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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이야,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눅 02:4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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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내일의 조국의 운명은 이들에게 달려 있기에 이들이바로 자라면 나라가 바로 되고, 이들이 훌륭하게 잘 자라면 나라가 잘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이들이 바로 자라고 훌륭하게 자라도록 우리가 어떤 일을 해야 하겠습니까 어느 유대인 어머니가 두살배기 젖먹이 아이를 데리고 랍비를 찾아가서, 아이의 교육을 언제부터 해야 되겠습니까라고 질문을 했더니, 랍비가 돋보기 넘어로 눈길을 주며 아이가 몇살이요하고 물었더니 어머니의 대답이 예, 만으로 두 살입니다.라고 말했더니 랍비가 하는 말이 정확하게 이년 늦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성경을 보십시요. 세례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이나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의 수태고지를 듣고 산에 숨어서 기도로 태중교육을 시작했으며, 모세는 어머니 요게벳의 가슴에서 젖뗄때까지 자랐고, 사무엘도 어머니 한나의 품에서 젖떼도록 자랐지만 이들은 어머니의 교육으로 각기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가장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로 한 생애를 빛나게 산 위인이 되었습니다. 교육은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세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말은 이런 경우를 위해 생긴 말인듯 합니다.

제가 지난번 성지순례때 이스라엘을 방문했을 때, 듣고 본 사실은 이스라엘은 18세이상이 되면 남녀가 다 병역의무를 수행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군인들을 볼 수 있었고, 또 나이 많은 이들은 예비군으로 편성되었고, 일년에 얼마간은 입영복무를 한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더욱 기이한 일은 이들이 무기를 개인적으로 가정에서 보관하고 있어도 그들 국가내에서는 총기사고 청소년 범죄가 거의 없다시피 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만약에 우리나라에서 그런 제도를 실시한다면 사회가 온전치 못할 것입니다. 철저한 무기와 탄약 관리하에서도 빈번한 총기 사고를 보며, 걱정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회가 그럴 수 있는 비결은 교육에 있다는 말을 듣고 더욱 많은 감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철저한 교육이 된 민족이 얼마나 훌륭한가를 새삼 깨달으면서 우리나라 교육도 입시교육 출세지향 교육에서 어서 속히 인성 교육으로 교육을 바로 잡아나가야 한다는 염려를 해 봅니다. 오늘은 본문을 통해서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린시절을 어떻게 교육하였는가를 함께 생각해 보고, 은혜받아 자녀교육에 바른 전환점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 말씀을 드리고저 합니다.

 1. 자녀를 성실히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했습니다.

본문 41절과 42절을 보면 그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을 당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예수께서 열두 살 될 때에 저희가 이 절기의 전례를 쫓아 올라 갔다가-하는 말씀속에서 절기를 지키는 이들의 열심과 자녀를 하나님의 집으로 부지런히 인도하는 교육적인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안식일인(토요일) 때 가게는다 철시되고, 차량통행도 극히 드물고, 예루살렘 성전 터전이었던 통곡의 벽쪽을 향해 많은 어른들이 아이들의 손목을 잡고 모여듭니다. 순례객들의 사진촬영도 안식일에 왜 사진촬영을 하느냐고 항의를 하며 막습니다. 예나 오늘이나 변함이 없이 안식일을 성수하는 자세와 자녀들을 손잡고 가르치려는 부모의 진지하면서도 자연스런 태도에 감명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교회의 변천하는 모습`중에 옛날과 판이하게 다른 점이 하나 있는데, 유년주일학교 학생이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30년에서 40여년전만해도 어른의 숫자에 비해 늘 어린이가 더 많았는데, 지금의 교회들은 장년에 비해 어린이들이 절반도 미치지 못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됩니다. 여러 교회의 주보를 통해 같은 현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일날 예배시간과 같은 시간대의 TV프로가 문제이다는 등 여러가지 이야기를 합니다만, 저는 본문처럼 부모들의 열심과 정성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 그럴만한 집사님댁 가정아이들도 주일학교를 잘 빠진다는 것입니다. 교육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맹모의 삼천지교도 교육을 위한 부모의 열의와 정성을 나타내는 이야기입니다. 어린이를 부지런히 교회로 인도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시켜 놓으면 그 아이를 인해서 피눈물 흘릴일은 없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서울 화곡동에서 큰 교회를 시무하고 있는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친구 목사의 막내 아이가 신학교에 다닌다는 말을 듣고자네는 목회 성공했네!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척 10여년에 만여명에 가까운 교인을 둔 자네가 목회 성공한 것이지라고 말했더니, 나는 내 자식들이 한명도 나의 뒤를 따르지 아니하니 목회를 잘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하면서 거듭 자네는 자식농사를 잘했구먼! 하더라는 것입니다.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교회 목사님이 주일학생 하나를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호기심으로 여리고 성을 누가 무너뜨렸지했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며하는 말이 나는 안그랬어요!라고 하더랍니다. 그 옆에 부장 집사님이 그 아이의 말이 맞습니다. 그 아이는 그럴 아이가 아닙니다.라고 했답니다. 당회시간에 그 이야기를 했더니, 한 장로님이 우리 교회에서 물어줍시다.라고 했다는 웃기는 이야기이지요.

