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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2) (눅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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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메시지

만약 우리가 통상적으로 이해하는 대로 이 본문을 읽어 간다면 우리는 성 서 기자가 불의한 재판관의 어떤 모습과 하나님의 어떤 모습이 일치하며, 또한 과부의 어떤 태도와 우리 믿는 사람의 어떤 태도가 일치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듣게 된다. 즉 성서 기자는 이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불 의한 재판관과 하나님과의 존재 유비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 제시한다.

그래서 과부의 끈질긴 청원이 재판관의 마음을 바꾼 것처럼, 우리가 낙망 치 않고 과부처럼 그렇게 지속적으로 간구한다면 하나님께서 결국 우리 간 구를 들으시며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 주실 것이라는 것을 들으라고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필자는 성서 기자가 말하는 것처럼 우리 믿는 자들 의 어떠한 행위가 하나님의 결정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만약 우 리가 하나님을 바꿀 수 있다면 그러한 하나님은 과연 전능한 하나님이겠는 가-그러한 전제는 잘못된 전제로서 필연적으로 배격되어야만 한다고 말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필자의 입장이 필자로 하여금 성서 기자의 전 제를 이탈케 한 요소로 작용했다. 한편 필자를 성서 기자가 설정해 놓은 해석의 틀을 벗어나게 한 그 전제는 동시에 또다른 해석의 틀 안에서 이 본문을 해석해야 한다는 전제로 안내하였다. 그 전제는 해석자의 선행적 삶과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고백들-전능성, 전지성-이었다. 이 두 가 지의 해석의 틀 안에서 필자가 본문을 주석할 때 견지한 태도는 전자는 메 시지의 내용에 관계된다는 것이고 후자는 그 메시지를 이끌어 내는 과정에 관련된다는 것이었다. 실질적으로 하나님의 전능성에 대한 속성의 인식은 필자로 하여금 하나님과 재판관 사이의 존재론적인 유비를 근본적으로 배 격할 수 있게 했으며, 따라서 이 비유에 본질적으로 내재한 메시지로 우리 를 이끌어 주는 역할을 했다. 즉 이 본문이 담고 있는, 아니 예수가 이 비 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하는 근본 메시지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종 말론적인 행위를 요청하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우리의 요청은 하나님 의 어떤 결정을 바꾸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미리 결정된 하나님의 그 결정 의 결과를 촉구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우리의 요청을 통해서 하나님은 불의한 하나님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이 세상에 대해서 하나 님의 하나님 되심이 확증되며 동시에 믿는 자에게 대해서 정의가 되는 것 이다.

 따라서 이 비유는 예수 자신의 기도문과 근본적으로 일치한다. 마태복음 의 산상설교에서 예수는 기도문을 주시며-제자들의 요청이 아니라 (눅 11:1-4) 예수 자신이 주신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그 기도문의 내용중 하나님 자신에 관계된 처음의 세 가지 청원: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여기서 하늘에서는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며, 나라가 임하였으며, 뜻이 이루어 졌다는 점을 주목하라. 반면에 땅에서는 아직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치 않으며, 나라가 아직 임하지 않았으며,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주목하라.) 누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하는가 누가 그의 나라가 임하게 하는가 누가 그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하 는가 인간이 그렇게 하는가 아니면 하나님 자신이 그렇게 하는가 예 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아니 예수께서 그렇게 하라고 부탁한 기도는 본 질적으로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행위를 요청하는 기도문이다. 이 기도문하 고 이 비유는 근본적으로 일치하지 않는가! 반면에, 항상 기도하고 낙망 치 말아야 한다는 것이 예수께서 이 비유를 하신 것이라고 말하는 성서 기 자와 이 비유의 내용과는 또한 얼마나 불일치 하는가! 동시에 이 비유에 감추어진 진실과 동떨어진 채로 이 비유를 이해했던 우리 자신과 이 비유 는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 여기서부터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도출된다.

