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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 성에 유하라 (눅 24:4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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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모여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사건과 거기서 주신 말씀을 기록한 것입니다. 본문 속에서 세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성경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45절을 보면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구약성경 도처에 메시야이신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죽었다가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기사도 여러군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말씀을 반신반의 하는가 하면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성경을 풀어주시고 깨닫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깨닫게 하시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45절을 보면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려면 먼저 마음이 열려야 합니다. 천사의 소리를 들어도, 예수의 말씀을 직접 들어도 마음이 열려있지 않으면 깨달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튼튼하고 견고한 열쇠는 이스라엘, 독일, 미국 것들이라고 합니다. 아무나 함부로 열지 못하는 것이 견고한 열쇠입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간단한 쇠꼬챙이 하나로 모든 열쇠를 다 열수 있다고 합니다. 자동차, 아파트, 사무실, 심지어 금고까지도 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지구상에 그 누구도 열지 못하는 자물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입니다. 이것은 쇠꼬챙이로도 열지 못하고 이스라엘 열쇠로도 열리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 3:20을 보면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노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내 마음의 문을 열고 들어올 만한 힘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나의 의지로 문을 열고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합니다.
교회를 들락거리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이를 악물고 예수를 안믿고 지옥가기로 작정하고 악을 행한다면 그는 지옥으로 굴러 떨어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에서는 [인간의 자유의지]라고 말합니다.
남녀관계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마음이 열려야 만나는 것도 가능하고 대화도 가능하고 결혼도 가능한 것입니다. 제아무리 외적 조건이 화려하다고 하더라도 마음이 맞질 않으면 결혼이 성립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경직되고 굳게 닫힌 제자들의 마음을 먼저 열고 그후에 성경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의 문이 닫힌 상태에서는 성경도, 설교도 깨달음이 없는 것입니다.
설교를 들으며 졸고 있는 사람, 성경을 읽으며 하품만 연속하는 사람, 천날 만날 듣고 읽어도 감동이 없는 사람은 마음이 그 무엇인가로 막혀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나 설교를 깨닫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는 것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죄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나, 나와 너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마음을 모조리 차단해 버립니다. 마음 속에 죄가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지도 않고 깨달음이 없게 됩니다. 내 영혼이 죽지않고 영생을 얻으려면 빨리 숨겨놓은 죄, 혼자만 간직하고 있는 죄를 회개하고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야 합니다.
둘째 교만입니다.
교만은 경험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유치원 아이들 보다는 중학생이 더 아는 척합니다. 경험이 많기 때문입니다. 중학생 보다는 대학생이 더 아는 척합니다. 다양한 경험과 지식의 축척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교인들의 성향도 비슷합니다. 초신자 보다는 오래된 사람이 교만합니다. 직분 안가진 사람 보다는 직분을 가진 사람이 더 교만합니다.
성경을 전혀 모르는 사람 보다는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성경을 배웠거나, 귀담아 들은 사람들이 훨씬 더 교만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 안다, 이미 알고있다, 이미 들었다는 잘못된 경험 때문에 마음의 문을 닫고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것더 큰 병입니다. 이 중병을 빨리 고쳐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마치 라오디게아 교회가 “우리는 넉넉하다, 부족한 것이 없다, 부유하다”면서 실상은 거지였던 것처럼 영적 가난뱅이가 될 것이기 때문에 그 고질병을 빨리 고쳐야 합니다.
셋째 잡념 때문입니다.
잡념이란 여러가지를 한꺼번에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에 생각을 집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몸은 교회에 앉아 있지만 그 마음은 동네방네 동서남북을 종횡무진으로 누비고 있는 사람, 찬송부르고 기도를 하고 설교를 들오도 예수는 떠오르지 않고 다른 것들만 오락가락하는 사람, 바로 이런 사람들이 잡념에 빠진 사람들인 것입니다.
대학입시를 앞에 두고 공부하는 학생이 잡념에 사로잡히면 공부가 되질 않습니다. 공부가 안되면 그 사람은 대학에 진학할 수가 없습니다.
신앙생활에 잡념이 많으면 말씀을 제대로 듣질 않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강단을 바라보는 눈동자의 촛점이 흐려있기 마련입니다. 말씀을 제대로 듣지 않으면 그 영혼이 고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 주시고 성경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마음을 열고 주님을 모셔드립시다. 마음을 열고 말씀을 받아 드립시다.
본문을 보면 성경을 깨달아야 죄사함을 얻는 회개가 시작된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무엇이 죄이며 누가 죄인인 것을 가르쳐 줍니다. 마음을 열고 성경을 깨닫고 회개하면 영원한 생명이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마음의 문을 엽시다.

