다.

그러나 정말 구원받은 자로서 나를 구원하신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참 으로 기다린다면 우리는 경건치 않은 것을 버리게 됩니다. 이 세상 정욕을 버릴 수가 있습니다.

이 세상 정욕이란 이 세상을 추구하는 세속적인 삶입니다. 세속적인 삶은 이 세상만 알고 오는 세상을 알지 못하는 삶입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이 이 세상에 얽매여서 세속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일까 요 그것은 오는 세상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살아온 삶이 어느 날 하나님 앞에서 심판받으며 그 심판의 결과가 우리의 영원을 결정한다는, 내세의 가치를 우리가 참으로 알고 깨닫는다면 이 세상에서 사는 우리의 삶 의 모습이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세속적인 인간의 삶을 초 월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그 영광이 나타 나기를 기다릴 수 있다면 경건치 못한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넘어설 수 있게 됩니다.

 적극적인 측면/근신과 의로움과 경건을 성취함

이 세 가지는 굉장히 재미있는 단어입니다. 우선, 근신은 자기 자신에 대 한 덕목입니다. 그리고 의로움은 이웃을 향한 덕목이며 경건은 하나님을 향 한 자세입니다. 정말 우리가 나타날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사모한다면 삶 의 세 가지 영역에서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자기 자신의 욕심을 절제하게 되며 이웃과는 투명하고도 정직한 관계를 맺고 살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을 경외하게 됩니다. 이 얼마나 온전한 삶입니까

이런 삶을 살려면 우선 하나님의 그 놀라우신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를 구원하신 주님의 영광이 나타날 그 때를 사모하고 기 다려야 합니다. 내가 주님 앞에 설 때에 어떤 모습일까를 생각하면서 말입 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다시 한번 본문의 가장 중요한 구절인 14절을 보십 시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 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 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와 관심을 받는 그분의 친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친백성으로 삼으신 이유는 우리로 그분이 기뻐하시는 일 을 열심으로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하려면 그분이 기뻐하시는 인격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 는 인격이 되어 가려면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구원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출발점입니다.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가 내 영혼 속에 나타났던 날이 있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주님의 영광이 나 타나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다시 정리하자면 첫번째는 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을 잘하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흔들리고 열심이 식는 후퇴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면 그때가 바로 은혜를 망각하는 순간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의 대상이었던 나를 자녀로 삼아 주신 그 놀라운 구속 의 은혜를 깨닫는다면 삶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 11절과 12절을 연결해 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은혜가 우리를 양육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그것에 감사하 고 감격해 할 때 우리의 신앙은 자라납니다. 그러한 감격이 시들시들해지면 그것은 적신호입니다.

내가 신앙 생활을 얼마만큼 정상적으로 하고 있는가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 한 감격과 감사가 생생하게 내 속에 살아 있는가를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항상 이 점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두번째는, 내게 이미 주신 은혜를 감사하고 그 은혜의 주님이 나타날 것을 기다려야 합니다. 주님은 다시 오셔서 자신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구원은 은혜입니다. 은혜와 가장 가까운 뜻을 가진 낱말은 선물입니 다. 우리는 구원의 선물을 받고 기뻐하면서 선물만 즐기고 정작 그 선물을 주신 분은 별로 만나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선물을 주신 분이 나타 나는 날이 바로 재림일입니다. 나를 구원하신 그분을 영광 중에 뵈옵는 그 날을 사모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경건한 삶의 진정한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 어느 날 이 지상의 삶이 끝날 때, 나를 구원하신 주님 앞에 내가 부끄러움 없이 떳떳하게 서야지.

 이것을 사모하는 사람은 그 삶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점점 하나님이 기뻐하 시는 사람, 곧 그분의 친백성이 되어갑니다. 하나님의 친백성이 되는 은혜 가 당신과 저에게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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