 1. 첫번째 메시지는 이 주석의 제목이 말하는 대로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라! Let God be God! 는 것이다. 이 말을 보다 직선적으로 표현하면 하 나님을 내가 원하는 형태의 하나님으로 만들려는 시도를 포기하라는 것이 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우리가 원하는 하나님을 만드는가! 겟세마네로 가려는 예수에게 누가 사탄이었는가! 예수를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 라고 고백한 베드로 그가 아니었는가! 베드로에게는 예수는 메시아로서 그가 기대하는 기대치가 있었다. 따라서 예수의 말은 그를 실망시키는 말 이었다. 베드로에 의하면 예수는 그렇게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성서 는 그가 예수를 꾸짖었다고 기록한다. 그는 예수에게 사탄으로 나타난 존 재였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은 이래야 한다고 미리 설정하지 않는가! 하 나님의 정의는 이래야 한다고, 하나님의 사랑은 이래야 한다고, 하나님의 은혜는 이래야 한다고 그렇게 결정하지 않는가!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해 야 한다.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헌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에게 향하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근본적으로 버려야 한다. 만약 그렇 지 않다면 마치 베드로가 예수에게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대적하 고 바꾸려고 하는 사탄으로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조정하려는 생각도, 하나님을 통해서 그 무엇인가를 성취하려는 생각도 또는 하나님을 통해서 무엇인가 축복을 받으려는 우리의 행위도-그것이 경건한 기도요 경건한 삶이라 하더라도-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막는 사탄의 행위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2. 둘째로 우리가 들어야 할 메시지는 우리는 과연 종말에 대한 기대가 기 독교 신앙을 형성하는 근간이요 우리의 삶의 과정은 주님의 종말을 기대하 는 삶의 과정이며, 모습이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는 종말에 대해서 지식으로 알고 있으며, 입으로는 종 말을 기다린다고 하지만 실제의 우리의 삶의 모습은 그와는 다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는가 종말을 기다리는 우리의 삶은 과연 종말을 모르는 사람들이 볼 때에 근본적으로 무엇인가 다른 점이 존재하고 있다고 승인할 그 무엇이 있는가 아니 우리는 종말에 대한 기대가 우리의 삶과 교회, 우리의 경건을 완전히 규정하고 있는가 오늘의 우리의 교회는 종말을 기 다리는 종말론적인 공동체의 본질적인 모습을 보유하고 있는가 오늘날 우 리의 사회가 교회가 없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없기 때문에, 복음을 전파하 겠다는 열정이 없기 때문에-얼마나 많은 선교 단체가 있는가 생각해 보라-기도하는 교인이 없기 때문에-얼마나 많은 기도원이 있으며, 또 얼마 나 많은 기도회가 우리의 주변에 있는가 생각해 보라-기적과 은사가 없 기 때문에-얼마나 많은 기적이 일어나고 있으며, 얼마나 많은 은사의 집 회와 은사가 넘쳐 나는가 생각해 보라-어두운 것이 아니라 그러한 요소 들이 너무나도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 무엇인가 우리 교회와 기독교인이 잃 어버린 신앙의 본질이 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의 사회가 교회가 그리고 신앙인의 삶이 어두운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우리 신앙의 본질적인 것 을 회복해야 한다. 그리고 그 본질적인 것은 종말론적 신앙, 즉 종말을 고 대하면서 주어진 현실을 초월하는 종말론적인 신앙을 삶에서 구현하는 것 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종말론적인 행위를 요청하라고 부탁하는 예 수의 비유와 그리고 그러한 삶을 살라고 우리한테 요구하는 예수의 요청이 우리에게 거치는 돌이 됨은 너무나도 자명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거치는 돌을 피해 가지 않고 그것에 응답하는 우리의 응답에 주어 진 현실을 초월하는 기독교인의 초월이 내재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러한 초월의 삶을 구현하는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통해서 보시고자 하는 믿음의 모습이 아닐까

3. 세째로 우리가 이 본문에서 들어야 할 메시지는 예수가 보고자 하는 믿 음의 모습 속에서 파생적으로 나타나는 그 어떤 부분이다. 이때 파생적으 로 나타난다는 것은 예수 자신은 누가 그 마지막 날 때까지 예수의 가르침 에 충실하게 남아 있는지를 분명히 안다고 우리는 봐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우리가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속성인 전지성-우리가 그를 성자 하 나님으로 고백하기 때문에-에 어긋나는 결과를 낳게 되기 때문이다. 문 제는 예수 자신이 누가 마지막까지 그의 가르침을 준수하고 있는가를 아는 가 모르는가 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나 자신이 나의 생애가 끝날 때까 지 과연 그의 가르침을 준수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한다면 우 리는 우리의 삶의 전 과정을 과연 종말론적 관점으로 유지할 수 있는가 하 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마지막 순간에-그 순간이 예수의 재림 의 순간이든지 아니든지 관계없이-예수의 종말에 대한 기대를 놓치지 않 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지금 이 시점 에서 우리는 종말론적인 삶을 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을는지 모 른다. 하지만 우리의 마지막 그 시점에서 우리는 종말론적인 삶을 사는 그래서 주어진 현실을 초월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을까 정 말로 우리는 예수의 본질적인 가르침인 종말에 대한 신앙을 끝까지 견지할 수 있을까 교회의 본질인 종말론적인 공동체의 모습을, 또 그러한 성도 의 교제를 과연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을까 아니 잃어 버렸다면 그것을 회복해서 공동체의 본모습을 찾을 수 있을까 라는 내면의 질문을 듣는 것 이 우리가 들어야 할 세번째의 메시지인 것이다.

필자의 이 짧은 주석이 교회가 "승리하십시오" 라고 외치는 외침에서부터 벗어나서 "마라나타: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라는 본질적인 것을 외치는 외침으로 나아가는 데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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