2. 위로부터 임하는 능력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49절을 보면 “볼찌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를 주목해야 합니다.
첫째, 능력은 위로부터 임한다는 것입니다.
육체의 힘은 땅에서 생겨납니다. 음식을 잘 먹고 영양식을 한다든지, 보약을 먹고 강장제를 먹는다면 육체의 힘은 생겨납니다. 그리고 운동으로 체력을 단련하면 힘이 생깁니다.
그러나 영혼의 힘은 그런 것들로 생기는게 아닙니다.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는다고 해서 영혼의 힘이 솟아나는 것은 아닙니다. 영혼의 힘은 위에서 임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위로부터 임하는 능력은 성령의 능력입니다. 그 능력을 받으면 힘이 솟구칩니다. 삶의 새로운 활력이 솟아납니다. 세상사는 재미가 있고, 일하는 맛이 달라집니다. 성령의 능력이 임하면 찬송소리가 달라지고 기도시간이 달라지고, 교회나오는 발거름이 달라지게 됩니다. 우리는 위로부터 임하는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둘째, 그 능력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아무리 좋은 옷도 입지 않으면 내 것이 아닙니다. 제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먹지않으면 내 것이 안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뜨겁고 강한 성령의 능력이 위로부터 임할 때 그 능력을 내가 입어야 내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특히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라는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입는다]는 말과 [입힌다]는 말은 다릅니다. 입는 것은 내가 입는 것을 말하고 [입힌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입혀 주는 것을 뜻합니다. 본문은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능력은 내가 입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입혀주신다는 것입니다. 죄사함 받는 것도, 능력 입는 것도 내가 주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능력을 입기위해 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3. 이 성에 유하라는 것입니다.
49절 끝을 보면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성]은 예루살렘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후 대부분의 제자들은 거칠고 삭막한 수도 예루살렘을 떠나 그들의 고향이었던 갈릴리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순절 성령강림을 기다리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기다리고 있던 120명만 성령을 능력을 받았습니다. “이 성에 유하라”는 말씀을 듣고 순종한 사람만 능력을 입은 것입니다.
이 성에 유하라는 말씀은 다음과 같은 교훈을 줍니다.
첫째, 익숙하지 않더라도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부분 갈릴리지방 사람인 제자들로서는 예루살렘이 익숙하지 않습니다. 바다를 벗하며 배의 노를 젓던 그들에게 딱딱한 돌집이며, 거리는 전혀 생소한 곳입니다. 분위기도 익숙하지 않습니다. 제도, 법관행을 따지는 예루살렘 보다는 바닷바람이 속시원하게 부는 갈릴리 바다가 훨씬 더 친근하고 익숙합니다.
더구나 예수없는 예루살렘에는 한시간도 머물고 싶지 않은 것이 그들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성에 유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4을 보면 “예루실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세상을 벗하며 살다가 교회를 처음 나왔다든지, 교회를 옮긴 사람들은 모든게 익숙하지 않을 것입니다. 낯설고 생소한 것들 뿐일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교회를 떠나거나, 예수를 떠나면 안됩니다. 낯이 설고 익숙치 않도라도 이 성에 유해야 합니다.
둘째, 싫더라도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고등학생 1천명을 대상으로 물었습니다. 공부가 재미있다고 생각하는가 1천명중 128명만 재미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왜 공부를 하는가라는 물음에 제일 많은 대답은 거쳐야할 과정이니까, 대학에 들어가야 하니까, 안하면 사람구실 못하니까 등 이었습니다.
신앙생활의 경우도 그 진가를 알기전 까지는 멋도 맛도 모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성에 유하라”는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싫더라도 안하면 안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공부하는 것, 일하는 것 등 입니다.
예수믿고 능력받아 힘있게 사는 것은 귀찮고, 힘겹고, 싫더라도 해야합니다. 싫더라도 기도하고, 찬송하고,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싫더라도 이 성을 떠나면 안됩니다. 밥을 먹기 싫다고 해서 한달동안 밥을 먹지 않으면 그 사람은 영양실조로 굶어 죽고 말것입니다.
싫더라도 교회 나오고, 저녁예배 나오고, 새벽에 나오고, 수요일에 나와야 그 영혼이 새 힘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성에 유하라는 것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의 의미는 예루살렘입니다. 그리고 넓게는 예수의 품이며, 교회공동체를 의미합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이 성에 유하라. 주님과 교회를 떠나지 맙시다. 그래야 위로부터 임하는 능력을 힘입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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