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사랑 (요 13:1-5)

첨부 1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사랑이 없는 교회는 참된 교회가 아니며 사랑이 없는 신자도 참된 신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의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
사랑에는 적어도 세가지 종류가 있읍니다.
맨 처음의 사랑은 소위 "만약에" 식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만약" 우리가 어떤 요구조건을 충족시킨다면 얻어지는 그런 사랑입니다. "너 말 잘 들으면 아빠가 귀여워하지", "나한테 선물을 준다면 당신을 사랑할거예요", "당신이 성공해서 유력해지면 당신 을 사랑하겠어요", "저하고 결혼 약속해 주시면 당신께 사랑을 바치겠어요." 이것이 가장 흔한 식의 사랑입니다. 이것은 조건적인 사랑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의 사랑이 아닙니다.
둘째 번의 사랑은 "때문에" 식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읍니다. 여기서는 어떤 사람이 받는 사랑이, 그의 됨됨이 소유 혹은 그의 행위 자체 때문입니다. 한 개인에게 사랑을 받게 할 만한 어떤 우수성이나 조건이 있다는 말입니다.
"당신이 이다지도 아름답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합니다", "내게 이렇듯 잘해 주시니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것도 기독교의 사랑은 아닙니다.
세번째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의 사랑이라 하겠읍니다. 이것은 "만약에"식 사랑과 "때문에"식 사랑과 다릅니다. 이 사랑은 조건없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참 사랑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본문에서 참 사랑이 무엇인가를 생생하게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이 시간 나에게 참 사랑을 달라고 기도하십시다.

1.끝까지 사랑하심.
1절. 끝까지라는 말은 첫째, 마지막 순간까지 둘째, 예 수께서 하실 수 있는 최대한으로란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금방 식어버리는 인간의 사랑과 질적으로 다른 사랑이며 무한한 사랑입니다.
성경에 보면, 다윗의 아들 중에 암논이라는 못된 아들이 하나 나옵니다.
암논이 이복 누이동생인 다말을 연모하게 됩니다. 어찌나 연모했든지 마음의 불로(심화) 병에 걸렸습니다. 마침 다말이 암논 오빠가 병들었다는 얘기를 듣고 병문안 오자 아무도 없는 사이에 그만 다말을 겁탈하였습니다.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그런데 더 큰 죄악은 그 다음에 있었습니다. 자기 욕망을 채운 암논은 이제 다말을 심히 미워합니다.
삼하13:15,16, "그리하고 암논이 저를 심히 미워하니 이제 미워하는 마음이 이왕 연애하던 연애보다 더한지라 곧 저에게 이르되 일어나 가라 다말이 가로되 가치 아니하다 나를 쫓아 보내는 이 악은 아까 내게 행한 그 악보다 더하다 하되 암논이 듣지 아니하고." 종을 시켜 쫓아냄.
요즘 세태와 비슷. 어느 주부가 주간잡지에 나오는 이상적인 남편이란 칼럼을 보고 자기 남편이 거기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여 이혼했다고 합니다. 조금 모자란다고 해서 이혼한다면 평생 같이 살 부부가 과연 있겠는가
우리가 이런 사랑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결단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이런 식의 사랑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어떤 환경, 어떤 형편에 있을지라도 결단코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이와같지 않습니다. 1절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히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주님은 한번 사랑하신 자는 영원히 사랑하심. 창기 고멜과 같은 이스라엘 을 끝까지 사랑하심. 야곱과 같이 간교한 사람일지라도 끝까지 사랑하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사야49:14,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 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 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사랑하는 여러뿐! 이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담대하세요. 사람은 나를 버릴지라도 하나님은 결코 나를 버리지 않습니다. 요셉에게 은혜를 입은 술맡은 관원장은 요셉을 잊었지만 하나님은 그를 잊지 않고 감옥에서 건져내심.
여러분이여, 지금 여러분의 마음이 어떻합니까 사랑을 받지 못하여 피곤하고 지쳐 있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시며 여러분을 영원히 지키십니다. 이 사랑을 확신하고 이 사랑을 마음에 품으세요. 그리고 이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읍시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영원히 사랑하심과 같이 여러분도 하나님을 사랑하세요.

