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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의 객실이 있느냐 (막 14: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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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이 지키는 가장 큰 전기를 유월절입니다. 유월절은 애굽으로부터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유대인의 유월절 준비는 철저했습니다.

첫째 집안에 있는 누룩을 샅샅이 찾아 없앴습니다.
본래 애굽에서 나올 때 그들은 누룩 넣지 않은 떡을 만들어 먹었습니다.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유월절이 되면 누룩 넣지 않은 떡을 만들게 되었고, 한 걸음 나아가 집안 구석구석을 샅샅이 살펴 누룩을 찾아 없앴습니다.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떡은 맛도 없고 모양도 없습니다. 누룩은 빵을 부풀이고 그 정도가 지나치면 부패하게 만듭니다.
그들이 누룩을 차자 제거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순결하고 성결한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룩을 넣어 만든 빵이 맛도 있고, 모양도 좋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부패된 것은 막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이 마치 누룩없는 빵처럼 맛이 없고 재미가 없어 보이더라도 부패하면 안됩니다.
썩는 것은 나쁜 것입니다. 음식도 썩으면 먹을 수가 없고, 물도 썩으면 마실 수가 없습니다. 정치도 썩으면 끝나고 왕조도 썩으면 그 막을 내립니다.
우리 생활 속에서 누룩을 제거합시다. 말씀의 불을 켜고 샅샅이 누룩을 찾아 없애 버립시다.

둘째 쓴 나물을 준비했습니다.
그들이 쓴 나물을 먹은 것은 애굽의 학정 밑에 살면서 겪었던 고난을 생각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사람들은 쓴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쓴 약일수록 당의정을 입히거나 캡술 속에 집어넣어 만듭니다.
그러나 쓰다고 무조건 멀리하고 외면한다면 쓴 약이 주는 효과는 기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로저스는 “향료는 으깨질수록 짙은 향기를 발한다”고 했습니다. 제아무리 고급스런 향료라고 해도 10년이나 20년 계속해서 향기를 발할 수는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향이 날아가기 때문에 향기가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그 향기는 2천년이 지나도 여전히 향기롭고 신선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십자가에 자신을 으깨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장미 한 그루를 사다가 앞뜰에 심고 가꾸었습니다. 거름을 주고 물을 주며 정성을 다 했습니다. 그런데도 장미가 피지 않자 꽃집을 찾아가 까닭을 물었습니다. 그러나 꽃집 주인은 “잘못 아셨군요 그 품종은 척박한 땅에 심어야 꽃이 피는 것입니다. 기름진 땅보다는 모래밭이 좋고 비료를 주면 꽃이 피지 않습니다. 모래 자갈 밭에 옮겨 심으시고 가지는 사정없이 잘라 주세요 그러면 반드시 향기나는 꽃이 필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린 지난날 쓴 나물 먹고 살던 때를 잊어선 안됩니다. 그리고 지금도 쓴 나물 먹으며 살고있는 이웃들을 잊으면 안됩니다.
그들은 쓴 나물을 씹으면서 자신들을 낮추었고 교만을 눌렀습니다. 그리고 쓴 나물을 먹으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했습니다.
셋째는 어린 양 제물을 준비했습니다.
역사연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매년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에는 100만 명의 인파가 몰려 들었고 25만 마리의 어린양이 유월절 제물로 죽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학대받고 살던 유대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열가지 재앙을 애굽 전역에 내렸습니다. 그 마지막 재앙은 장자가 죽는 재앙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른 집은 천사가 넘어가 재앙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 이후 유대인들은 유월절이 되면 어린양을 잡아 그 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어린양의 피 때문에 재앙을 면했던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유월절 어린양이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애굽에 있던 유대인은 짐승의 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만 우리는 어린양 예수의 피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유대인은 문설주에 피를 바르고 재앙을 면했습니다만 우리는 십자가에 흘린 피로 사망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은혜가 더 큰 은혜입니까 짐승 때문에 재앙을 피한 사람의 감격이 커야 합니까 아니면 예수님 때문에 재앙을 면한 사람들의 감격이 커야 하겠습니까
수난주일 아침 어느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날 목사님의 설교는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성경봉독 시간에 목사님은 예수님의 수난 기사를 봉독했습니다.
유다의 배신, 예수님의 체포, 헤롯과 대제사장에게 끌려 다니며 조롱 당하시고 채찍에 맞으신 일 그리고 마침내 갈보리 언덕을 올라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때 어머니를 따라온 프로렌스라는 일곱살난 소녀가 훌쩍거리며 울기 시작했습니다. 주위사람들이 쳐다보자 어머니는 죄송하다는 표정으로 눈인사를 보낸 후 낮은 목소리로 프로렌스를 꾸짖었습니다.
