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시므온의 예수찬양 (눅 02:25-35)

첨부 1


본문은 시므온이 어떤 사람이며 그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만난 아기 예수를 찬양한 내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은 아들을 낳게 되면 두 가지 행사를 거쳐야 합니다.
첫째는 8일만에 할례를 행하는 것입니다.
할례는 구별된 백성이라는 표시입니다.
둘째는 헌아식입니다. 첫아들을 낳게 되면 성전으로 데리고 가서 주께 바치는 예식을 행했습니다.
예수님도 8일 되던 날 예루살렘 성전으로 그 부모가 데리고 올라가 헌아식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시므온을 만난 것입니다.

1 시므온은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살펴 보겠습니다.1)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의롭고 경건하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모범적 품성입니다. 의롭다는 것은 죄가 없거나 죄가 있더라도 사함 받았다는 것이고, 경건하다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과 태도가 올바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창세기 6:9을 보면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했습니다.
죄사함 받고 의로워지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됩니다. 그러나 경건한 신앙은 내가 노력하고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2)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25절을 보면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고 했고 26절을 보면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오랜 세월을 기다렸는가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만 그는 평생동안 오실 메시아를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얼마나 인내의 사람이며 메시아 대망신앙의 소유자인가를 설명해 줍니다.
오늘도 참고 기다리는 사람이 주님을 영접하게 될 것입니다.
3)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25절 끝을 보면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고 했고 26절 끝을 보면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라고 했고 27절을 보면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그는 성령이 함께 하는 사람이었고 성령의 지시를 받는 사람이었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참으로 부러운 사람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의 감동과 지시를 따라 살고 행동한다면 우리네 삶은 기쁨과 축복으로 차고 넘치게 될 것입니다.

2 시므온의 예수찬양을 들어 보겠습니다.
8일만에 그 부모가 품에 안고 온 아기 예수를 만난 시므온의 감격은 어떠했겠습니까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죽을 수도 없었던 사람, 길고 긴 세월동안 예수를 만났습니다.
우린 여기서 시므온이 예수를 만났던 장소를 주목해야 합니다. 그곳은 <성전>이었습니다. 만일 그가 자기 집 안방이나 거리나 골목에 있었다면 그토록 기다리던 예수를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2:36 이하를 보면 <안나>라는 여선지자가 있었습니다. 그역시 예수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사람이었는데 성전을 떠나지 않고 금식하며 기도하다가 성전에서 예수를 만났습니다.
성전은 주님을 만나기에 가장 좋은 장소입니다. 성전에 나오는 회수가 적으면 그만큼 주님 만나는 횟수가 적은 것입니다.
성전에 나오기를 힘쓰는 사람은 그만큼 주님을 사모하고 만나기를 열망하는 사람입니다. 성전에 나오기를 힘쓰고 모이기를 힘씁니다. 시므온은 다음과 같이 예수님을 찬양했습니다.1)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29절)
죄와 마귀는 우리를 속박하고 자유를 빼앗아 갑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평안과 자유를 주십니다.
시므온이 말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라는 말의 뜻은 이제는 죽어도 평안히 눈을 감을 수 있습니다라는 것입니다. 이유는 그토록 고대하고 대망하던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이 찬양은 단순한 개인적 고백만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고백이며 찬양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평안과 자유를 주셨습니다. 예수를 처음 믿은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믿고 난 뒤로 “마음이 평안하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자유로워졌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섬길수록 우리를 괴롭히고 요구조건이 많아집니다.
예를 들면 처음에는 50만원짜리 굿을 해도 되지만 횟수가 늘어날수록 액수도 불어납니다. 부적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엔 5만원이나 10만원 짜리로 시작하지만 사건이 커질수록 그액땜을 해낸다는 부적 값도 기하급수로 불어납니다.
마귀는 더 조이고 괴롭히고 그러다가 지옥으로 인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믿을수록, 만나는 횟수가 잦아질수록 세상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평안과 위로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십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이사도 아무때나 못 합니다. 날을 잡고 시를 정해야 합니다. 결혼 날짜도 아무때나 못 정합니다. 택일을 해야 합니다. 이불 꿰메고 장 담그고 김장하는 것도 날을 잡아야 합니다. 묘지도 아무데나 정하지 못 합니다. 집을 짓는 것도 귀신한테 물어보고 우향우 하라면 우향우측으로 정해야 합니다. 어느 것 하나 마음대로 행동하거나 결정하지 못합니다. 한 마디로 자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난 후로부터는 모든게 자유롭습니다. 믿기전에 문제되던 것들이 문제되지 않습니다. 이유는 주님께서 다 책임지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고 말씀하셨고 바울은 갈라디아서 5:1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했습니다. 시므온은 자신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 예수님을 찬양했습니다.
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32절)
우리는 이 노래 가사 속에서 세계선교의 횃불을 발견하게 됩니다. 유대인의 전통적 메시아 신앙은 유대인을 위해 오시는 메시아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그들의 신앙 때문에 가나안 사람을 개처럼 취급했고 사마리아 사람을 이단시 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로 오시는 그리스도가 이방 사람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시므온은 8일된 아기 예수를 보면서 “이방을 비추는 빛이라”고 노래한 것입니다.
땅 넓이와 사람의 마음 크기는 비례합니다. 좁은 땅에서 나고 자라면 마음도 좁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넓히면 세계가 그 마음속에 몽땅 들어옵니다.
창조과학회 회장인 김 영길 박사는 유명한 과학자이자 크리스쳔입니다. 그는 어렸을 때 경상도 시골에서 자랐습니다. 첩첩 산중이었기 때문에 밤이면 밤하늘의 달과 별만 보이는 것, 그리고 낮이면 파란 하늘만 보이는 동네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날이면 날마다 하늘을 쳐다보며 비행기 만들 꿈을 꾸곤 했습니다. 그가 바라본 하늘이 그에게 하늘을 나는 비행기 꿈을 꾸게 해준 것입니다.
훗날 그는 미 우주항공국에서 과학자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꿈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늘보며 자란 소년이 이제는 영원한 세계, 영원한 하늘을 믿고 전하는 간증전도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만나자 이방 선교의 빛이신 메시아를 발견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방을 구원하시러 오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그 어떤 이유로도 선교의 대행진을 중단 할 수는 없습니다.
저에게는 요즘 기도하는 몇 가지 기도제목이 있습니다. 넓은 성전터를 주십시오, 넓은 성전을 주십시오, 배가 되게 해주십시오라는 기도들 외에 꾸는 꿈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상적인 유치원과 탁아교육 시설을 주시는 것과 국민학교를 달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교육제도나 문화의 구조 속에서 중고등학교나 대학은 기독교 교육이 어려워졌습니다. 그러나 영아학교, 유치원, 국민학교는 적어도 10년 정도 신앙교육을 마음놓고 할 수가 있습니다. 거기엔 저항도 없습니다. 10년 동안 마음놓고 예수쟁이를 만들 수가 있습니다. 가장 이상적인 교육이 그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꿈을 꾸고 있는 것입니다.
이 꿈을 여러분도 함께 꾸어 주시기를 부탁합니다. 시므온이 노래한 이방을 비추는 빛이 서쪽으로 선회하여 한국에까지 이르렀고 이제 그 빛은 다시 세계로 뻗고 있습니다.
구라파를 떠난 예수는 미국에 머물면서 세계선교의 교두보로 삼으셨습니다. 미국을 떠난 예수는 한국으로 건너 오셔서 100여년 동안 한국교회를 키우고 세계선교의 전초기지로 삼으셨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한국교회는 경제성장과 문화발전의 도전에 무릎을 꿇고 선교를 소홀히 취급하고 신앙생활을 게을리하는 타성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에 100여년 머물던 예수는 이제 서서히 중국과 러시아로 떠날 채비를 하고 계십니다.
전면 개방이 안 된 상태이긴 합니다만 러시아나 중국은 낮이고 밤이고를 가리지 않고 수천 명씩 몰려들어 설교를 듣고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을 간과해서 안됩니다. 예수가 떠니면 그것은 국력도 기울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영국이나 구라파의 다른 교회들이 침체의 늪에 빠져들면서 국력도 함께 쇠퇴하게 되었습니다. 미국 교회가 신앙의 열정을 잃고 자유주의화하면서부터 미국의 국력이 맥을 못추기 시작했습니다.
이 지구상에 남아 있는 유일한 강대국인 미국, 그러나 지금 그 미국은 마약, 폭력, 총기사고, 청소년 범죄, 실업율의 급증, 노동기피, 인종갈등, 부정직, 탈윤리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이유는 교회가 죽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방을 향한 선교의 불을 끄지 맙시다. 선교 안 하는 가정이나 교회에는 주님이 앉아 계실 자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곳을 떠나시는 것입니다.