2.무조건적 사랑.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조금 있으면 예수님은 제자인 가룟 유다에게 배신당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십니다. 또한 수제자인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번이나 부인합니다.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을 모른다 하고 도망갑니다. 예수님은 이런 일들이 일어날 것을 다 아시면서도 저들을 사랑하시고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조건없는 사랑.
남북 전쟁이 일어났을때 아름다운 소녀와 약혼한 한 청년이 처음 군인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결혼은 당연히 지연되게 되었습니다. 젊은 군인은 광야전투에서 불행히도 중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가 사랑한 그 처녀는 그의 처지를 알지 못하고 그가 귀가할 날만을 세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그녀는 낯선 글씨체의 봉투를 받게 되었습니다. 봉투를 열어 보니 "내가 양팔을 잃었다는 사실을 말하는게 아주 어렵소! 나 스스로 쓸수 없지만 한 친구가 나를 대신해서 이것을 써주고 있소. 당신은 영원한 나의 사랑이오. 그러나 나의 남은 여생은 다른 사람을 의지하며 살 수 밖에 없게 됐소. 그러므로 나는 당신과 맺은 약혼의 의무에서 당신을 자유롭게 해주고 싶소"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즉시 젊은 처녀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녀의 눈이 그와 마주치는 순간 그녀는 자기팔로 그의 목을 껴안고 그를 포옹하며 "나는 당신을 결코 버리지 않겠어요! 나의 양손이 당신을 도울 것이며 나는 당신을 돌봐줄 수 있어요. 내가 당신을 보호하겠어요.
이들 부부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부부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참사랑은 조건없는 사랑이며 이 사랑이 바로 예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입니다. 어떤 조건 때문에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그 조건이 없어지면 사라질 것입니다. 그 행복도 그 만족도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조건없이 베푸는 사랑은 언제나 영원합니다. 그 행복도 그 기대도 그 만족도 그 기쁨도 영원합니다. 여러분이여, 예수님의 참사랑을 배우십시다.

3.억지로가 아니라 자발적인 사랑.
3절. 예수님은 자신의 필요보다 우리의 필요를 위해 자기의 목숨을 내어주셨습니다.
이는 억지로가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구원과 은혜를 베푸시기 위하여 자원하신 것이었습니다. 저는 얼마전에 국민일보에 나온 만화를 소개 한적이 있습니다. 말씀의 대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것같아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어떤 점잔은 분이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헌금 시간에 헌금통에 무심코 헌금을 넣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실수로 오천원을 넣을려고 했었는데 만원짜리가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아차 오천원을 넣으려고 했는데, 하니까 주인공인 한나 엄마가 하는 말이 염려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헌금을 오천원만 받으셨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억지를 받지를 않으십니다.
예수님께 부활하신후 디베라 바닷가에서 고기 잡는 제자들을 찾아 가셔서 베드로에게 질문하신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아가파스 메’ 이 말씀은 ‘네가 현재에 나를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느냐’ 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번을 반복해서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세번째는 ‘필레이스 메’ 즉 ‘네가 현재 우정적인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아가파오 세’ 라고 대답해 주시기를 원했습니다. 즉 ‘아가페의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대답은 ‘필로 세’ 라는 대답을 세번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번째는 ‘필레이스 메’ 라고 질문을 하셨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후13:5)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고 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가령 나는 주님은 사랑하지만은 교회는 사랑하지 안아 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교회를 당신의 몸이라고 하셨고 또 교회를 통해서 우리의 사랑을 확증하시기 때문입니다.