“ 너 왜 이러니, 조용히 하려므나” 그러나 프로렌스는 울음을 그치지 않고 더 크게 흐느끼며 울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어서 빨리 데리고 나가라는듯 어머니와 우는 아이를 바라보았습니다. 엄마가 다그치며 울음을 그치라고 하자 프로렌스는 울먹이며 대답했습니다. “어떻게 그 사람들이 예수님한테 그렇게 할 수가 있어요.”
이 한마디에 장내는 숙연해졌습니다. 그 소녀는 그날 위대한 설교를 한 것입니다. 훗날 그 소녀는 여류문학가 프로렌스 바클레이(Florence Barclay) 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불감증 환자가 되어버렸습니다. 감격과 감사가 우리에게서 떠나 버렸습니다. 십자가를 바라 보면서도 감동이 없습니다. 성만찬에 참여하면서도 감격이 없습니다. 누룩없는 떡과 쓴나물과 어린양의 피를 잊지 맙시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유월절 식사를 함께할 집을 준비하라고 당부하신 기사입니다. 제자들을 동네로 보내시면서 물 한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날텐데 그에게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면 그가 너희를 인도해 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전에 제자들과 함께 할 유월절 만찬 장소를 정해 놓으신 후 그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바로 그곳이 예루살렘에 있는 다락방이었습니다.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라는 말씀은 나귀새끼 주인에게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는 말씀과 일맥 상통합니다. 나귀새끼 주인에게 제자들이 말했습니다. “주가 쓰시겠다고 하신다”라고.
그러자 주인은 아무말 없이 나귀새끼를 내주었고 주님은 그 나귀새끼를 타시고 벳바게 마을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셨습니다.
로마의 개선 장군은 갑옷에 긴 칼을 뽑아 든 채 백마를 타고 성내로 들어옵니다. 그러나 예수의 입성은 십자가를 지시려는 죽음의 입성입니다.
그러기에 백마 대신 비틀거리는 어린 나귀를 타신 것입니다.
그러나 재림하실 때는 구름을 타시고 천군천사의 호위를 받으며 강림하실 것입니다.
저는 그때 그 새끼 나귀를 생각해 보곤합니다. 청년 예수를 태운채 휘청거리며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던 나귀, 그날 그 사건 때문에 나귀는 주님 오실 때까지 교훈과 설교의 테마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주가 쓰시겠다”고 할 때 두말없이 내놓았던 나귀 주인의 헌신과 순종은 오늘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다락방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에는 웅장한 왕궁과 성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자들의 대 저택도 군데군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다락방은 호화주택도 아니었고, 공공건물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그 만찬은 호화판 파티가 아니었습니다. 십자가를 앞둔 마지막 만찬이었습니다.
초촐한 다락방, 별로 꾸밈도 없는 다락방입니다. 지금도 예루살렘에 가면 다락방이 있습니다만 초라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라고 하셨을 때 주인은 두말없이 그 다락방을 내 놓았습니다.
우린 여기서 <나의 객실>이라는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곳은 주인의 다락방이지 예수님의 소유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그 사건이후 그 다락방은 세계 기독교인이 찾는 명소가 되었습니다. 성지를 순례하는 사람치고 만찬상을 베풀었던 다락방을 방문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힘없는 나귀도 주님 태우고 유명해졌고, 값싼 다락방도 예수님께 빌려 드리고 세계의 명소가 되었습니다.
내가 가진 소유를 사용하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는 나 혼자 쓰는 경우입니다.
이 경우는 나만 기쁘고 유익하고 만족합니다.
둘째는 남과 함께 쓰는 사람과 기쁨을 나눌 수 있습니다.
이 경우는 함께 쓰는 사람과 기쁨을 나눌 수 있습니다.
셋째는 도둑 맞거나 빼앗기는 경우입니다.
이 경우는 속상하고 기분 나쁘고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넷째는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 경우는 나도 다른 사람도 그리고 주님도 기분이 좋고 기쁨이 넘칩니다. 그것은 나귀 주인이나 다락방 주인의 기쁨과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들의 이야기로 결론을 내립시다.
내 소유들 가운데 주님을 위해 내놓을 어린 나귀는 있습니까
우리집 공간에 주님께 드릴 객실은 있습니까
“나의 객실이 있느냐”, “내가 탈 나귀는 있느냐”라고 물으신다면 우리는 뭐라고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 내가 나귀입니다.
제 몸뚱이가 주의 어린 나귀입니다.
제 심령이 주의 객실입니다.
오셔서 좌정 하옵소서.
내 마음이 구유이며 객실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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