예수님의 부모님들은 나사렛에서 예루살렘까지 며칠이 걸리는 길을 절기때마다 매년 전례대로 올라갔고 12살 어린 예수님을 데리고 성전으로 올라간 그 열심, 그 정성으로 우리 자녀를 하나님의 집으로 부지런히 인도하는 은혜로운 생활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Ⅱ. 자녀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어떤 교회의 중직가정의 자녀가 잘못되어서 말썽을 피운다는 이야기를 듣고 교역자가 찾아가서 자녀를 위해 기도를 촉구할 양으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세상에서 제일 착한 아이는 자기집 아이라고 아무 걱정 없이 태연하더란 겁니다. 왜 그럴까요 생각해 보면 무관심입니다. 막연한 신뢰만 가지고는 자녀교육을 잘 시킬 수 없습니다. 지속적인 관심으로 험한 세상에 노출된 어린자녀들을 보살피지 않으면 안됩니다.

오늘 본문은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동행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에-라는 구절을 통해 우리는 어린 자녀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함을 일깨워 줍니다. 순간의 방심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유대인의 대축제인 유월절 분위기에 들떠서 예수님의 부모님들은 고향으로 내려가면서 아버지는 어머니 일행과 같이 가려니, 어머니는 다 자라가니 아버지 일행과 같이 가려니, 아니면 아이들끼리 가려니하고 큰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 것이 예수님을 잃어버린 이유입니다.

여름 피서철 시즌을 맞은 때 주일 오후 시골 어느 교회 교역자가 시원한 교회앞에 앉아 있는데, 어떤 부인이 정신없이 달려오더니 예배당 안으로 들어가서는 엎드려서 마루바닥을 치며 통곡하는 말이 “아이고! 하나님 이년이 못나서 우리 아이 죽였습니다. 주일을 바르게 지켜야 하는데, 이곳까지 와서 우리 아이를 잃어버렸으니 어떡합니까 이년이 죽일 년입니다.”라고 하며 통곡하는 것이었습니다. 한참만에 진정이 된 뒤에 그 교역자가 물어 보았더니, 이웃과 함께 떠난 휴가길이 마음에 걸리었지만 현지에 가서 예배드린다고 새벽에 떠났는데도 워낙 길이 막히고 해서 12시경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결국 교회도 가지 못하고 민박집을 구해서 여장을 풀고 나서 아이를 찾아보니 아이가 없었답니다. 그래도 이웃 아이들과 함께 있으려니 하고 점심을 먹고 바닷가에 나갔다고 합니다. 나가보니 죽은 아이의 부모를 찾고 있어 가보니 자기 아이더라는 겁니다. 잠시 관심갖지 않은 사이 이런 변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잠시 무관심한 사이에 영원히 만나지 못하는 운명을 맞이했습니다 아이에게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부모의 무관심이 어린아이로 하여금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빠져들게 할지도 모릅니다. 모름지기 경성하여 자녀의 영혼과 육신과 장래를 위하여 기도의 등불을 끄지 말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본문이 주는 또 하나의 교훈은 예수님을 찾는데 사흘이 걸렸다는 사실입니다. 잃는 것은 순간이요, 그것을 찾고 회복하는데는 시간과 노력과 많은 괴로움이 동반한다는 사실입니다. 어릴때 친구를 잘못 사귄다든지 악한 일에 발을 들여 놓기는 쉬워도 이전으로 돌리기에는 너무나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어린이에게 부모가 관심과 기도로 보살피고 가르치는 일이 가장 귀한 일인줄 알고 자녀들에게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이는 은혜로운 역할로 자녀가 잘 되는 축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Ⅲ.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길가에서 어린아이를 마구 때리고 악담과 저주를 퍼붓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다 못한 사람이 아주머니 어린아이를 길가에서 너무 그러지 마세요!했더니 이제까지 아이를 향해 퍼붓던 악담이 그 사람에게로 쏟아졌다. 아니, 당신이 뭔데 감나라 대추나라 하는거요! 내 새끼 내 마음대로 하는데 무슨 참견이요! 당신이 이 아이 때문에 배를 앓았소 밥을 주었소 별꼴 다 보겠네. 원, 재수가 없을라니-.하면서 아이의 손을 잡아 끌고 집으로 들어가더랍니다. 내 새끼니 내 마음대로 하겠다. 그래서 어린이가 부모의 감정풀이로 희생이 되고 부모의 욕구 충족의 도구가 되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오늘 본문이 주는 귀한 교훈은 자녀가 내 아들딸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아들, 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 아이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부모의 깊은 배려가 있어야 되겠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모세가 준수한 아이임을 보고 석달을 숨겨 키웠다고 했습니다. 모름지기 부모는 하나님의 선물로 우리 가정에 주신 어린자녀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바라보고 이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어린이는 단순한 내 아들 딸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딸 이란 사실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께 의탁하고 그 아이가 하나님의 집을 찾고 거기서 배우고 자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처사입니다.

