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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소금의 비밀 (마 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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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곳에서 화재가 났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네 명의 그리스도인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팔짱을 끼고서 ‘이 화재의 원인이 무엇일까’ 하고 진지하게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둘째 사람은 “하나님이여 당신의 능력으로 이 불을 꺼주옵소서”라고 기도만 했습니다. 셋째 사람은 이 불은 “하나님의 심판의 불이다”하고 두려워만 했습니다. 넷째 사람은 주인과 함께 불을 끄면서 수고를 같이하였습니다. 마침내 화재가 진화되었습니다. 다 타버린 빈터에서 둘째 사람은 하나님의 섭리라고 위로하며 회개하고 더 큰 불이 없도록 하라고 충고도 하였습니다. 과연 이 화재 앞에서 가장 신앙적인 사람은 누구일까요
우리는 관념적인 신앙에 대해 거부합니다. 우리는 모두 생동감있는 경험되는 신앙을 소망합니다. 그러나 헌신은 두려워합니다. 여기에 우리의 신앙의 모순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경험되는 신앙을 헌신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인생에는 위대한 헌신이 있습니다. 헌신은 이기적인 삶과 적대되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헌신된 생활이란 자기자신보다 전체를 위해 살아가는 생활인 것입니다. 우리가 헌신에 익숙하지 않은 것은 전체에 대한 책임감보다 자신이나 제한된 몇사람에 대한 책임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을 소망하면서도 인간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신앙인의 생활 가치관에 대해 도전 받기를 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을 소금에 비유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여러분의 내면의 모습이 또 다시 변화되기를 기대합니다.

1. 소금이 쓰일 곳(마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라고 본문은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너희는 바로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금은 너희를 가르치는 비유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말할 때 천국의 소금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시말해 우리가 사용될 곳이 이땅이라고 주님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코 우리의 신앙은 내세적일 수만은 없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의 신앙을 꼭꼭 감추어 두었다가 천국가서 활용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주님은 우리에게 이땅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소금이 쓰일 곳은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여기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내가 진정 소금처럼 살고 싶지만 살 수 없는 것은 이 환경이 나로 하여금 그렇게 살 마음을 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를 소금으로 비유한 것은 바로 우리가 어려워하는 환경에 우리가 필요하다는 적극적인 신앙의 권면인 것입니다. 소금은 자신이 녹아져 없어질 때 비로서 가치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소금과 같은 사람들이 많치 않습니다. 오히려 소금을 필요로하는 사람들만이 더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자꾸만 썩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기도의 성자 죠지 뮬러는 이렇게 자신을 간증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어느날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죠지 뮬러에 대하여 죽었고, 그의 의견에 대하여 죽었고, 그의 선택에 대하여 죽었고, 그의 좋아하는 것에 대하여 죽었고, 그의 의지에 대하여 죽었고, 세상에 대하여 죽었고, 세상의 칭찬과 책망에 대하여 죽었고, 심지어 내 친구나 내 형제들의 칭찬이나 책망에 대하여도 죽었습니다. 그 때부터 나는 하나님께 인정받기만 힘쓰게 되었습니다.” 헌신은 바로 내가 죽는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산다는 것은 바로 내가 죽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결코 자신이 죽지 않고서는 소금이 될 수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소금처럼 유익한 사람으로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자신이 죽는것을 즐겨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혹시 나는 살아있다고 외치고 싶은 충동을 받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목을 곧게 들고 내가 여기있는 것을 잊지 말라고 그렇게 소리를 지르지는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진정으로 너희가 내 제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라고 조건을 제시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며 이 세상은 우리를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2. 소금은 맛을 필요로 한다(마5:13)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성경은 말합니다. 소금이 소금의 맛을 잃으면 그 순간 소금은 소금으로 인정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더 나가서 맛을 잃은 소금은 소금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분노를 사게 되어 치욕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플라스틱으로 만든 모조 음식을 처음 접한 적이 있습니다. 참 먹음직스러웠고 순간적으로 저는 그것이 가짜라는 것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침을 삼키면서 가까이 가서 자세히 보는 순간 그것이 가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때 저는 놀라움과 실망을 함께 경험했습니다. 놀랬던 것은 어떻게 저렇게 진짜와 똑같이 만들었을까 하는 것이었고 실망은 먹을 수 없는 가짜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겉 모양을 진짜와 똑같이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맛은 낼수 없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껍데기를 그리스도인과 똑같이 만들 수는 있을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다운 맛은 스스로 흉내낼 수 없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소금에게는 소금의 맛이 있듯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스도인의 맛이 있을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소금의 특징은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에 녹아져 모든 음식에 유익을 준다는데 있습니다. 그 특징적인 삶을 주님은 우리의 인생에 비유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녹지 않는 소금은 쓸 수가 없습니다. 소금의 맛은 녹아야만 경험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통하여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방법도 동일합니다. 우리가 녹아지지 않는다면 결코 그 누구도 우리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경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마땅히 녹아지는 선행된 생활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녹지 않으면서 인정해 주지 않는다고 분노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삶일 것입니다.