4.겸손한 사랑.
사랑과 겸손은 한 형제입니다. 겸손하지 못한 자는 결코 사랑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높으신 우주의 왕이셨지만 벌레와 같은 우리들을 사랑해 주셨습니다.
단테의 [신곡] 가운데 단테가 한번은 연옥에 가서 구경을 합니다. 한 구석을 가보니 여러 사람들이 등에다 무거운 돌을 가득지고 서 있읍니다. 그래서 물어 보았읍니다. "아니 저 사람들은 왜 저렇게 무거운 돌을 지고 서 있읍니까" 그 대답하는 말은 "저 사람들은 세상에 살 때에 너무 교만해서 허리를 굽혀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낙원에 올라가는 문은 낮아서 허리를 굽혀야겠기에 그 연습을 하느라고 저 모양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참으로 겸손한 분이십니다.
4절,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예수님은 저녁 식사 중에 일어나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발을 씻기는 것은 노예들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팔레스틴 지방은 먼지가 많은 건조한 지방이기 때문에 밖에 나갔다 들어오면 항상 손과 발을 씻어야 했는데 그때에 그 집에 있는 하인들이 주인의 발을 씻겨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노예와 같이 저들의 필요한 것을 채워주셨습니다.
여러분, 하늘나라에 올라가면 누가 예수님 옆에 앉을 수 있을까요
목사,장로, 권사, 집사, 권찰, 세례교인, 그리고 세례받지 않은 새신자. 그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지난 금요일 기도 시간에 이런 질문을 해보았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의 열매를 맺어 보셨습니까 즉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 예수님 때문에 고난을 받아 보셨는가고 물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주님때문에 손해를 보고 주님 때문에 욕을 받아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으로 부터 큰 상이 있습니다.
(마5: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마5: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마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여러분 예수님 옆에 앉을수 있는 사람은 주님을 위해 희생한 사람입니다. 주님 때문에 이 땅에서 손해 본 사람입니다. 자신을 낮추어서 겸손히 봉사한 사람. 희생한 사람이 하늘나라에서 가장 예수님 바로 옆에 앉습니다. 교만한 목사보다 겸손한 새신자가 주님 옆에 앉습니다. 교만한 집사보다 겸손한 세례받지 못한 교인이 주님의 축복을 더욱 많이 받을 것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그러므로 겸손하십시다. 나에게 낙심을 주는 남편이라도 겸손히 받들고 나에게 기쁨이 되지 못하는 아내라도 아끼고 위해줍시다. 나 보기에 못난 사람 일지라도 겸손히 사랑해 줍시다.

5. 몸으로 사랑, 적극적인 사랑.
4절, '일어나,' '벗고,' '가져다가,' '두르시고.' 이 동사들은 예수님이 말로만 사랑하신 것이 아니고 몸으로 사랑하신 것을 잘 보여줍니다.
요일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기독교는 이론이 아니고 말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실천이요 순종이요 삶입니다. 그러므로 말로 사랑을 얘기해서는 안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를 사랑 하십니까 묵묵히 말없이 몸으로 실천하세요. 여러분, 남편과 아내를 사랑하 십니까 말로 하지 말고 몸으로 보이십시다. 그것이 힘이 있습니다.
결론) 옛날 멕시코의 마야문명과 아즈텍문명은 아주 찬란한 문명이었습니다만 지금은 사라졌습니다. 아즈텍문명에서 가장 높이 숭배한 신이 전쟁의 신 이었습니다. 그들은 용맹을 부르짖었고 무예를 숭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아즈텍 문명은 폐허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전쟁의 신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한번 사랑한자를 끝까지 사랑하신 분이요, 조건없이 우리를 사랑하신 분이요, 자발적으로 사랑하신 분이요, 겸손히 낮아져서 사랑하신 분이요, 몸으로 사랑 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영광은 영원합니다. 영원히 영원히 주님은 찬송받으시고 영광받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참 사랑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이와같은 사랑을 소유해야 하고 실천을 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는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빌립보교회를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영이 있습니다. 이 사랑이 있습니다. 이 사랑을 본받는 자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며 하나님의 영원한 복을 받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 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