예수님의 부모님은 예수님을 찾은 순간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내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며 너를 찾았노라라는 말에 예수님은 충격적인 말을 하게 됩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이 놀라운 예수님의 선언은 어머니 마리아의 마음에 깊이 박히어 새기게 됩니다. 이 놀라운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자신의 위치를 선언하신 말씀이 됩니다. 내 자녀는 내 소망대로, 내 기도대로, 되어야 한다는 생각 즉 자녀관을 바꾸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인데 하나님께서 이 아이를 어떻게 쓰실지 그 자리를 찾아주는 노력이 필요하고 그것을 위해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집이 가장 좋은 교육과 예배의 처소가 된다는 것입니다.

요즈음은 자녀들이 유치원때부터 몇가지 학원을 다니며 지쳐 있습니다. 때문에 주일은 좀 쉬고 싶은 날일 것입니다. 그런때에 좋은 TV프로그램도 있겠다 안성마춤입니다. 요즘 고등학교의 고학년이 되면 그저 입시공부시키느라고 교회도 못가게 하는 중직자의 가정이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자란 사람이 전에 온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박한상군처럼 되고 또 어떤 대학교수처럼 자기의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부모를 살해하는 지경에까지 가게 된 것입니다. 이들이 교인이고, 그들의 자녀였다는 사실로 인해 우리는 함께 부끄러워하고 회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본문의 사건은 잉태될 때의 사실을 일깨워 주는 귀한 교훈적인 말씀인 동시에 우리 모든 성도에게 귀한 교훈을 줍니다.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님을 세상 기준, 즉 혈육적인 기준으로 바라보다가 이 말씀 한마디가 주님의 가실 길이 따로 있다는 사실로 받아 들여져서 예수님을 새로운 차원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자녀를 성전에서, 하나님의 집에서 찾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이가 집에 없는 것을 보니 교회에 갔는가 보다’ 이럴수 있으면 얼마나 축복된 일입니까 앞으로도 성도들의 자녀가 집에서 보이지 않으면 성전에서 찾는 은혜로운 축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해 드립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녀를 부지런히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는 열심과 기도가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교회서 배우게 하고 기도하게 하십시다. 우리 자녀들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으로 기도해서 자녀의 오늘의 처한 상태를 잘 살피는 부모가 되어야 될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내 아들, 내 딸들이기 전에 자녀를 하나님의 아들딸로 보고 그 아이들이 주안에서 소망스럽게 잘 자라는 장소로서 하나님의 집보다 더 나은 교육장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자녀로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서 살게 하는 복된 부모, 복된 자녀의 축복이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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