소금은 녹아지는 곳에서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질이 좋은 소금이라 하더라도 여기서 녹지 않는다면 아무도 그 사실을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소금은 녹아야만 그 맛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언젠가 치약이 귀했을 때 소금으로 양치질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에 고운 소금은 귀하고 비싸서 굵은 소금으로 사용해야만 했습니다. 저는 고운 소금으로 양치질 하기를 원했지만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굵은 소금으로 해야만 했습니다. 만약 우리 공동체안에 소금이 필요할 때 우리에게는 녹는 소금이 필요할 것입니다. 만약 그 녹는 소금이 질이 좋은 소금이라면 더욱 기쁨이 클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녹아지는 소금만이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맛을 잃은 소금은 이미 소금이 아닌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이미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치를 잃어버렸다고 말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잘못된 죄의 속성은 신앙의 상식속에서도 여전히 죄의 능력을 나타내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앞에 순종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자신에 대한 어떤 변명보다도 회개하는 겸손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성은 회개의 순간에 회개를 막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어느날 주영이가 준비물을 산다고 돈을 요구했습니다. 잔돈이 없어서 천원짜리를 준것 같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온 주영이에게 잔돈을 엄마는 요구했습니다. 한 순간 주영이는 당황하는 눈치를 보였습니다. 아마도 다 무엇인가를 사먹은거 같습니다. 엄마는 주영이가 잘못했다고 고백하면서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싶어했습니다. 그런데 주영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는 친구들과 같이 나눠먹으러고 하잖아 그래야 착하다고 했잖아! 그래서 나는 친구들이 떡복기를 먹고 싶다고 해서 사주었는데 왜 내게 화를 내는 거야!” 갑자기 야단치는 엄마가 속좁은 여자로 전락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갑자기 주영이는 당당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주영이는 승자처럼 엄마를 바라보고 있었고 엄마는 기가막혀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죄성은 어느 순간에도 이렇게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하기보다는 자신의 정당함에 더 익숙해지도록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잘못을 모르는체 하지 않는 주님을 속좁은 사람으로 몰고 간 적은 없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잘못을 모르는체 하고 덮어주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사랑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온전해 지기를 원하며 더욱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는 어느 순간에도 맛을 잃어버리는 비극적인 소금이 되어서는 않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에게 무엇이 중요하며 소중합니까 어떤 형식과 결정된 의견보다도 지금 요구되는 사랑이 우선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사용될 소금이 되기보다 지금 필요하다면 지금 녹아지는 소금이 우리에게는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말씀으로 항상 조명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생각과 결정을 주님이 인정하신다면 누가 뭐라고 해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니라면 우리는 변해야 할 것입니다. 진정한 주님의 간섭은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공동체에 나타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을 사랑하며 여러분을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공동체를 만들지 않겠습니까 가장 아름다운 목사와 교인의 관계가 되고 가장 아름다운 형제와 자매의 관계가 되고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우리의 관계를 알게될 때 부러워하고 놀라워하고 그래서 우리를 통해 나타나시는 주님의 영광을 우리 인생에서 함께 누리며 살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완벽하고 완전해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모두가 불완전하고 부족해도 거기서 나타나는 이해와 관심과 용서와 헌신이라는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의 결과로 아름다운 관계일 수 밖에 없는 우리의 교회가 되었을 때 우리는 우리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의 현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명절인 설날에 여러분, 무엇보다 주님의 축복을 받으시기 바라며 의미있는 즐거운 명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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