3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32절)
8일된 목수의 아들 예수를 품에 안고 시므온은 이 아기는 “이스라엘의 영광”이라고 노래했습니다.
누가복음 2:14을 보면 아기 예수의 탄생 사건을 천사들은 “하나님께 영광이요 사람들 중에는 평화”라고 노래했습니다.
예수를 못박아 죽인 이스라엘이지만 저들은 지금 철저하게 예수를 팔아 국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국가 수입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그것은 집단농장에서 재배해 내는 농산물, 다이아몬드 가공, 관광입니다. 관광의 경우 그 나라는 구경거리가 없는 나라입니다. 벌거숭이 언덕에, 산도 명산이 없습니다.
그런데 전 세계 사람이 이스라엘을 관광합니다. 이유는 예수가 살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스라엘에 예수가 나시지 않았더라면 벌써 저들은 거지가 됐거나 굶어 죽었을 것입니다. 예수 때문에 먹고 삽니다. 그러나 시므온이 노래한 “이스라엘의 영광”이라는 것은 신령한 의미를 갖습니다.
시편 147:20을 보면 “아무 나라에도 이같이 행치 아니하셨다”고 했습니다.
영국 사람들은 세익스피어를 자랑합니다. 러시아 사람들은 그동안 레닌을 자랑했습니다. 박 정희 대통령은 이 순신을 높이고 자랑했습니다. 그래서 현충사 참배까지 시켰습니다. 덴마크 사람들은 그룬드비히를 자랑합니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를 이스라엘 예수에 비길 수 있겠습니까
예수는 이스라엘의 영광만이 아닙니다. 전 세계 인류의 등불이며 구원이며 영광입니다. 우리는 오늘 우리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의 성탄을 축하하는 주일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자유와 평안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이방을 비추는 빛으로 오셨습니다. 주님은 이스라엘과 전 인류의 영광이십니다. 중요한 것은 그 주님이 곧 나의 주님이요 구주라는 것입니다. 나 때문에 오셨고 나에게 자유를 주셨고 평안을 주셨습니다. 내 어둔 심령을 비춰주셨고 나에게 영광을 주셨습니다. 나는 주님 때문에 영광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전합시다. 예수가 나에게 평안과 자유를 주셨다고. 예수는 내 어둔 심령을 밝게 해 주셨다고.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오늘 만나는 사람들에게,
예수 이야기를 들려 줍시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